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운하를 만든 남자
8. 운하를 만든 남자- 수향에서
쑤저우성 북서쪽의 호구가 합려의 영혼이 서려 있는 유적지라면, 쑤저우의 남서쪽에 있는 영암산灵岩山은 부차의 설화가 모여있는 곳이다. 지금은 지하철로 쑤저우 시내에서 영암산 앞 무두까지 갈 수 있지만 내가 갔던 때는 지하철이 없었을 때여서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영암산은 태호 주변에 있는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높지 않아 하루 나들이로 찾기에 적당한 곳이다.
산기슭엔 합려가 만들기 시작하여 부차가 완성했다는 군사시설인 고소대姑蘇臺가 남아 있기는 한데 관광객에게 보이기 위해 새로운 시설을 설치한 것 같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관리 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근데 나에게는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인 등산을 위해 산입구에 들어서면 빽빽이 숲을 채운 굵은 대나무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대나무 숲을 지나면 점차 활엽수가 더 눈에 띈다. 산 중턱, 산 길에서 안내 표지판을 따라 얼마 안 가면 관음동도있다. 부차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월나라에 쳐들어가 월왕 구천과 범려를 사로 잡아서 오나라 땅으로 끌고와서 영암산 관음동에 가둬놨다고 한다. 영암산에서 가장 볼만한 문화재였다. 그리고 노란 벽이 눈에 띄는 영암사도 있는데 영암사가 있는 곳은 부차가 지었다는 별궁別宮인 관왜궁馆娃宮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부차는 서시를 위해 산속에 관왜궁을 짓고, 궁 주위로 장랑을 만들었는데 장랑 바닥에 항아리를 묻고 나무와 양탄자를 깔아 서시가 걸을 때마다 땅속의 항아리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물론 장랑도 관왜궁도 남아있지 않다.
낮은 산이라지만 등산이란 언제나 가쁜 숨을 참고 오르는 구간이 있다. 그래도 얼마 안 있어서 정상에 서면 사방 탁트인 조망이 멋지다. 평지에 들어선 쑤저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반대편으로 태호도 보인다.
서시가 부차를 졸라서 영암산 아래 쪽에 만든 운하가 있는데 지엔징허箭泾河라고 한다. 운하가 만들어진 후에 월나라 구천의 병사들이 지엔징허를 통해 오의 땅을 침범해서 오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부차에 대한 원망일까. 부차가 영암산에 올라 태호를 내려다보던 활을 들어 화살을 쏘면 화살이 날아간 방향으로 병사들이 운하를 만들었다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지엔징허의 ‘지엔’의 뜻은 화살이고 ‘징’은 냇물이다.
등산로 아래로 내려와 길 건너편이 강남 수향, 무두木渎 고마을의 입구이다. 우리 말로 읽으면 ‘목독’이라는 이름은 부차가 관왜궁을 짓기 위해 대량의 나무를 운반해 와서 삼 년이나 쌓아 둔 일에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영암산과 주변은 모두 부차와 관련된 역사적 장소이다.
수년이 지난 후 나는 우연히 재미있는 기사를 글을 읽었다. 사람들은 지금의 쑤저우성이 바로 오자서가 설계하고 합려가 만든 오나라 성이라고 생각해왔으나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낮고 습한 곳을 피하고 구릉을 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읍 설계의 기본인데, 지금의 쑤저우성은 너무 평평한 평지 위에 세워져 있어서 고대의 도성 터로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쑤저우시 서남쪽, 영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성터가 바로 오나라의 도성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2010년 영암산 일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큰 성터를 발견했다. 목독춘추고성이다. 이 성은 옛문서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데 바로 태호로 들어가는 물길을 끼고 영암산의 줄기를 배후에 두고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에 위치라고 한다. 이 성의 규모는 20제곱킬로미터가 넘어 기록에 등장하는 것보다 더 크다. 과연 이성은 춘추시대 오나라의 것 그대로인지, 아니면 그것을 기반으로 전국시대 초나라가 증축한 것인지는 아직 연구중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차의 무리한 야심이 오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고 볼 수있다. 부차의 허영심과 야심은 건설사업을 통해서도 제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부차는 서시와 애정행각을 벌이면서 태호太湖 옆인 영암산에 별궁을 짓고 운하를 건설했다. 하지만 부차의 무리한 야심이 만들어 낸 중에 긍정적인 결과물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수나라의 양제가 남방의 식량과 비단을 북방의 수도에 쉽게 운송하기 항주에서 낙양까지 경항대운하 건설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세세히 살펴보면 운하 건설의 시작은 부차로 볼 수 있다. 물론 운하를 누가 먼저 파기 시작했느냐는 필요 없는 질문일 수 있다. 운하는 누군가 천재적인 머리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조건이 충족될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이용하고 개조해온 것은 인간의 숙명이었다.
그래도 그 시초를 따져 보자면 부차의 노고가 분명 있다. 춘추좌전은 부차의 오나라가 한邗(지금의 양주)에 성을 쌓고, 도랑을 파서 장강과 회하淮河를 소통시켰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회하와 장강 사이는 지대가 낮고 호수가 그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지역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가 한邗이어서, 한邗만 뚫으면 장강과 회하를 연결하여 장거리 운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오나라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월 사람들은 훨씬 이전부터 장강 남쪽에서 운하를 계속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B.C 486년경 부차는 중원 국가들, 특히 제나라를 침략해서 북방 중원을 차지하려는 야욕으로 장강과 회하 사이에 운하, 한구邗溝를 팠다. 또 B.C 360 년, 위魏나라 혜왕이 황하와 회하 사이에 홍구鴻溝를 축조했다. 부차가 구상한 운하의 개념은 수양제의 대운하 개념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되었다. 수나라는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장안성 건설과 대운하 건설이라는 거대한 토목 사업에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수양제 이후에도 후대인들은 계속 운하를 발전시켜 황하부터 항주 쪽의 전단강钱塘江을 연결하는 오늘날의 운하를 만들었다. 북방으로 진출하려던 오나라의 야심이 중국에 남북 대운하를 셈이 되었다. 그러니까 쑤저우에서 회하까지는 오나라 부차가 팠고, 회하에서 황하까지는 수 문제가 만들었다. 그리고 황하에서 베이징까지는 원나라의 몽골이 운하 건설에 참여했다고 한다. 오吳의 깃발 아래엔 오만하고 속 좁았으며 여색에 빠져 향락을 즐겼으나 운하를 처음 판 부차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