야심 차게 프랑스어로 먹고살겠노라고 작정한 나는 호기롭게도 '프랑스어 우대'가 되는 곳으로, 그중에서도 내가 일하고 싶은 기업에만 지원서를 냈다. 자소서를 50개 100개 썼다는 동아리 친구들, 같은 과 동기들의 위세에 잠시 위축되기도 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진짜 가고 싶은 곳에 지원해야지 지원서를 내서 뽑아주는 곳에 가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다소 당돌한 생각을 했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경험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기회의 수를 넓힌다는 점에서 더 지원서를 넣었을 것 같기도 한데, 지금으로 부터 10년 하고도 N 년 전의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선택적 집중 지원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번번이 실패로 끝이 났다. 심지어는 인턴으로 일했던 곳에서 추천서 한번 들이밀지 못하고 서류에서 탈락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서류 탈락 그리고 1차, 2차 그리고 최종면접 탈락까지 여러 잔의 고배를 마시고 넋 나간 12월을 보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외국계 화장품 회사에 합격하긴 했는데,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마저도 입사를 포기했다.
당시에 2008년 금융위기 직후라서 분위기도 흉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같이 인턴을 다녀와서 복귀한 동기들의 취업소식이 하나둘씩 들려오는 걸 보면 또 될 사람은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좀 좌절스러웠다. 평가도 좋았고, 연수기간 성적도 괜찮았는데 결국 전공의 문제인가, 내가 가진 것이 이렇게나 환영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자기 연민을 넘어선 자기 비하의 길로까지 빠져 오랫동안 허우적거렸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학교까지는 그래도 미래를 준비한다는 미명 하에 나름 정해진 길로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혹은 무엇이 있기를 바랐는지 나 조차도 확실하지 않으니 불안감이 더 컸기 때문에 애먼 전공을 탓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것 외에 어떤 자질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지 그리고 정말 프랑스어를 살리고 싶다면 더 적극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 회사들을 찾아 나섰다면 좋았을 텐데 알려진 한국기업에서 한정된 인력만을 뽑은 자리에만 도전했던 점이 좀 아쉽다. 한국기업들만큼 많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한불 상공회의소 같은 단체도 있었고, 묻지 마 지원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사 공고가 나기 전에 직접 역으로 연락도 하는 적극성이 더 있었다면 나의 좌절과 고뇌의 기간이 좀 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나마 당시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것은 여전히 '내가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는 곳'에 가겠다는 것 하나만큼은 명확했다는 점이다. 뚝심이라면 뚝심이고 고집이라면 고집이었는데 나중엔 두고 보자 라는 오기까지 생겼던 것 같다. 오기에서 다시 푸념이 자책으로 그리고 다시 오기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당장 취업이 안될지언정 경험이라도 쌓자고 지원한 곳이 외교부 북서아프리카과 인턴 자리였다.
외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꿈꾸었을만한 직업인 '외교관'은 어린 시절 나의 장래희 망중 빠지지 않고 등장했었다. 심지어 외교언어라고 불리는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있었으니,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학부생 시절 외교부 견학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외교부를 둘러보고, 실제 근무 중이신 외교관님과의 대화도 참석했었다. 당시에는 외무고시만이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었는데, 교내 외무고시 준비반 설명회를 드은 뒤로 고시공부에 지레 겁을 먹고 시도도 하지 않았지만 늘 마음속에 아쉬운 마음은 있었다. 비록 인턴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깨너머로 내가 꿈꾸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간접 체험해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한국어 면접 이외에 프랑스어 구술 면접도 있었고 한국 신문기사 한 단락 정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필기시험을 치르고 운이 좋게도 근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막상 외교부에 인턴으로 들어가 보니 외무고시 출신 말고도 특채라는 전형으로 3등급 서기관들이 제법 계셨다. 그중에 한 분이 통번역사 출신으로 외교부 통역관이자 불어권 국가를 맞고 계시는 분이시자 내 프랑스어 면접을 봐주신 분이었다.
총 7-8분 정도로 구성되었던 팀으로 기억하는데 각각 담당하시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시황을 업데이트하고, 국가별 이슈를 정리해서 드리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어깨너머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둔 20대 중반 김오뚝에게는 너무나 값진 경험이기도 했지만 기한이 정해진 인턴이기에 인턴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자리는 찾아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던가, 그러던 중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프랑스 명품회사에서 어시스턴트 공고가 나왔다는 것.
지금도 그렇지만, 보통 외국계 회사 그리고 패션이나 뷰티 그리고 명품업계는 알음알음 채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공고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프랑스에서 나름 패션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명품 브랜드를 줄줄 꾈 정도의 실력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품회사라기보다 '프랑스' 회사라는 점에 확 이끌려 지원을 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명품 중의 명품이라 불리는 이 브랜드가 그렇게 까지 대단한 줄도 모르고 정말 순수하게 '프랑스어를 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가득 찼더랬다. 학과 조교 언니의 전화가 이렇게 기쁠 줄이야.
외교부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받았던 전화라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더 좋은 선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수습기간을 지나야만 정규직 전환이 되는 어시스턴트 자리였지만, 당시에 나에게는 자리보다는 기회가 중요했고 으레 외국계 회사들, 특히 패션회사들의 포지션이 비슷한 조건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프랑스어를 쓸 수 있으리라는 꿈에 젖어 얼른 지원서를 준비했다.
모든 경험은 다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 파리지사에서 인턴을 할 때 같이 일하던 지사 직원 오빠가 프랑스에서 구직활동을 하면서 보여준 이력서 양식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프랑스 회사 본사가 위치한 파리에서 한국 패션회사 인턴을 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 싶다. 비록 명품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패션 주간지, 일간지를 구독하고 요약하면서 조금은 보고 배운 것이 있으니 나름 업계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은 아니라 그래도 면접을 보게 된다면 기쁘게 보러 갈 용기도 생겼더랬다. 운이 좋게도 이력서를 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 연락을 받았고 플래그쉽 스토어인 줄로만 알았던 그곳 메종에 위치한 한국 사무실로 면접을 보러 갔다.
'압도된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화려하면서도 절제 있고 우아한 건물에 한번, 사무실 분위기에 한번 또 놀란 가슴을 애써 감추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프랑스어 면접을 볼 거라고 예상했는데, 프랑스어 면접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났고, 지금도 기억나는 질문은 흥미롭게도 그 시절에, '아버님은 뭐하시는 분인가' 하는 거였다. 워낙에 고가의 제품들이 즐비한 샘플실에서 주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는데, 영화에나 나올법한 질문을 받고 보니 기분이 묘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기억났던 질문은 '한국인의 쌀 소비량을 어떻게 측정하겠는가?' 하는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상황 대처 능력을 보시려고 한게 아닐까 싶은데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그런 틀을 깨는 질문을 해주신 사장님이 계셨기에 알음알음 소개로만 채용을 해왔던 그 회사에 내가 들어갈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취업준비를 시작한 이후로 내가 원하는 곳에서는 늘 탈락의 고배만 주어졌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달콤한 축배를 마시게 되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는데 더구나 전혀 인맥도 없었던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곳이 프랑스 명품 브랜드 회사라니. 그것도 순전히 프랑스어 덕분에. 그리고 그때 했던 경험들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도움이 되고 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더더욱 프랑스어를 놓을 수가 없어진 것이.
나를 고뇌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프랑스어는 또 다른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준 통로이자, 나를 표현하는 도구이자, 나의 무기기 되었으니.
회사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를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해서웨이를 많이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도 떠오른다. 왜일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