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박새로이 공부? 노가다? 원양어선? 그렇게 시작하면 돼... 필요한 건 다 할 거야.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내 인생은 이제 시작이고.. 난! 원하는 거 다 이루면서 살 거야.
/ 이태원 클라쓰 4화 중에서
이태원 클라쓰를 본지는 꽤 오래됐는데 이 대사만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며칠 전 우연찮게 이 대사를 떠올리게 됐다.
나의 취준 시절은 길고 어두웠다. 일단 졸업이 늦어서 출발 자체가 늦었다. 졸업하자마자 엄마의 병환으로 정말 필요한 일 외에는 집 밖에 안 나오는 생활을 2년 정도 했다. 백수 기간은 그 이후에도 상당히 오래 지속됐다. 물론 계속 시험을 치긴 했지만 매번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다 서른을 앞두고 단비처럼 한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인턴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정직원을 뽑는다고 했다. 합격이 너무 절실했다. 신이 내려주신 마지막 기회 같았으니까.
결과적으로 그 회사에서 나는 철저히 모멸감을 느꼈다. 다른 인턴과 경쟁해서 최종적으로 합격자를 결정했던 만큼 매 순간이 평가의 시간이었고 나는 완전히 을이 됐다.
그렇게 A를 만나게 됐다. 사수 중 한 명이었던 A는 그 악몽 같은 기억 중에서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는 번번이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가 하면 내 특정 신체 부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동시에 언어 성희롱을 하기도 했다. 벌써 10년이 넘은 기억이지만 그때 느꼈던 수치심은 아직도 생생하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만두는 게 최선일 때가 있다. 내가 현명했다면 인턴 기간이 끝나기 전 그 회사를 그만두었어야 했다. 난 미련하게 버텼다. 참고 버티면 인정해 줄 거라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실력에 대해 자신도 있었다. 결국 경쟁을 뚫고 내가 최종 면접에 올라갔다. 최종은 그저 인사 절차에 불과하다고 들었기에 순간 합격했구나 싶었다. 진심으로 설렜고 기뻤다. 해냈다 싶었다.
그런데.. 회사에선 최종 면접에서 나만 떨어뜨렸다. 이미 경쟁을 거쳐 최종에 올라간 거였기에 예상대로 다른 인턴들은 전부 합격했다. 인사과에 같이 입사한 인턴 동기는 내 점수가 제일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내 불합격은 결정돼 있었던 것 같다고, 뭔가 불공평하고 이상하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 자체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떨어졌다는 게 중요했다. 제대로 걷어 차인 느낌이 들었다. 닫힌 문 앞에서 두드리고 두드리면 그래도 열릴 줄 알았는데 세상은 나를 비웃듯 차갑게 밀어냈다. 내 자리인 줄 알았던 신입 사원의 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력 사원으로 메꿔졌다. 동료 인턴은 고발감이라고 했지만 회사는 절차를 지켰고 나는 아무것도 주장할 힘이 없었다. 뼛속까지 열패감을 느꼈다.
지금 돌이켜서 회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이해는 한다. 숙련된 사람이 필요하고 인턴으로 뽑혔다는 신입 후보인 내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적어도 A처럼 안 그래도 평가받는 중에 위축된 인턴에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진 말았어야 했다. 쓸데없이 상처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간적인 예의를 지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이후 접하게 된 A의 소식은 더욱 나를 절망하게 했다. A는 말 그대로 업계에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마치 A가 옳았던 것처럼 느껴졌고 A로 상징되는 그 업계에서 거부당한 나의 존재는 한없이 무가치한 것처럼 느껴졌다.
