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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뚝 Sep 25. 2021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

20주년 특별판 제5화- 22년 차 동시통역사 Rena 교수님 인터뷰

각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인 곳, 회의실 위로 보이는 동시통역 부스,

각 나라 수장 뒤편에 자리 잡고 통역하는 대통령 정상회담,

티브이 화면 한편에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수화통역사의 손과 함께 맞물려 들려오는 통역사의 목소리,

그리고 중요한 협상이 오고 가는  비즈니스 회의 통역까지.

통역사를 꿈꾸면서 한 번씩 그려왔던 장면들을 떠올리면 하나하나는 지금도 괜스레 가슴이 떨려옵니다.


오늘 인터뷰에 모신 분은 저에게는 떠올리면 설레는 '로망'처럼 남아있는 이 장면들을 22년째 동안 함께 해오고 계신 분입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원에서 강의를 해주셨던 교수님이셨는데요. 워낙에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었기에, 통번역대학원 재학 중에는 교수님께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표현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불어가 교수님의 불어처럼 유려해질 수 있는지 방법론 쪽으로 주로 질문을 많이 드렸습니다. 엄청난 비법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지름길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신 듯 왕도가 없다는 외국어 공부에 성실함과 꾸준함 그리고 호기심으로 답변을 해주셨어요. 그렇게나 실력이 뛰어나신 교수님도 매일 라디오를 들으시고, 책을 읽으시고, 잡지를 보면서 늘 공부하고 새로운 표현을 익히고 늘리신다고 하니 저나 동기들  모 숙연해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워낙 교수님을 존경하고 좋아해서 사회에 나가서도 커리어에 굴곡이 생길 때마다 교수님을 찾아뵙곤 했었는데요. 인터뷰라는 타이틀을 걸고 차분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쩐지 더 특별한 경험이 되었고, 교수님의 프랑스어 여정의 연대기를 거슬러 올라가 현재까지 돌아오면서 잠시 시간여행을 한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단순히 어림짐작만 했었던 교수님의 프랑스어 여정을 하나씩 되짚어가면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입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시통역사의 커리어를 쌓아오신 교수님의 이야기들도 어찌 보면 커다란 틀에서 성실함, 꾸준함 그리고 호기심이라는 키워드가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써놓고 보니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교수님이 이 요소들을 두루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전문가가 되셨구나 하는 깨달음도 새삼 얻게 되었습니다.


한불 통역사이자, 후학을 양성하고 계신 교수님으로 20년이 넘는 시간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계신 Rena 교수님과의 인터뷰, 지금 시작합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한불과 교수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무수히 많은 국제회의에 동시통역사로 왕성하게 활동해오고 계신데요, 커리어는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 그리고 처음 프랑스어를 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99년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프랑스어와의 첫 만남은 일곱 살 때 가족이 아프리카 가봉으로 가게 되면서 처음 접했어요. 중학생 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으니까, 초등학교 시절은 해외에서 보낸 셈이죠.


굉장히 어렸을 때 해외로 나가셨는 데, 적응하시기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처음에 프랑스학교에서는 의외로 적응을 잘했어요. 당시에 짝꿍이 니꼴라라고 프랑스인이었는데, 그 친구는 받아쓰기를 너무 못해서 맨날 선생님한테 혼났고 저는 항상 칭찬을 받을 정도로 불어를 잘했어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데 워낙 어린 나이에 가서 그런지 프랑스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랐던 것 같아요.

프랑스어가 너무 좋았으니까 적응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는 한국에 들어와서 많이 힘들었어요. 중학교 1학년에 들어왔는데, 그때가 하필 바로 기말고사 기간이었어요. 해외 체류 시에도 부모님과 한국어로 대화했으니 일상생활 대화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막상 시험공부를 시작하려니 모르는 단어들이 너무 많았어요.  ‘대전이 무슨 뜻이야?’라고 할 정도로 고유명사와 지명 같은 게 어떤 건지 구분을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엄청 힘들었어요. 지금도 등수가 기억나요. 62명 중에 55등이었는데 첫 시험에서 이해도 안 되고 수준도 너무 달라서 많이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가봉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수학도 잘했었지만 우리나라 수학 수준은 그 나라 수준하고 너무 달랐고 그나마 55등을 하게 해준건 영어랑 한자 덕분이었어요. 한자도 어렸을 때 배웠는데, 한자에 강했어요 제가. 나중에 통대에 한국어 수업 중에 한자시험이 있었는데 저 말고 모두 재시험을 봤던 기억이 나요.

어쨌든, 당시에 너무 다른 분위기에다가 따라가야 하는 양이 벅차고 많아서 오히려 한국에서 말도 못 하게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어렸을 때 해외에 체류하고 돌아오면 언어를 유지하기 위해서 따로 과외를 받았다거나 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교수님도 그 이후로는 불어는 계속 따로 공부를 하신 거예요?


