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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뚝 Sep 11. 2021

프랑스어, 미련과 밥벌이 사이

20주년 특별판제4화-알제리에서파리 주재원까지

10년 전, 통번역대학원에서 만난 동기, 선배들은  주로 저와 같은 어문계열 전공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나 한불과 같은 경우 대부분이 프랑스어 전공자였지만, 그중에도 전혀 다른 전공을 가졌는데 대학원까지 들어온 동기 및 선배들을 보면서 적잖이 놀랐던 적이 많습니다. 프랑스어 한 우물만 파왔던 저로서는, 영문과, 국문과 전공생들도 다 신기해 보였었습니다. 심지어 아랍어 전공생 언니도 있었는데, 어떻게 프랑스어를 공부해서 이렇게 통역사의 길까지 왔는지도 놀랐지만 그보다도 더 놀랐던 건 비 언어과인 물리학, 그리고 철학이었어요. 


언어에 흥미를 가지고 언어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통역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에 와서 공부를 하다 보니 언어능력, 통역 스킬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 많은 배경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도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으로 하지 않은 사람이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그중에 한 사람이었던 분을 섭외했는데요. 철학으로 프랑스어를 시작해서 지금은 파리의 주재원으로 멋진 커리어를 펼치고 있는 K 님과의 인터뷰입니다. 


다재다능한 K님과 졸업 전 사은회에서 유일한 남학우였던 K님과 그 유명한 달리다(Dalida)와 알랭 드롱 (Alain Delon)의 빠롤레(Parole, Parole)를 함께 불렀었는데요, 다채로운 이력만큼이나 흥미로웠던 한불과의 알랭 들롱으로 아직도 회자되는 K님과의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K님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신 일은 어떤 일인지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2013년 2월에 통번역대학원 졸업을 하고 알제리 건설 현장에서 1년 반 정도 통번역 업무를 했습니다. 이후에 한국 식품회사의 프랑스어 특기자로 이직을 했는데 여러모로 특기를 살리기 힘든 환경이어서 2015년 7월에 지금 회사로 이직해서 현재는 지금 회사의 프랑스 법인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은 통번역 쪽 하고는 거리가 멀고요, 회사에서 개발하고 생산한 의약품을 프랑스 시장에서 판매하는 영업 부서의 director로 일하고 있습니다. 늘 프랑스 현지 직원들을 데리고 고객들을 상대하고 있어요


정말 다양한 일을 해오신 것 같아요. K님의 프랑스어와의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어떤 계기로 프랑스어를 접하게 되셨고 배운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프랑스어는 대학교 2학년 때 프랑스로 유학을 결심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어요. 

제가 한국 나이로 마흔 살이니 저도 김오뚝님과 와 비슷한 시간 동안 프랑스어를 가까이에 두고 살고 있네요.


그럼 프랑스어를 처음 배우신 게 대학교 이후 셨네요. 

프랑스어를 배우기 전/과 후 프랑스어에 대한 편견이나 인식이 달라진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아무래도 학문을 통해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를 처음 접해서 그런지 그쪽으로 편견이 좀 있었어요. 프랑스 사람들은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데카르트 방법서설 정도는 읽었을 것이다, 물질자본 중심의 미국 문화와 대척점에 있는 사회일 것이다. 68 혁명의 정신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을 거고 많은 사람들은 CGT (쉽게 얘기해 민주노총)를 지지할 것이다. 뭐 이런 편견은 있었어요. 흔히들 생각하는, 패션의 도시, 시적인 샹송 가사들 뭐 이런 쪽으로는 비교적 편견이 없었던 것 같네요. 


K님의 대학 전공은 철학이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후 통번역대학원에서 한불과를 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대학원 진학 후 어떤 커리어 패스를 계획해셨고, 이후에 어떻게 이루어지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우선 대학을 마치고 공군에서 프랑스어 통번역 장교로 복무를 하게 되면서 유학 결심을 접었던 것 같네요. 당시에 만나던 사람하고 제대 후에 바로 결혼하게 되었으니 아마 가정을 꾸린다는 부담감이 가장 컸던 것 같고, 또 학문 관련 모색을 하면서 제가 철학을 하기에 아주 좋은 사유 구조를 가지진 않았구나 하는 걸 깨닫는 계기들이 있었어요. 게다가 군 복무 중에 통번역 일을 간간히 하면서 저랑 맞다는 생각도 했고, 인터넷 서치를 통해 전문 통번역사로도 충분히 가정을 꾸릴 수 있겠다 정도의 결론을 내렸던 것 같아요. 

