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을 위한 우산>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현대 사회 관찰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소설’
“정복에는 아무 재능도 없는 이 사람들이 모두 전차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 지금 앉을자리를 정복하려고 하는 모습을 나는 구경한다. 나는 밖에 그대로 서 있고, 전차는 다시 출발한다.” (p.29)
전철 속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한 남자를 남겨둔 채 그를 둘러싼 도시는 바쁘게 흘러가고 있다.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어딘가로 향하는 넥스트의 ‘도시인’(1992년에 발매된 넥스트 1집 타이틀 곡)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대한민국의 도시 풍경이 아니다. 빌헬름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2021, 문학동네)에서 주인공 ‘나’가 매일 접하는 일상이다. 온종일 느릿하게 걸으며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한 남자의 하루는 바쁜 현대 사회에서 무척 이질적으로 보인다. 한 인간의 고유한 인격이나 개성보다 겉으로 드러난 상품적 가치에 의해 평가되는 사회에서 그의 느린 일상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까? 이 작품은 삶과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는 한 남자의 시선으로 섬세한 20세기말 독일 사회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편 소설이다.
1943년 독일 만하임에서 태어난 빌헬름 게나치노는 독일 현대문학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철학,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언론인과 출판 편집인으로 일했다. 게나치노는 1965년 <라슬린 가>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그는 편집자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삼부작 소설 <압샤펠>, <불안의 근절>, <거짓된 세월>을 내놓으며 명성을 얻었다. 게나치노는 1989년 <얼룩, 재킷, 방, 고통>을 발표하며 브레멘 시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존재들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들 속에서 다양하게 형상화했다. 이런 작품 성향으로 게나치노는 ‘하찮을 정도로 작은 사물들의 변호사’(2003년 4월 26일 자 독일 일간이 <벨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며 현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주로 썼다. 그중 <이날을 위한 우산>은 2001년 발표된 단편 소설로, 독일 소시민의 시선으로 틀에 받힌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삶의 소소함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는 이 소설로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를 비롯해 많은 독일 비평가에게서 “경이롭고 철학적인 책” “매혹적인 소설, 가볍고 명료하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마흔여섯 살 주인공은 한 번도 탄탄하고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구두 테스터 일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급 수제화를 신고 온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성능을 살피고 평가서를 작성해 구두 한 켤레당 소정의 돈을 받는다. 주인공은 새 구두를 신고 그저 이리저리 도심을 걸어 다니며 거리의 사람들과 갖가지 사물, 일상의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구두 테스터 일에 익숙해지려는 무렵, 그는 어느 날 자신을 이해해 주던 여자 친구 ‘리지’와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고 유일하게 지속해서 잘해왔던 구두 테스터 직업을 잃을 위기에 직면한다. 또한 이따금 육체관계를 가지던 미용사 ‘마르코트’가 자신의 옛 친구 ‘힘멜스바흐’와 관계를 목격하고 충격에 휩싸이는데….
<이날을 위한 우산>의 주인공은 자신을 “단지 교육만 많이 받은 (...) 아웃사이더”라고 소개한다. 그는 “학식과 지위를 삶 속에서 서로 융화”시키지 못해 사회에 살 적응하지 못하는 “현대판 거지에 불과하다”(p.84)라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다. 주인공의 생활은 부모님 표현처럼,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이자 ‘보잘것없고 모자란 인간’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고등교육에 비해 변변한 직업이 없어 헤어진 여자 친구의 연금으로 생활했고, 새 구두를 테스트한다는 명목으로 온종일 거리를 배회하며 명상에 젖어 지낸다. 지나치게 꼼꼼하고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주인공이 결과물을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무기력해 보이는 주인공의 일상은 옛 친구 수잔네의 모임에서 ‘기억술과 체험술 연구소’를 운영한다고 무심코 내뱉으며 반전을 맞이한다. 분명 거짓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평소 화자는 독일의 거리와 사회, 구성원들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철학적인 명상을 즐긴 탓에 사회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마련되어 있었다. 화자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무기력한 이유를 “우리가 만들지 않은 질서 체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p.114)는 점에서 찾는다. 그는 사람들이 “그러한 질서 체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것들은 우리를 소외”시켜 “그러한 질서 체계의 죄를 우리가 떠맡게 된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것들이 우리를 소외”(p.115)시킨다고 언급한다. 남다르고 지적인 그의 이런 견해는 수잔네 동행인들의 호감을 끈다.
이 날을 계기로 주인공은 ‘기억술과 체험술 연구소’ 일과 관련된 상담까지 맡게 된다.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다른 일을 하며 그는 “외부세계가 마침내 내 내면의 텍스트들에 맞아떨어지기만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고! 이제 나 자신의 삶의 눈먼 승객으로 사는 짓은 그만둘 거야!(p.183)”라고 음울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작가는 수잔네 모임을 계기로 주인공이 원하는 일을 찾고 무기력한 삶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지만, 지금까지 읽어온 화자의 느린 감정선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런 전개가 뜬금없어 느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결말에서 임대주택 발코니의 소년이 이불로 동굴을 만드는 장면을 보며 주인공이 삶에 대한 희망을 갑작스럽게 느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게나치노가 쌓아온 우울하고 감수성 예민한 주인공의 철학적 서사가 강력했기에, 어쩌면 이 인물만큼은 현대 사회의 방랑자로 그대로 남아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든다.
<이날을 위한 우산>은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바쁜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20세기 독일 소시민의 삶을 섬세하면서도 철학적인 명상으로 채운 단편 소설이다. 작가는 소위 ‘루저’로 보이는 한 남자의 남다른 시선으로 사회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질만한 삶의 고민과 욕망을 세심하게 투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구체적인 사건과 이야기 전개를 원하는 이들이나 관념적인 독일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가독성이 있는 산문으로 우리 시대를 사는 평범한 개개인의 일상을 ‘나노 단위’로 표현하는 소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의 말처럼, 이 소설은 “자신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일 뿐이고 자신의 육체는 이런 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p.116-117)을 위해 작은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작품이다. 현대 사회를 사는 ‘하찮을 정도로 작은 인간군상들의 변호사’, 빌헬름 게나치노의 소설, <이날을 위한 우산>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