책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책이 불어를 유지하는데 엄청 많이 도움이 되었죠. 제가 동생이랑 2살 차이가 나고 동생도 똑같이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했어요.

둘이 나이 차이가 많이 안 나고, 둘 다  비슷한 때에 가서 비슷한 때에 온 거죠. 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온 건데, 책을 많이 보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가 똑같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동생의 프랑스어가 예전 수준만큼 유지되진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책이 진짜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당시에는 불어 소스가 많이 없으니까 읽은 책은 또 읽기도 하고. 정말 책을 많이 읽었어요.


책 말고 다른 과외 같은 건 받으신 건 없으세요?

따로 과외는 받은 건 없어요. 프랑스어는 사실은 저도 잊어버린 게 많아요. 우리나라 왔을 때에는 공부에 너무 치여서, 우리나라 공부를 따라잡느라고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불어 책 볼 여유도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느껴지더라고요. 어제 생각났던 불어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정말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원래 분명히 알았던 단어들이 확확 사라지는 게 느껴져요. 한순간에 기억이 안 나는 거죠. 눈앞에 있는 걸 다 불어로 알았는데 어느 순간 다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는 대학교 갔을 때 보니까 저한테 남은 건 발음이랑 기초 문법 이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럼 대학교 다니실 때는 어떠셨어요?

저는 불문과여서 문학을 많이 했는데, 당시에 불어 실력으로만 보면 제가 제일 잘하긴 했어요. 문학수업은 거의 해석이 대부분이었는데  준비를  안 하고 가도 해석은 다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교에서는 문학을 공부하다 보니 그때 쓰이는 아무래도 일상생활이나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 그런 어휘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또 언어 학사 언어학 개론 이런 걸 배워도 실생활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학부 때 큰 도움은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기억에 학부에서 언어가 그렇게 발전한 느낌은 아니었어요.

근데 대학원에 와서 언어만 하면서 문학이랑 다르니까, 여러 분야로 공부를 하다 보니까 많이 채워진 것 같아요.


대학교 때 프랑스어가 그렇게 발전할 만한 환경이 아니셨다면, 프랑스를 가거나 프랑스로 대학을 가실 생각은 안 하셨어요?


그래서 갔죠. 제가 서강대를 학부로 다녔는데요. 당시에는 교환학생이라는 게 많지도 않았고, 특히나 우리 대학에는 프랑스 교환학생 자체가 없었어요. 제가 92학번인데, 그때만 해도 여자가 휴학하는 경우는 없었어요. 남자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그렇긴 했지만 복학하기 전에 휴학도 하고 그랬는데,  더구나 어학연수도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과에서도 다 때 되면 졸업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저는 마냥 때 되면 졸업하고 그러고 싶지가 않았어요. 프랑스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어학연수로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학연수를 받아도 될 수준인 것 같은데, 그때는 또 딴에는 어학연수만 하러 프랑스를 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파리에 있는 모든 대학에 다 원서를 넣었어요. 서류를 준비해서 번역을 해서 공증받아서. 거의 모든 대학에 넣었는데 우리나라에서 학력고사를 봐서 서강대를 간 거는 어떤 증명도 안 되는 거예요. 바칼로레아(대학 입학자격시험)로 인정을 안 해주는 거죠. 90년대 초반이면, 그때는 지금처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지도 못하니까 차라리 가봉에서 대학을 나왔더라면 더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프랑스어권이니까요. 그런데 이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서 상위권 대학을 갔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결국에는 그렇게나 원서를 많이 냈는데, 딱 2군데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한 곳에서는 1학년부터 수업을 들으라고 했고, 다른 한 군데에서는 와서 시험을 통과하면 3학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어요. 제가 그때 3학년이었어서 그때 3학년으로 바로 편입을 하고 싶었거든요. 메일도 없었을 때니까 다 편지로 소식을 받고 94년도에 비자도 없이 일단 프랑스에 갔어요.


거기가 파리 7 대학이었고 어떤 시험인지도 모르고 갔어요. 큰 강의장에 동양인은 저 혼자였던 것 같아요.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작가의 시를 한편 주고 논술(dissertation)을 하라고 하는데 3시간인가 되는 시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걸 해야 하는 거예요. 그전에 문학을 하긴 했지만 거의 수업이 다 강독이었지 이렇게 분석을 해가면서 논술형으로 글을 쓰는 일은 없었거든요. 근데 또 합격을 해서 3학년을 다니게 되긴 했는데 실력이 너무 형편없다 보니까 수업을 쫓아갈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문학적 감수성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문학수업을 하면 해석은 다 되었는데 가서 보니까 모든 수업에서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이야기하는데, 일단 저는 그 텍스트를 접해본 적도 없고 인문학적으로 너무 부족하다는 걸 느낀 거죠. 그래서 포기했어요.

