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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Jun 25. 2023

비 오는 날에도 햇살은 비치니까

보호자로서 작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수요일엔 엄마의 안과 예약이 있었다.

엄마가 다니시는 병원의 여러 과 중 안과는 엄마나 나나 제일 가기 힘들어하는 곳이다.

종합병원에 있는 안과인데, 늘 사람이 많고 공간이 좁아서 엄마가 보행기를 밀고 지나다니시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매번 앉을자리를 차지하기도 어려운 데다 안과 특성상 검사만 1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가기 전에 늘 약간의 각오가 필요했던 거다.


엄마를 모시러 댁에 가자 이미 요양보호사님과 엄마가 준비를 마치고 같이 기다리고 계셨다. 벌써 2년 가까이 부모님 댁에 오시기 시작한 요양보호사님은 항상 밝고 유쾌하시고 모든 일에 호기심이 있는 분이라 안심이 됐다. 늘 혼자 부모님 두 분을 번갈아가며 모시고 병원에 다녔던 나였는데 엄마 병원 동행 때는 이제 요양보호사님과 함께 다니게 됐다.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게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 셋이 병원에 들어가면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내가 진료 절차를 밟으러 돌아다니는 동안 요양보호사님이 엄마를 곁에서 케어해 주신다. 진료를 마치고 약을 타러 병원 밖에 있는 약국에 다녀올 때도 엄마를 혼자 두고 가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하다. 한 간호사는 이런 우리 셋의 모습을 보고 '세 분이 다니시니 군대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으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든든해 보였나 보다. 엄마를 지키는 군대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택시 차창 밖으로 비를 보며 병원에 도착했더니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과가 내부 공사를 마친 거였다. 사람 하나 지나기도 어렵게 비좁던 곳이 다른 과와 공간을 터 놓아서 훨씬 넓어지고 탁 트인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갈 때마다 병원을 바꾸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거 하나만으로도 정말 기뻤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에 셋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보행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편안하게 지나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위축되지 않았다.


진료 예약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병원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 왔다. 엄마는 커피를 잘 안 마시니까 요양 보호사님이 좋아하시는 따뜻한 카페라테. 그리고 내가 평소에 좀 피곤할 때 마시는 달달한 아이스 바닐라라테. 커피를 사서 두 분 곁에 두고 종이컵을 구하러 잠시 다시 커피숍에 다녀오니 글쎄, 엄마가 내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맛있게 드시고 계셨다. 달달한 게 엄마 입맛에 딱 맞았나 보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졌다. 역시 엄마랑 나는 닮았구나 싶어서. 아이스 바닐라 라테가 엄마에게 너무 차가울 것 같아서 요양 보호사님의 카페 라테와 조금 섞어서 드리니 단 맛이 많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하는 엄마를 보니 웃음이 났다. 역시 엄마는 날 닮았어, 하며 웃었다.


그렇게 셋이서 40분이 넘는 대기 시간 동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순서를 기다렸다. 흐렸던 마음이 개기 시작했다. 탁 트여서 더 이상 보행기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말이라도 한마디 더 걸어주는 친절한 의료진, 병원에 함께 동행해 주는 요양보호사님. 그리고 밝고 편안해보이는 엄마.


요양보호사님이 평일에 부모님과 같이 계시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나도 그 시간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부모님이 평소와 다른 증상을 보이시거나 하면 나한테 바로 알려주셔서 대응도 훨씬 쉬워졌다. 무엇보다 어른이 부모님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힘이 된다. 보호자로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감사한지 모른다. 요양 보호사님의 존재가, 함께 돌봐주는 사람의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작년에 상담을 받으며 내가 유년 시절부터 꽤 오랜 기간 동안 '심리적 가장'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함께 나눌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책임지는 일이 생기거나 가족을 지켜야 하는 일들이 있을 때 더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고 때론 공격적으로 변하곤 했다는 것도. 그래서인지 이렇게 내 책임을 나눠주는 이들에겐 더없이 감사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때론 미안하기도 하고.


사진 출처는 unsplash


한편으론 내가 부모님을 돌보는 건 맞지만 일방적으로 돌보기만 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5월에 내가 코로나에 걸렸을 때 한 달 가까이 골골대자 그런 내 모습을 가장 걱정하고 소고기를 사다 구워준 분은 엄마였다. 본인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면서도 아버지는 내가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면 걱정하면서 뭘 잘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 사이를 잘 보면 일방적인 건 없다. 사랑은 결국 오고 가는 것. 주고받는 것이니까. 내가 돌보는 존재가 결국 나를 돌보고 염려한다.


내가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엄마의 그 작은 몸을 꼭 안으면, 엄마도 어린아이 같이 밝고 순수한 표정으로 우리 딸 사랑해,라고 말한다. 때론 두 팔로 하트를 그려주기도 한다. 출근할 때 한 손을 번쩍 들며 '오늘도 힘내! 화이팅!'하고 말하는 엄마의 해사한 얼굴을 보면 그래도 힘이 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찾아가는 데도 '아이고, 이렇게 일찍 나가냐'라고 묻는 아버지지만, 그래도 그날 나의 안녕을 기원해 주는 건 똑같다. 그런 사랑이 하루를 버티게 하고 또다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내게 한다. 한 주에 한 번씩 아버지를 목욕시키는 일이 때론 귀찮기도 하지만 보송한 얼굴이 되어 거실에 앉아계신 아버지를 보면 그것만으로 힘이 난다. 가장 힘들 때, 아무런 기운조차 없을 때도 무언가를 돌보면 또 거기서 힘이 생겨난다더니... 정말 그렇다.


병원 가기 전 미리 걱정했던 것들이 좋은 기억으로 바뀌어 돌아왔던 하루. 비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행기를 싣는 걸 두고 심하게 짜증 내는 택시 기사를 만나 순간적으로 욱하긴 했지만. 그날 한결 널찍해진 병원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던 그날의 기억은 내게 오랫동안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아무리 흐린 날에도 햇살이 비치는 순간은 있다.


그 순간 덕분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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