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의 영역에서 : "청춘 예찬"? 글쎄.
아름답고 숭고하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마다않고 찬양하지만, 정작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시작되어 마음대로 어찌하지도 못하는 잔인한 서사. 누군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맞닥뜨리면 비극을 감내해야 하는 그런 것.
느끼는 사람마다 값어치는 천차만별이겠지만, 지금까지 내게 있어서 삶이란 물건은 그리 오래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 별로인 것 같다. 무얼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깐. 누군가를 만나고, 잠들고, 먹고, 일하는 모든 순간 하나하나가. 언제나 참아야 했고, 아쉬워해야 했고, 잠깐 기쁘고 오래 슬퍼해야 했다.
그래서 요즘 생각해 봤다. 더 이상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삶을 살아갈 수 없는 현실과, 스스로의 목숨을 그리 쉽게 끊지만은 못하는 대내외적 딜레마 사이에 갇혀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죽을 용기로 살아가면 된다는 흔한 위로 내지 잔소리는 내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사실 어느 쪽이든 용기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가장 현실적인 결론은 역시 "체념"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나름 "검증된 방식"이기도 하고. 나 자신으로서가 아닌, 내 욕망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 내지는 사회가 미리 만들어 놓은 위치와 역할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 수많은 선조들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살아감"보다는 "연명", "삶"보다는 "생존"이란 말이 좀 더 어울릴 법한 그런 방식이다.
사실 이런 방식엔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태껏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는 나 스스로가 나름 꽤 괜찮은 연기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어떻게 내 자리를 만들면 되는지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서, 앞으로 내가 있을 새 자리를 내가 알아서 만들라며 무작정 등 떠밀리는 현실에 곧잘 분노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꾸역꾸역 쫓겨 만든 어설픈 둥지에서 늘 불안해하며 살아갈 바에는, 어쨌든 자유롭게 오가는 철새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역시도 착시다. 둘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유로워 보이는 철새의 비행은 사실 그 또한 먹이와 계절에 쫓겨 살아가는 허우적거림이 아닌가. 오히려 언제나 돌아다녀야 해서 더 고달플 것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다면 하고 싶은 것 자체를 바꾸는 것은 어떨까? 경제적 여유니 취미생활의 자유니 하는 것을 모두 가지기란 불가능하다면 하나쯤은 아예 포기해버리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체념의 일종이니깐, 아주 당연한 섭리쯤으로 여겨버리는 건 어떨까? 부니 여유니 명예니 하는 흔한 "좋음"들과 거리를 좀 두고,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나만의 좋음"을 추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론적으로는 그럴싸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난 이게 시작과 동시에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안다. 마치 공산주의 혁명의 말로가 좋지 않았던 것처럼. 내 본능이 격렬하게 거부할 테니까.
최근 국제 뉴스 란에서 시끌시끌한 브렉시트 이슈가 생각난다. 협상을 놓고 이랬다 저랬다 하며 EU에 잔류할지 떠날지 갈팡질팡하는 영국의 태도가, 꼭 삶을 놓고 벌이는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이건 내가 살아있는 한 언제나 맞닥뜨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일지도. 최후의 바람 내지 욕심이라면, 계속 살아가든, 죽든, 고통 없이 모든 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 정도이려나.
아니면 당장 어디선가 돈벼락이라도 좀 떨어진다거나.
그놈의 돈이 웬수다 웬수.
P.S.
이럴 때 봐줘야 하는 명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