이건 내가 밤새서 공부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과를 잘못 택한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다른 과였으면 달랐을 수도 있는데 프랑스 학생들이랑 프랑스 문학으로 공부를 같이 한다는 게 제가 경쟁력이 전혀 없는 일이었던 거죠. 그리고 나는 문학적 소양이 없구나. 나는 문학을 소비하는 사람으로 좋아하지 비평하는 사람이 아니다. 즐기는 사람이다 이런 걸 깨달았어요.


이후에 그럼 귀국하시고 졸업하시면서 통역대학원을 들어가신 건데, 원래 통역사가  꿈이셨나요?


외교관이나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외무고시 같은 류의 시험을 준비할 자신이 없었어요. 사실 저는 한 번도 나는 통역사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마음먹은 적은 없었어요.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통역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어요 사실. 불어를 사용해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통번역 대학원에 간 거였어요.  


저는 불어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지금도 좋아하고요. 어렸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그때는 지금 생각해도 불어를 완전 네이티브처럼 잘했어요. 말도 엄청 빠르게 하고 잘하고. 그때 한국 교민 아저씨 한분이 지나가면서, 너는 통역사해야겠다.라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런가 했었죠.

  

사실 학부 때 교수님이 저한테 계속 문학으로 대학원 오라고 했거든요. 해석하는 거 하지 말고 해석이 되는 상태에서 문학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파리 가서 하나 얻은 게 있다면 문학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거였어요.

그러고 나서 취직을 하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면접 기회까지 받아서 정장까지 다 사다 놓고 결국에는 면접장에 안 갔어요. 내가 나를 아는데 조직생활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통역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때 학부 때 교수님이 엄청 만류하셨는데, 나중에 제가 통역하는 걸 보시더니 잘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문학이 내 영역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아셨나 봐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드문 일이기도 한데요. 저는 좋아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괜히 프랑스어를 해서 이런가 하는 원망이 들 때도 종종 있었는데 교수님은 좋아하시는 일을 업으로 삼으셨는데 힘든 점은 없으셨어요?


프리랜서이다 보니까 일이 없을 때는 물론 쉽지만은 않겠죠.  그런데 제가 결혼을 일찍 했거든요 결국 일이 없는 시간이 육아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아기를 낳고 나서 박사도 바로 했고. 그래서 저는 늘 공부를 하던가, 일을 하던가, 애기를 보던가 시간을 계속 쪼개야 했어요. 10년을 거의 그렇게 하니까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일, 프랑스어에 대한 책임을 탓하기에는 이미 내 자리가 꽉 차있었어요. 일 말고도 해야 할 일들이 늘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런가 불어에 대해서 오히려 더 불어공부를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항상 시간이 부족했으니까요. 강의 준비해야 되지, 통역 준비해야지, 애들 봐야지 박사 수업 준비해야지 그러다 보니까

원망을 하거나 애증이 될 만큼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저는 불어가 너무 좋아요.

듣고 읽고 이런 걸 되게 좋아해요.


만일 불어를 안 하셨더라면 다른 언어를 또 배우셨을까요?


네, 그랬을 거 같아요. 원래 언어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과목도 언어 쪽이었고요.

보통 대학에서 전공 외에 교양수업은 나중에 도움되는 걸 듣잖아요. 학점 따기 쉽다거나. 저는 막 라틴어 듣고 근데 막 폐강되고, 한문 수업도 찾아 듣고 그랬거든요.  점수 잘 나오는 과목 많았는데 그것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들었어요. 언어에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통역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언어가 싫다는 사람이 없어요. 언어가 좋고 늘 호기심이 있고 이나라 말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태생적인 그런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나라 말로는 이걸 뭐라고 할까, 알아냈을 때 그 희열, 혹은 퍼즐 끼우는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여기에 맞는 짝이 없는데 들어맞는 그런 느낌이죠.


지금도 읽거나 들어도 재미있는 게 라디오를 들어도 제가 맨날 모르는 게 늘 나오니까요. 늘 새로운 게 나오고 그런 게 참 재미있어요.


그럼 혹시 프랑스어 인풋을 늘리시는데 특별한 루틴이 있으세요?


저는 불규칙의 정수예요. 그래도 늘 챙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 요즘은 팟캐스트로도 많이 들어요.

예를 들어 지하철 타고 간다 그러면 하나씩 듣게 되고 차에서도 항상 켜놔요.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그런지 차를  딱 타면 제가 늘 즐겨 듣는  팟 캐스트가 켜져요. 그렇게 하고, 또 가끔 잠 안 오면 하나 켜놓고 듣든 안 듣든 잠들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항상 들어요.