대학원 진학 후 또 생각이 바뀐 게, 우선 저보다 통번역 면에서 뛰어난 친구들을 많이 보았고, 사실 업계 자체가 (특히 통역) 여성 친화적이라는 생각도 현장에서 느꼈고요, 뭐 첫째가 태어나면서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어서 일찍부터 인하우스로 방향을 틀었던 것 같아요. 알제리는 사실 통번역대학원을 나온 남자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쉬운 선택지여서 (요즘은 해외건설업황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부터 시작했는데, 알제리에 있을 때는 그 이후의 커리어는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몸담았던 회사에서 2~3년 정도 있으면 한국 본사에서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란 얘기를 가끔 주변에서 해주셔서 막연히 그러면 되겠지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알제리에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위기가 찾아왔어요. 가족들과 영상통화할 때마다 너무 심적으로 힘들어졌고 매번 휴가 마치고 알제리로 가는 길이 어찌나 길던지, 또 회사에서는 본사에 기회가 있다는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계속 알제리 생활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것이 일적으로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이래 저래 이직을 계획하기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이직을 하려면 인터뷰도 여러 번 봐야 하고 실제로 대면 미팅도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당연히 하는 채용 과정이라 사실 한국에서 일할 수 있고 프랑스어를 활용할 수 있는 회사면 어디든 좋다는 마음으로 기회가 있는 곳에 어디든 지원했고, 그러다 머지않아 한국 식품 회사에 채용 결정되고 이직을 하게 되었죠. 


그럼 K님은 대학원 졸업 후에 대기업 인하우스 통역사로, 그리고 수산업 관련된 기업에서 해외영업을, 그리고 지금 파리 지사 파견까지 다른 업계로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전환하셨는데요. 앞서도 첫 번째 이직의 이유는 말씀해주셨는데, 그 이후로는 어떤 이유로 이직을 결심하게 되셨고, 또 각 직장에서의 프랑스어 혹은 프랑스와의 업무 유관도는 얼마나 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물론 프랑스에 계시니 일상적으로 하고 계시겠지만요. 


수산업 관련 회사로의 이직 계기는 위에서 말씀드리긴 했는데요. 사실 그 회사는 별생각 없이 저를 받아준다길래 가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았어요. 우선 모든 직원에게 존경받는 오너가 있었고 그 오너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회사였어요. 두 가지 정도 힘든 점은, 우선 업무량이 제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많았다는 거였죠. 한 달에 하루 이틀은 아예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정도였고 다른 날에도 밤 열 시 퇴근도 와이프한테 빨리 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 그 많은 시간들을 어영부영하는 게 아니라 정말 분초 단위로 엄청나게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해야 했어요. 게다가 저는 해외영업이나 식품 쪽에 커리어가 없는 상황에서 업무에서 요구하는 기본직무 사항 (제품에 대한 전문성, 무역에 대한 전문성, ERP 다루는 것 등)을 따라가는 것도 버겁더라고요. 두 번째로 힘든 점은 프랑스어가 저의 유일한 무기였는데 제 무기를 활용할 기회가 생각보다 없었어요.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저는 직무 전문성도 없는데 직급만 높은, 뭐 그런 직원이라는 시선을 받았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로 제가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려면 제 무기를 잘 살리는 곳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다시 이직 준비를 시작했지요. 


그러고 지금의 회사에 이르렀어요. 지금 회사는 제가 입사할 당시에는 현지 파트너사와 계약을 통해 간접판매를 주로 영위하는 회사였는데, 슬슬 해외시장에 직접 지사를 설립해서 판매도 직접 해야겠다는 계획을 가진 회사였어요. 저는 우선 프랑스 쪽 파트너사를 관리하는 업무부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제 특기를 살리면서도 간접판매이기 때문에 전문성보다는 파트너사의 니즈를 파악해서 본사와 코디네이션하고 파트너사의 판매를 서포트하는 업무가 주였던 터라 제 성실함이나 끈질긴 성격도 돋보여 초반부터 만족하면서 일했던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입사하고 1년도 안 된 시점에 제가 관리하는 시장이 프랑스가 아니게 되었는데, 그 정도 되니 어느 정도 제약업에 대해 익숙해지고 게다가 당시에 제 인생의 귀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좋은 상사를 만나게 되어서 어느 시점부터 프랑스어를 살리지 않고도 신나게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회사 특성상 일 년에 절반 이상 출장을 다녔는데, 사실 그 정도도 이미 알제리를 겪어서인지 힘든 것보다는 재밌는 점이 더 많았어요. 프랑스 시장 이후에 제가 맡은 곳이 발칸, 동유럽,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인데 그때 만난 상사가 미국 캐나다 시장에 집중하게 되면서 2016년 말부터 2019년 말까지 북미지역에 일 년에 6~7개월을 출장 다니면서 일했던 것 같네요. 


