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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Sep 11. 2021

그래도 엄마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응급실은 아무리 가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7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이었다. 그 다음주에 휴가를 앞두고 있었기에, 마지막 힘을 짜내며 조금만 더 버티자고 다짐했던 월요일이었다.


회사에 다녀와서 부모님 집에 들렀다. 가자마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엄마가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한의원에 가자고 하셨던 것이다. 불길했지만 단순 근육통이겠지 싶어 아이스팩을 대고 안다시피 해서 한의원에 모시고 갔다. 그러나 치료를 받았음에도 허리 통증은 계속됐다.


다음 날 정형외과에 갔더니 골절이라며 입원할 수 있는 큰 병원으로 가란다. 요즘 엄마가 좀 무리한다 싶었던 참이었다. 평생을 무리하며 살아온 엄마는, 그 삶의 방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날 아침에도 큰 시장에 혼자 장을 보러 갔었다. 제발 몸을 아끼라고, 아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살아오던 방식을 바꾸진 못했다. 여든이 넘어서도, 엄마는 똑같다. 아무리 주변에 도움을 청하라 해도 그때만 고개를 끄덕일 뿐 또 그렇게 무리하며 살아간다. 엄마의 허리가 골절된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2년 전에도 2주 정도 입원한 적이 있었으니까.


구급차는 아무리 타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심장이 벌렁벌렁. (커버 사진과 본문 사진 모두 출처는 unsplash)


결국 부랴부랴 응급실로 향했다.


구급차를 이용해본 게 벌써 여러 번인데, 여전히 탈 때마다 적응이 되질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생명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다 보니 구급대원 두 분과 내가 함께 엄마를 들것에 눕히고 들어 나른 게 기억난다. 엄마는 긴장 때문이었는지 열이 났다. 코로나 때문에 열이 높으면 응급실에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응급실 앞에서 열을 두어 번쯤 더 재고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엄마를 지켜보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얼마 전엔 아버지가 누워있던 자리에 엄마가 누웠다. 응급실에서 몇 시간을 대기했을까. 각종 검사가 끝나고 입원 시 필수인 코로나 검사에 그 결과를 받아들기까지 끝이 안 보이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점심이 조금 지나 도착했는데, 깊은 밤이 돼서야 병실 배정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일반 병실로 들어간 이후엔 면회가 아예 안 된단다. 병원 매점에서 엄마가 쓰실 기저귀와 위생 장갑 등을 사다가 간호사님께 드렸다. '너무너무 아프다'는 엄마를 뒤로 하고 병원을 나서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혹시라도 냉정한 분들을 만나서 힘들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괜찮아질지..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응급실에서 잠깐 만난 의사가 불친절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전공의라, 피곤해서 그랬겠지 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은 무너졌다.


다음날,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했다. 병원인지 집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아버지는 옆 방에 들어가셨다는 말도 했다. 여기가 요양원이라는 말도 하고,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라는 용어 대신 요양사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뭘 자꾸 사 오라고, 가져오라고 하기도 했다.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고, 인지능력도 입원 전보다 갑자기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엄마도 아버지처럼 치매 증상을 보이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병원에선 섬망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마도 마약성 진통제 때문인 것 같았다. 엄마에게 섬망 증세가 나타나던 그날 밤, 방에 앉아서 정말 펑펑 울었다. 늘 무던하고 책임감 있던 엄마가 무너져내리는 모습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판단력이 흐려진 엄마는 새벽에도 전화해서 뭐가 먹고 싶다고 했다. 다른 말 없이 그날그날 엄마가 먹고 싶다고 하는 반찬을 사다가 병원에 날랐다. 반찬도, 과일도 최대한 넉넉하게 담아갔다. 같은 병실 분들과 나눠 드시라고, 다른 의료진분들도 드리라고. 코로나 시국,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혼자서 밥도 챙겨 드시기 어려운 아버지가 집에 계셨기에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매일 병원에 가면 병실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간호조무사님이나 간호사님들이 받으러 나오시곤 했다. 엄마는 거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보호자와 잠깐 면회가 가능한 문 앞까지도 나올 수가 없었다. 침대라는 작은 세상을 벗어날 수 없던 엄마. 그 대신, 같은 병실에 거동이 가능하신 다른 환자분이 대신 나와주시기도 했다. 링거를 걸고도 대신 받으러 나와주시던 그 모습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날도 눈물이 찔끔 났다.


혼자서는 앉지도 못하던, 누워만 있던 엄마를 돌봐주신 의료진 분들.. 너무 감사하다. (사진 출처: unsplash)


엄마는 다행히 좋은 의료진을 만났다. 거의 열흘 정도는 누워서 꼼짝할 수 없었기에, 용변 처리도 타인의 손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 조금씩 나아졌다. 친절한 간호사님 한 분은 엄마와 영상 통화를 하게 도와주시기도 했다. 내가 먼저 요청한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너무 감사했다. 그분이 보여주신 따스함 덕분에, 목을 꽉 메운 갑갑함과 슬픔이 조금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엄마의 얼굴을 직접 보니 더 착잡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엄마는 그때도 약간의 섬망 증세를 보였지만 점차 안정돼 갔다. 매일,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사람이 나아가는 과정은 마치 기적 같다. 병에 질 것 같고, 고통에 무릎 꿇을 것 같고, 다 포기하고 싶은 시간을 하루하루 버티고 나면 어느 순간 환자의 몸이 승기를 잡는 게 느껴진다. 감사하게도, 엄마의 몸도 그랬다. 죽지 않는 한, 나아간다. 결국엔 이겨낸다. 섬망 증세까지 보이던 엄마는 허리 보호대를 차고 앉아있는 과정을 넘어 조금씩 걷게 되었다. "오늘은 어머님이 화장실에 걸어서 다녀오셨어요." 간호사님의 한 마디에 울컥했다. 너무 감사해서.


고백하자면, 엄마가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벌써 허리골절로 두 번째 입원이었고, 뼈가 아주 좋지 않았고, 고령의 연세를 고려하면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비록 워커와 보행기에 의지할지언정,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아갔다.


시간이 흘러 퇴원하던 날.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담아 날랐던 반찬통만 두 보따리에, 혹시라도 부족할까 싶어 많이 사다 날랐으나 남은 기저귀가 한 보따리에, 다른 짐이 또 한 보따리였다. 아직은 겨우 겨우 걸음을 떼는 엄마를 휠체어에 모시고 남편과 둘이 그 짐들을 날랐다. 그때도 속으로 찔끔, 눈물이 났다.


그리고 집.

그래도, 다시.. 집이었다.


엄마가 퇴원할 때마다 너무 소중하고 귀한 어떤 것을 돌려받는 느낌이다. 사실은 엄마가 미웠다. 무리하지 말라는 내 말을 무시하는 엄마가 정말 때로는 너무 싫었다. 그래서 아픈 것 같아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엄마는 늘 그렇게 나를 키웠고, 그렇게 무리해서 우리 집을 안전하게 지켜왔다는 걸. 그리고, 그래서. 뒤늦게 엄마의 몸이 이렇게 아우성이라는 것도.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엄마가 그랬듯 엄마를 지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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