20년 넘게 프랑스어로 일을 하시면서 필드에서 경험하셨 던 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너무 많긴 한데, 한 번은 밤나무 즐비한 산속에서 헬기사고가 나서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면서 통역을 한적도 있어서, 이런 통역도 있구나 싶었던 적도 있고요.

정말 인상적이었던 건, 한불 정상회담 이후에 브리핑을 생방송으로 통역을 있는데 프랑스에서 방송 송출이 중단되었는지 피드(Feed)가 끊겨버린 게 정말 괴로웠어요. 제가 낸 사고도 아니고 방송 사고 이긴 했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마크롱 대통령이 한창 연설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끊겨버리니 방송사에서는 다시 세트로 돌아와서 앵커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막 메꾸는데, 한참을 그러고 있었거든요. 연설문도 없었어요.  보통 대통령 연설이면 미리 연설문이 있었을 텐데, 프랑스 쪽에 있는 동시동역팀에게는 아마도 줬을 것 같아요. 저는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고용돼서 간 거라서,  문재인 대통령 꺼는 받았는데 통역할 일은 없었죠. 프랑스 대통령 꺼는 받을 수가 없었어요. 엘리제궁에서 한국 방송사에 굳이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현장에서는 기자들에게 배포가 되었을 텐데, 여기는 한국이니까요.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르는 동시통역인데, 심지어 방송이 나가는 동시통역이었어요. 처음에는 바로 다시 될 줄 알았는데 한참 후에까지 끊겨서 아무런 소리도 안 나오는 채로 있었는데 정말 한순간에  팍 하고 피드가 들어오는 거예요.

아나운서 두 분이 한창 수습을 하다가 갑자기 탁 하고 들어왔는데, 그것도 문장 가운데에서 들어온 거죠.

심지어 전문장에서 잠깐 끊겼으면 대략 짐작이라도 할 텐데 정말 한 단락 중에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그 중간에서 갑자기 들어왔어요.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하는데, 정말 1초도 안 지나서 빨리 통역해달라는 목소리라 인이어를 타고 들어오는 거예요. 사실 텍스트가 있었어도 이게 어느 부분인지 찾았어야 했을 거예요. 워낙 문장 중간에서 들어왔으니까. 방송은 2-3초만 공백이 나도 사고가 나는 거니까 그래서 엄청 황당하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통역 현장에 이런 사고들은 꼭 있는 것 같아요. 회의장 같은 데서도 내 통역이 옆방으로 들어간다거나 옆방 통역이 우리 회의장으로 들어온다거나 그런 일도 있고. 오히려 이런 에피소드가 없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예요.


저 같았으면 엄청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졌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나 당황스럽고 힘든 일이 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시고 계시니까 덜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실까요?


그렇죠 아무래도. 통역을 하면서 재밌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이구나 이렇기 때문에 더 견디기 쉬운 것도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주변에 보면 불어를 좋아해서 불어로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잖아요. 오뚝씨도 그렇고, 보통 일반 직장인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잘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는 게 당연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보면 눈에 띄더라고요. 가끔씩 회사랑도 한 번씩 같이 일해보면 회사에서도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국 발전하고, 또 그게 자기 발전이 되고 또 그렇게 이어지더가 구요. 내가 인상적으로 봤던 사람들은 그런 거 같아요. 아닌 사람들은 발전 별로 추구하지도 않고요.



벌써 마지막 질문입니다.  '프랑스어는 나에게 ____다' 한마디로 정의를 해주시고 이유도 함께 말씀해주세요.


저는 또 다른 안경 (another glasses)라고 하고 싶어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요.

언어를 통해서 문화를 접하고 문화를 통해서 정보를 접하잖아요.  그런 정보의 소스가 다양해지니까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 그러면  프랑스나 미국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우리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이 안에서 있으면 거기 휘말려서 내부의 시선으로 밖에 못 보지만, 다른 언어를 하면 그 나라에서는 외부의 시선으로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렇게 볼 수 있게 해부니까요. 또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도구인 것 같아요.



"나는 아직도 불어가 참 좋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변함없이 프랑스어를 접하고 늘 새로운 표현을 공부하고 익히신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어쩌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계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좋아한다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애정을 쏟고 새롭게 하면서 결국에는 그렇게 쌓인 것들이 실력으로 돌아오고 그런 선순환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고요.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노력과 애정을 쏟아붓고 있을까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습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영감을 주시는 교수님이기에 저를 비롯해서 이렇게만 많은 팬을 거느리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고요. 언제나 유쾌하신 교수님과의 시간은 늘 그렇듯 이번에도 참 즐거운 데다가 뜻깊기까지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자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시고 또 귀한 시간을 내어 주신 Rena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운치있는 8월의 마지막 주에 교수님을 기다리는 꽃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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