프랑스 주재원으로의 발령은 역시나 지금 말씀드린 상사가 승진하시면서 유럽 사업본부장을 함께 맡게 되어 다시 그분이 저한테 프랑스 시장을 맡기면서 오게 되었습니다. 입사 때와 달라진 점은 입사 때는 간접판매 및 파트너사 관리였는데 지금은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직접 파는 업무를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이겠네요. 회사에서는 거의 제 입에서 나오는 말과 제 손에서 쓰는 이메일의 70%가 프랑스어고 15프로가 영어, 15프로가 한국어니 제 일과 프랑스어와의 유관은 매우 높지요. 회사에서 북미 지역은 아직도 간접판매 모델을 영위하고 있데 여전히 제가 북미 쪽 파트너 관리를 하고 있어서 프랑스에서 프랑스 시장 업무를 하면서 동시에 북미 쪽 파트너사와 계속 교신을 하기 때문에 영어 활용도도 높은 편이에요. 


통번역사로 시작해서 아예 지금은 다른 커리어로 완전하게 전환이 이루어지신 셈이네요. 

지금까지 프랑스어를 무기로 일을 하시면서 막상 필드에 나와보니 이런 게 다르더라, 혹은 이런 게 좋았다 싶은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직장생활에서 대체 불가능하다란 건 큰 장점이에요. 혹자는 어떤 업도 대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 정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를 건드릴 수 없는 전문영역이 있다는 게 좋은 부분이죠. 물론 저희가 무슨 공인된 라이선스를 가진 건 아니지만 회사에서 그런 라이선스를 가진 업들 (회계사, 변호사, 의사, 약사)과 비슷하게 저희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로 대체하긴 힘들다고 인식하고 그런 부분이 당사자인 저로서는 회사 생활할 때 좋고 편한 부분이죠.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현지어를 하냐, 더 나아가 현지 고객들에게 영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잘하냐의 부분은 프랑스인 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돋보입니다. 현지 직원들에게 한국 주재원이란 이미 한국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부분으로도 충분히 밸류를 가지는데 거기다 플러스로 본인들의 현지 업무까지 도와줄 수 있는 주재원은 언제나 환영받죠. 

막상 필드에 나와보니 안 좋은 점은, 역시나 “통번역 업”으로 인하우스 커리어를 찾는 경우 기회를 잡기가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일찌감치 통번역 직무 자체에서 뭔가를 찾지 않게 되었죠. 


프랑스어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경험이나,

혹은 인생에서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실까요? 


아무래도 업무 출장은 여행하고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세계 여기저기 여행할 기회가 많고 그런 점이 좋죠. 프랑스 주재원으로 오기 전에 북미지역 업무 출장을 하면서 미국 50개 주 중에서 30개 주 정도에 가보았는데 미국인 중에서도 그 정도 여행을 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또 다른 주재원과 달리 현지 생활을 충분히 누리면서 생활하는 경험, 보통의 주재원들보다 현지 생활에 조금 더 동화되어 생활할 수 있다는 것, 그런 부분이 가족들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주재원 생활 이후에도 현지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겨서 앞으로 인생을 설계하는데 선택지가 늘어난 점이 있겠네요. 


나에게 프랑스어란 _________다 

문장을 완성해 주시고, 이유를 함께 말씀해주세요.


“미련이자 밥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좋아하던 프랑스 출신 사상가들의 글을 한국어로 접하고 유학을 결심했고 결국 방향을 틀고 어떻게든 프랑스어를 활용해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좋아하던 글을 프랑스어로 읽게 되었을 때의 즐거움과 즐거웠던 공부를 접기로 했을 때의 아쉬움이 남아 있네요. 밥벌이 역시 긍정적 의미로 쓴 거예요. 프랑스어 때문에 밥벌이를 하고 있고, 그 토대로 제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제 아내도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으니까요. 



인터뷰를 구상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기회도 되었는데요. 새삼 프랑스어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나, K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는 그래도 10년 전에 같은 출발점에 있었는데 이렇게나 다양하게 커리어를 개발해 오면서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 해온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랑스어를 미련과 밥벌이라고 표현해 주신 것도 상당한 공감이 갔고요. 통번역사로서 커리어를 계속해서 개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과 함께 지금 저의 밥벌이를 책임져 주는 가장 큰 공신이 바로 프랑스어이기도 하니까요.


멀리 파리에 있으면서도, 몇 년 만에 불쑥 요청한 인터뷰에도 이렇게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신 K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안 그래도 좋아하는 파리에 또 가야 할 하나의 이유가 생긴 것 같아 기분 좋은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K님, 제가 꼭 맛있는 밥 대접할게요. 




-인터뷰 다음 편 예고 - 전문 통역사 Rena 교수님 인터뷰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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