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끔 Dec 11. 2021

우리들의 행복한 공부 시간

부모님의 가정교사가 되는 저녁

아버지는 치매 진단을 받으신 후, 일주일에 세 번씩 치매안심센터에 나가셨다. 집에만 계시다가 정기적으로 가는 곳이 생긴다는 게 좋았다. 그러면서 센터 선생님을 통해 치매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운이 좋으신 건지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한 분은 아버지에게 매일 꾸준히 과제를 내주셨다. 심지어 직접 문제를 손글씨로 써서 내주시기도 했다. 치매 환자 가족으로서 큰 위로가 되었다. 그 고마운 선생님께선 과제를 내주는 일에 그치지 않으시고, 딸이자 보호자인 내게 그 과제를 함께하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며 현재는 센터를 잠시 떠나 계신 상황에서도 그동안 할 과제를 내주시고 가셨다. 보호자로서 든든한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개인과 가족의 불행을 사회가 모른 척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주는 것 같아 힘이 났다. 너무 감사했다.


엄마의 가정교사는 주로 남편이다. :-) 열심히 필사하는 엄마와 남편의 손.

그렇게 우리의 공부 시간은 시작되었다.


억지로 뭘 하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에, 살살 잘 어르고 달래서 식탁에 앉히는 게 먼저다. 그렇게 자리에 앉히고 나면 인지능력 저하를 막아주는 학습지를 푼다. 선생님이 주신 책을 풀기도 하고, 시중에 나와있는 치매 예방용 학습지를 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가급적 자주, 앉아서 함께 머리를 쓰는 것이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엄마도 허리 골절 등을 겪으며 인지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치료과정 중 부작용으로 아버지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밤낮을 헷갈리는 등의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신경과 검사 결과 전두엽의 기능 저하가 뚜렷한 상황이라는 의사 소견이 있었고, 경도 인지 장애 판정을 받았다.


아무튼 그렇게 부모님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가장 고마운  남편이다. 남편과 주중엔 거의 매일  시간 정도 부모님과 공부와 게임을 한다. 처음에는 부모님과 학습지만 풀었는데, 남편이 앞장서서 재밌는 게임 등을 찾아오면서 보다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남편은 게임을 찾아보더니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임이나 학습 교재보다는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용 게임이  다양하고 쓸만하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어르신들을 위한 치매 예방교재는 그렇게 다양하지 않은데, 아이들을 위한 교재는 넘쳐났다. 현명한 남편 덕분에 단어를 만드는 게임이나, 그림을 기억하는 게임 등을   있게 됐다.


가족이 치매에 걸린다 해도, 혹은 병중에 있다고 해도  안에  슬픔만 있지는 않다.  속에도 유머가 있고 고통을 잊게 하는 잔잔한 즐거움이 있다.  순간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고 싶은 것이  바람이다.


카드에 있는 자음을 활용해 단어를 만드는 게임. 원래는 어린이용이다.

사위인 남편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남편만 보면 활짝 웃는 엄마다. 남편이 옆에 앉아서 같이 학습지를 풀어주면 “너무 재밌다!”를 연발하며 즐거워한다. '내 공부는 우리 ㅇㅇ가 가르쳐 주니까' 라며 남편을 기다린다. 필사를 할 때도 나랑 하면 조금 대충 쓰는데, 남편이 오면 글자 한 자라도 더 잘 써보려고 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런 모습이 귀여우니 웃음이 난다. 우리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싫어하지 않고 힘든 길을 함께해주는 남편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할 수밖에. 본인도 일이 많고 힘들면서도 함께 게임해주고 공부해주는 남편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매일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버지지만 막상 시작하면 또 열심히 하신다.
방금 전에 말한 것도 기억 못 하시는 아버지지만, 그래도 아직 아버지의 개그 본능은 살아있다.

큰 웃음은 주로 공부하기 싫은 아버지가 딴짓을 하시거나 장난을 치실 때 나온다. 한 번은 학습지에 화장실 사진이 있고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라는 문제가 나왔다. 아버지는 이런 당연한 문제를 왜 묻느냐는 듯.. '모르면 가봐'라는 답을 쓰셨다. :) 침실 사진에는 ‘남녀가 딩그는 곳(남녀가 뒹구는 곳)’이라고 썼다가 다시 지우고 “남녀가 자는 곳”이라고 고치시곤 하는 식이다. 학습지를 한 장 넘기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또 해?”,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또 하냐”는 질문을 계속하시는 아버지지만 그래도 하시기는 하니 감사할 뿐이다. 처음보다는 확실히 즐겁게 그 시간을 함께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같이 계속 공부를 할 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치매안심센터에선 종종 ‘만들기 과제’를 주기도 했다. 엄마, 아버지, 나 셋이서 클레이 점토로 집을 만들었다. 역시나 엄마에 비해 비협조적인 아버지는 창문을 너무 크게 만들거나 대충 점토를 굴렸다가 엄마에게 혼나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완성한 우리들의 집.

 

부모님과 함께 점토로 만든 집.

치매 환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안정감이라고 한다. 믿을만한 소수의 사람들이 자주 방문해서 최대한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고 안심시켜 주는 게 중요하다고. 병의 진행을 막지는 못해도, 최대한 뒤로 미루는 것이 목표다. 가급적 공부를 매일 하려고 하지만 사실 나나 남편도 일이 있고, 힘들 때도 있어서 쉴 때도 있다. 그래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해보려고 한다. 언젠가 상태가 더 안 좋아지시면, 이런 공부도 하기 어려운 날이 오겠지. 그 순간이 지금은 아님에 감사할 뿐이다. 공부하기 싫어하시지만 그래도 딸이 하자고 하면 또 열심히 해주시는 고마운 아버지와, 사위와 딸이랑 공부할 때가 정말 행복하다는 엄마가 계심에 행복하다.


가정용 두더지 게임. 남편이 찾은 게임기다. 특히 엄마가 좋아하는 게임.

결국 행복이란 게 보석처럼 세공된 채 내 손에 들어오는 건 아닌 것 같다.

두 손으로 진흙 속을 뒤지다 보면 발견되는 아주 작은 진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귀가 안 들리는 엄마가 보청기를 끼니 조금 더 잘 들을 때, 누구의 말도 안 듣는 철부지 아버지가 그래도 딸 말은 잘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힘들게 목욕시켜드린 후 같이 시원한 냉면을 먹을 때. 날짜도, 요일도, 때로는 밤낮도 헷갈려하는 부모님이지만 같이 공부하며 웃을 수 있을 때. 행복이 가장 절실할 때만 찾아지는 작은 행복. 밤바다를 건너며 멀리 보이는 등대의 희미한 불빛처럼, 그래도 꺼지지 않고 깜빡깜빡, 들어오는 잠시간의 행복이 너무 소중하다. 무엇보다, 어둠 속을 같이 손 잡고 걸어주는 남편이 있음에 감사하다.


우리들의 공부 시간이 최대한 오래,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