3개월에 불과한 그 시간은 나를 많이 바꾸었다. 전보다 훨씬 위축됐고 나 자신과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됐다. 나는 늘 내가 부족할까 봐, 그 부족함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커트라인을 넘지 못하고 또다시 버려질까 봐 겁났다. 감사하게도 결국 지금의 회사에 합격하고 라디오 PD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생긴 구멍은 바로 메꿔지지 않았다. 끝없는 자기 증명의 지옥에 혼자 빠졌다. 전에는 남들이 다 어렵다고 말하는 일에도 겁 없이 뛰어들곤 했었는데 겁이 많아졌다. 열심히 일했고 성과가 나와도 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까 불안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A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A가 저지른 과거의 악행이 알려지고 커리어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A가 나쁜 놈이네'라고 말했다. 마음 한 구석에 약간의 통쾌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심한 헛헛함이 느껴졌다. 나는 너무 긴 시간 동안 고작 저런 사람이 내 가치를 평가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나를 대했던 방식으로 내가 나를 대우하고 살았다. 내 가능성을, 내 가치를 고작 저런 인간에게 평가받고도 부족함이 드러날까 떨었다. 심지어 내가 그때 곁에서 본 그는 능력도 없어 보였는데도. 나는 그가, 그들이 평가한 나의 가능성을 믿어버렸다. 내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가볍게 인정해 버렸다.
그 후, 내가 일을 하면서 스스로도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이 있다. 일을 잘했을 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거나 스스로 뿌듯해야 하는데 나는 '다행이다'라고 느끼는 게 고작이라는 거다. 상담을 받으면서 나는 내가 일을 하는 과정이 마치 전쟁터에서 총알을 피해 살아남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긴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러니 인정을 받아도 '다행이다, 오늘은 안 죽고 살아남았구나.' 정도로 안도하고 넘어가는 거다. 씁쓸하게도.
내가 그렇게 된 이유를 상담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 보니 핵심에는 저 인턴 시절의 기억이 있었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선택받지 못하고 버려질 거란 두려움. 그 시절, 사정상 그 합격이, 취업이 절실했던 만큼 나는 정말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며 실제로 감정적으로는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A는 분명 갑의 위치에서 을인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약하니까 함부로 굴었고 싫은 티를 냈다. 은밀하지만, 분명하게. 그때 나는 A가 함부로 내 가치를 평가하고 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 다 떠나서 모든 시험에 불합격하고 아무것도 못할 때도 나만은 나를 믿어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덜 아팠을 것이다. 나에게도 타인들에게도 더 다정하고 관대했겠지. 어쩌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나였을 거다. 내가 나를 함부로 내치지 않고 믿어줬더라면.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당해본 경험이 있다면 알 것이다. 내부에 두 목소리가 생겨나고 그 둘이 서로 싸우게 된다는 것을. '너는 무가치하며 그런 일을 당해마땅하다'는 강한 목소리와 '그럴 리 없다, 아닐 것이다. 나는 그래도 가치가 있다'는 연약한 목소리. 그 둘의 싸움이다. 그래서 폭력을 경험해 본 이들은 ‘너희가 나를 그렇게 대했어도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쓴다. 혹은 무기력하게 체념하고 살아간다. 약할 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을 때 겪은 폭력이라면 더욱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입장, 환경, 상황 속에서 타인을 평가한다. 누구도 신이 아니며 절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도 나에겐 나쁜 사람일 수 있고 모두에겐 나쁜 사람이라도 나에겐 좋은 사람일 수 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도, 모두에게 나쁜 사람도 없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척도를 두어 내 가치를 정할 필요도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아는 건 나뿐이다. 나를 진심으로 믿고 기다려주는 것도, 부족한 부분은 나아질 거라고 다독이는 것도, 부족해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도 오직 나만 할 수 있다. 타인이 나의 가치를 정하고 평가하는 건 그 사람 몫이다. 바꾸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다.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니까. 자유니까.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그 인턴 때의 기억에 작별 인사를 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때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사하며 보내줄 수는 있구나 싶어서. 그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그때까지 나는 나에게 상처와 작별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수동적으로 잊히길 바랐고 언젠가는 극복하길 바랐다. 그런데 상처와도 작별할 결심이, 보내주겠다 작심하고 하는 인사가 필요했던 거다. 그러니.. 이제는 제대로 인사하고 싶다.
내 가치를 정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뿐이야.
내 가치가 어떻든 믿고 응원해 줄 사람도 나뿐이야.
나는 용기 내서 열심히 살아볼 거야.
당신과는 다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사람들에게 위안을 건넬 거야.
내 가치는 내가 정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