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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Oct 11. 2023

선배가 내민 약 한 병에 펑펑 울었다

그래, 살아야지.

'나에게 내밀던 이웃의 정은 살라는 의미였다.

그래, 살아야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정을 베푸는 사람이 돼야지.'


이정영 <그냥 그런 하루가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중




올해 5월의 일이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해도 되는 날이라 여유롭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부모님 댁에 와 계시던 요양보호사님께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잘 일어나지도 못하실 만큼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다고 하셨다. 부랴 부랴 출근 준비를 마치고 부모님 댁으로 가니 정말 요양보호사님 말씀대로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지러워하셨고, 머리가 뜨거웠다. 체온계로 재보니 열이 39도나 되었다. 혼자서 화장실까지 걷기도 힘들어하셔서 부축해서 모시고 가야 했다. 아버지는 머리가 핑핑 돈다며 자꾸 주저앉았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고, 타이레놀을 드시게 했다. 열은 조금 내렸지만 계속 상태가 좋지 않아서 불안했다.


당시 새 프로그램을 맡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정신없던 와중이었다. 더는 출근을 미룰 수 없어 요양보호사님께 아버지를 동네 내과에 모시고 가달라 부탁드렸다. 출근하는 내내 불안했지만 막연히 코로나는 아닐 거라 생각했었다. 설마 철이 다 지났다는 코로나가 이제야 우리를 찾아오진 않을 거라고 방심했었다. 그런데,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양보호사님께 전화가 왔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며칠 전 교회에서 마련한 효도 관광에 다녀오신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출근 전에 봤던 아버지의 상태가 떠올랐다. 뭐부터 해야 하지. 입원해서 안정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초창기 코로나 관리가 그랬듯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 싶었다. 80대고, 지병도 있으시고, 당시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많이 힘들어하셨으니까.


혼자 스튜디오에 박혀 어려운 새 프로그램에 적응해나가고 있던 날들이었다. 정말 눈 뜨면 잠드는 순간까지 삶이 너무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아픈 아버지를 두고 겨우 출근은 했지만 그날 방송 준비는 채 시작도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80대 코로나 환자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이래저래 알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그 중 일단 병원으로 와서 입원 여부를 판단해 보자는 곳이 있었다. 잠시 안도했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마음이 어두워졌다. 아버지처럼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경우 격리된 공간에 머무는 게 오히려 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알츠하이머, 즉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들의 경우 코로나는 둘째치고 치매 증세가 악화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더 두려웠다. 설명을 듣고 입원을 포기했다. 그럼 역시 보호자인 내가 뭐가 됐든 돌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두 분 모두 감염되었으니 한 번에 돌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상황을 정리해 가야 할까. 부모님이 감염되셨으니 요양보호사님은 당분간 오실 수 없었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그동안 수없이 가정해 본 상황이었는데도 막상 눈앞에 닥치니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때 스튜디오에 한 선배가 들어왔다. 당시 하루에 12시간 동안 일하는 게 일상이던 시기라 종일 골방 같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서 모니터를 보고 방송을 준비하곤 했다. 뭐 엄청난, 대단한 방송을 준비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정도로 나에게 낯선 일이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스튜디오에서 나는 새벽 프로를 하는 분과 저녁 프로를 하는 분을 모두 마주쳤었다. 그 중 내 모습을 늘 안쓰럽게 봐주고 응원해주던 선배였다. 딱히 같이 일할 일이 없었기에 내가 그 스튜디오에 박혀있지 않았다면 교류점이 전혀 없었을 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스튜디오에서 자주 마주쳤고 선배는 늘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선배는 내가 안쓰러웠다며 당신이 드실 루테인을 사면서 내 것도 같이 샀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입원은 포기했지만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뭔가를 자꾸만 계속 검색하고 있던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선배가 건넨 약병을 보고 참아왔던 감정이 터졌다. 막막함이 잠시 쉬어갈 곳을 찾아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선배가 봤을 때는 얼굴에 눈물이 살짝 흐른 정도였겠지만 내 마음은 정말 펑펑 울고 있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 하나도 없는데 결국 모두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다. 화살표는 정확히 나를 찌르며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는 감정이 터져버린 나를 다독여주며 '네가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냥 그 말씀이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어서 짐 챙겨서 집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그래. 이제 가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모든 사람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고 일은 어렵기만 했던 때였다. 그때만큼 힘듦이 극에 달한 건 정말 인생에 몇 번 없던 일이다.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처한 모든 상황에 화가 났지만 화낼 여력도 없었다. 가장 사랑하는 혹은 사랑해야 하는 것들마저 다 버거웠다. 다 놓고 싶었던 와중에 받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받은 약 한 병이었다.


그렇게 선배 앞에서 잠깐 울고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했다. 물론 나도 다음날부터 코로나에 걸렸다. 많이 아팠다. 나중에는 부모님보다 내가 훨씬 아팠다. 그럼에도, 감사한 날들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제주 카라향을 보내준 분이 계셨고 먹을 것을 챙겨준 분이 계셨다. 걱정해 주고 안부를 물어준 분들이 계셨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대신 기꺼이 해주시면서 부모님 잘 돌보면서 너도 챙겨야 한다며 다독여준 이들이 있었다. 그런 좋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데 자꾸만 감사함을, 삶의 이유를 잊어버린다. 많은 폐를 끼치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보호자로서 나는 내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계속 낯설고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앞으로도 그런 상황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쉬는 날 동네 내과에서 엄마가 급성 담낭염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병원에 가서 응급으로 CT를 찍고 치료하며 정신없이 며칠을 보낸 일 (다행히 응급 수술이 필요한 담낭염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엄마를 지켜보는 일. 자꾸 약해지는 그 모습을 보는 일. 일주일 전 아버지를 목욕시키다 등에서 큰 종기를 발견하고 다음날 바로 동네 외과에서 수술했던 일. 이렇게 크게 작게 보호자로서 계속 내 손이 필요한 일들이 생긴다. 당연하다. 80대 노인에게 크고 작은 병들이 생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 번에 여러 가지 일들이 닥칠 때는 숨이 턱 막히고 생각이 엉킨다.


그럴 때. 돌아보면 그래도 건져주고 이끌어준 손길들이 있었다. 애써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는 건 그 순간에 기대치 않게 마주쳤던 어떤 다정함들 때문이라고. 모든 게 엉망일 때도, 그래서 아무와도 엮이고 싶지 않을때도 어떻게든 마음이 통하고 닿아 위로를 건네는 존재가 있는 법이라고. 그러니 고마움을 잊지 말자고. 나 또한 좋은 사람들에겐 다정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다짐한다. 아직은 그럴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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