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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Aug 15. 2021

두 달간 두 번, 응급실에 다녀왔다.

아버지와 한 번, 엄마와 한 번.

두 달간 두 번 응급실에 다녀왔다.

한 번은 아버지와, 한 번은 엄마와.

우선 아버지의 이야기다.


5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아버지가 그즈음 자꾸 어지럽다고 하셨다. 한 번은 넘어지시기도 했다.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뇌졸중이 아닐까. 아버지는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계셨고 나이도 80이 넘으셨기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예전에 엄마가 뇌경색을 두 번이나 앓으셨기 때문에 덜컥 겁부터 났다. 신경외과에 전화했더니 예약을 안 받는단다. 혹시 뇌경색 증상이라면 시간이 금이었다. 엄마에게 전화하니 아버지가 또 어지러우시단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치매안심센터에서 어지럽다고 일찍 들어가셨다고 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우선 남편에게 응급실에 모시고 가 달라 부탁했다. 금요일이라 회사에서 한창 방송 편집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낮 12시 20분쯤 응급실에 남편과 아버지가 도착하고, 나는 1시쯤 도착했다. 코로나로 보호자는 한 명만 상주할 수 있었다. 남편을 보냈다. 그리고 기나긴 하루가 시작되었다. 역시 병원에서도 뇌경색이나 뇌 쪽에 문제가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하기 시작했다. CT를 찍고, MRI 찍기를 기다리는 동안 긴 시간이 흘렀다. 12시 20분쯤 도착했는데, 저녁 7시쯤 MRI를 찍었다. 대기 환자가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알츠하이머이신 아버지에겐 응급실에 있는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불안해진 아버지는 5 간격으로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냐,  빨리 해달라고 하면  되냐. 내가 여기에  왔느냐. 같은 대답을 처음처럼 하면서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리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하고 안심하시고는 다시 같은 질문을 물어보셨다. 내가 여기에  왔지. 지금  시냐.  빨리 해달라고 하면  되냐. 7시에 MRI 찍었는데, 결과는 9시가 넘어서야 나온단다. 가슴이 탔다. 병원의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알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허리 통증으로 고통받던 시기라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어지러운 아버지는 화장실에 가기 어려워하셨다. 소변통을 들고 아버지를 부축해 침대 옆에서 소변을 보시게 했다. 아버지는 소변을 보시고 나면 다시 누워서 안정을 취하고 때로는 잠이 드셨다가 다시 눈을 뜨면 같은 질문을 하셨다. 나는 일부러 시간이 훨씬 덜 된 것처럼 이야기했다. '6시가 되면 모두들 퇴근할 테니 빨리 좀 해달라고 하라'는 아버지 성화 때문이었다. '아버지, 여긴 응급실이고 종합병원이라 괜찮다'는 말보다는 아직 6시 멀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이 더 효과적이었다. 그 와중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다가 의자 다리와 앉는 곳 사이에 손가락이 끼어 멍이 들었다. 억, 소리가 나게 아팠다. 그 순간 응급실 커튼에 묻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고 아파했을까. 내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진: Unsplash 제공


갑자기 응급실이 분주해졌다. 아버지 바로 앞 베드에 중증의 응급환자가 들어온 것 같았다. 듣고 싶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리고 이야기하는 게 다 들렸다. 뇌출혈 환자였다. 출혈 범위가 너무 넓어서 이미 사망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술은 할 수 있지만 생존가능성이 낮다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할머니인 것 같았다. 할머니는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다. '다다다 다다다다'.. 하는 숨소리. 곧 할머니의 딸들이 도착했다. 딸은 15분 전까지도 엄마와 통화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엄마가 그새 쓰러지신 거다. 딸들은 계속 '엄마'를 불렀다. 엄마의 손이 너무 차갑다고 했다.


그분은 곧 중환자실로 올라가셨다. 마음이 아팠다. 딸들이 엄마를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울리는 것 같았다. 싸늘한 죽음의 기운이 우리 곁을 스쳐갔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집에 언제 갈 수 있느냐고 하셨다. 맞은편 환자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이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다시 걱정 말라고 했다.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보다 치매 환자를 안심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들었으니까. 치매 환자의 반복되는 질문의 기저엔 불안이 있는 거라고.


응급실은 여러 사람의 삶이 겹치는 공간이다. 전쟁 같은 상황 속에서도 선배 의사가 후배 의사에게 '지금 환자의 호흡이 안 좋지 않으냐'며 삽관하는 법을 차분하게 교육하고 있었다. 저렇게 또 한 명의 의료진이 길러지는구나, 이렇게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갑자기 응급 상황이 닥쳐서 피곤한 간호사 분들도 계셨다. 친절하고 좋은 분들 같았지만 보기에도 지쳐 보이는 그들에게 질문 하나, 부탁 하나 하기도 어려웠다.


응급실에 오래 있으니 간호사 분도 교대를 했다. 원래 있던 간호사에게 분명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라고 했는데, 새로 온 간호사는 아버지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거슬렸는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조용히 최대한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게 '저희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세요.'라고 말했다. 아무리 태연하게 말하려 해도 그 순간엔 마음이 무너졌다.


집으로.


병원에 오는 사람들의 바람은 그저 딱 하나다.

집으로. 집으로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불안하고 지치는 응급실의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건 의료진들의 따뜻함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담당 교수님인 신경과 신 교수님의 한 마디. '아이고, 왜 그러셨어. 여기 왜 오셨어요. 혹시 뇌경색이면 너무 마음이 아픈데..'라고 하시던 그 모습. 교수님이 아니라 마치 친척처럼 '여기 왜 오셨냐'며 눈가에 살짝 이슬까지 맺히던 의사 선생님의 모습이 위안이 되었다.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마주친 따스함이 그나마 퍽퍽한 현실을 견디게 했다. 그 친절함이 우리가 단순히 환자 바코드가 아닌 사람임을 느끼게 해 준다. 그렇게 힘들고 바쁜 근무 중에도 따스함을 잃지 않는 의료진 분들, 정말 감사하다. 존경한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다행히 뇌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만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처음보다는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그래도 뇌 문제는 아니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여러 과 진료를 받았지만, 어지럼증의 원인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어지러울 때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있다.


10시가 다 돼서야 깜깜해진 병원을 나섰다. 목에 건 보호자 출입증을 가방에 넣었다. 그날 하루, 나는 아버지의 보호자로 살았다.


집으로.


그래도 우린 그날 밤 집으로 왔다. 우리 삶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걱정에 눈물바람이던 엄마가 만들어둔 차가운 김밥을 먹으며.

부모님 집 식탁에 부모님과 남편, 나까지 넷이 앉으니 안심이 되었다.

이 식탁, 식탁의 안온함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기적처럼 지켜지고 있는 것인가.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끝난다. 어제까지 내게 존재하던 세계가 오늘은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이 흔들리고 뒤틀릴 때, 비로소 행복했음을 깨닫는다. 얼마나 감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그날 먹은 김밥은 차갑고 짰다. 자꾸 목구멍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왔다. 찬 김밥과 함께 정체불명의 국물을 삼키며 그 하루도 같이 내려가길 바랐다. 그 식탁의 불완전한 안온함이, 계속되길 바랐다.


그리고 꼭 두 달 뒤, 다시 응급실로 향했다. 이번엔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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