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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Jul 02. 2020

어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게 된 나에게

호칭과 나의 규정에 대해

여느 날처럼 아이들을 급하게 데려다주고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렀다. 비 소식이 들려서 일까 왠지 바람이 쌀쌀하다 느껴지는 아침 공기를 느낄 새도 없이 때마침 정류장으로 들어서는 버스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를 했다. 눈 앞에서 닫혔던 문이 다행히 다시 열렸고,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버스에 무사히 안착했다.


기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카드를 찍고, 버스 뒤편에 빈자리가 있는 걸 발견하고는 서둘러 자리에 앉으려고 엉덩이를 붙이려는 순간, 저 멀리서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어머니, 카드 찍으셨어요?"

"(설마 나?)네. 저 방금 찍었는데요?"

"아니.. 어머니 카드 찍으셨어요?"

"네. 찍었어요!"

"아니. 거기 말고 다른 분이요."


그제야 어떤 할머니께서 대답을 하셨고, 나는 그 어머니가 내가 아님을 인지했다. 이 무슨 기가 막힌 타이밍이란 말인가! 마침 내가 앉으려는 타이밍에 들리는 소리에 나는 당연히 그 '어머니'가 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호칭이 썩 기분 좋게 만은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카드를 찍었다는 사실이었으니 일단 항변을 했던 것이다. 나는 기사님의 첫 번째 부름에 대답을 하면서도 (마스크를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머니'로 불릴 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나? 싶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래, 사실 어머니가 맞긴 하지...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하며 내 처지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결국 그 어머니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음을 실토한다. (물론 버스에 있던 사람들이 '저 아줌마 혼자 오버한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되고, 미처 자리에 닿지 못했던 엉덩이를 드디어 안착했다. 금요일 아침, 출근길이라 도로는 막혔지만 웬일인지 여유로웠던 버스 안에서 때마침 창밖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책을 펼쳤다. 책을 읽으면서 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호칭이라는 게 뭐길래 그 짧은 순간에 사람 기분이 이렇게 엎치락 뒷치락 할 수 있는 걸까. 만약 기사님이 칭했던 상대가 진짜로 나였더라면, 과연 기사님은 나를 뭐라고 불렀을 것인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동시에 그렇다면 나는 뭐라고 불렸을 때 가장 만족스러웠을까가 문득 궁금해졌다. 기사님이 나를 아줌마라고 불렀다면, 혹은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면, 아마 나의 기분은 누가 봐도 명명백백 추측 가능할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아줌마라는 호칭이 왜  달갑지 않은 것인가 싶은가에 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아주머니 혹은 아줌마라는 호칭은 우리가 참 많이 사용하는 호칭이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게 느껴진다. 비단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세상 많은 아줌마들이 ‘이모’가 되는 것일진데, 기사님이 나이 지극한 할머니께 할머니 혹은 아줌마 대신에 어머님이라고 칭하신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기사님은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진 않았을 것 같다.)


호칭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것은 전혀 악의를 지닌 표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단순히 아줌마 아저씨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 같진 않다. 물론 놀이터에서 만나는 동네 아이들의 아줌마 호칭에(나도 모르게 흠찟 놀란다)대해 거부감은 없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의 어른들이 아줌마라 칭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의 교감선생님께서(지금은 교장선생님이 되셨다.) 그런 호칭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잘 활용하시던 분이셨다. 학교에는 청소를 해 주시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을 마주치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곤 했지만 한 번도 그분의 호칭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인사 외에 그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데, 그런 그분을 교감 선생님은 ‘여사님’이라 칭하셨다. 교감 선생님은 종종 학교를 순시하셨는데, 그 분과 마주칠 때마다 그저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나를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여사님, 고생 많으십니다.' 하면서 항상 말을 건네셨다.(내가 봤던 순간들은 대부분 그러셨다.) 이후에 선생님들 사이에서 그 이야기가 회자되었는데, 훌륭하신 분이라는 데에 모두 입을 모았다.


나의 추측컨대 그분은 아마 처음으로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들으셨을 것이고, 그 일로 인해 아마 자기 일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셨을 것이라 여겨졌다. 누군가 나를 대접하기를 원한다면 상대를 대접하라는 말이 있는데, 교감 선생님의 그 모습은 딱 거기에 걸맞은 것이었다. 본인을 낮추기보다는 상대를 높임으로써 당신도 상대방도 모두에게 좋은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어머니라는 호칭 때문에 왜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냐 싶냐만은 호칭으로 비롯된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 규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실행이 답이다>라는 책에서 저자 이민규 교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넓게 규정하라고 충고한다. 스스로를 '편의점에서 김밥이나 파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편의점 체인 기업을 꿈꾸는 사업가'로 짓는 것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문제는 그런 생각이 내가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여기고 별 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삶을 굉장히 무료하게 만들고 자존감을 낮추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터로 향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극히 드물지만 버스를 탈 때 신명 나는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는 버스 기사님을 만나면 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호칭은 어쩌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대변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호칭으로 불려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어떻게 불러주든 자기가 가진 호칭에 대해 스스로가 자부심을 갖는 것이야 말로 더없이 행복한 삶이 아닐까?




덧.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어머니'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혼자 시트콤 찍었냐며 다들 한바탕 웃었다. 컬투쇼에 사연을 보내보라는 한 친구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또 다른 친구에게 한 번 물어보니 그건 '너'를 알아야지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라며 한 껏 고무(?)된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비록 컬투쇼에 소개될 만큼 박장대소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 에피소드로 남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표지사진 : Photo by visual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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