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칼의 전설(2)
6. 칼의 전설 (2)
춘추시기가 지나자 오월의 청동검 장인들도, 그들의 기술도 사라지고, 백성들 집도 철기 하나쯤은 소유하는 시대가 왔다. 이후 청동검 장인들과 검들은 전설이 되어 무협 속에서 회자되었다.
“과거 오나라에는 간장과 막야라는 부부가 검을 잘 버렸으며, 우리 월나라에는 구야자라는 뛰어난 장인이 있어서 검을 벼리는 기술이 간장과 막야 부부에 뒤처짐이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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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께 아룁니다. 검을 만드는 철은 쉬이 구할 수 있지만, 질이 좋은 동은 월나라에만 있고 질이 좋은 주석은 오나라에만 있습니다.”
범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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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오자서가 군사를 파견하여 밤낮으로 석산錫山을 지키게 하여 백성들이 함부로 주석을 파내지 못하게 하였소. 오늘날 오자서가 이미 죽고 없으니 석산을 엄히 지키지 않을 듯 하오. 고가를 주고 매입한다면 양질의 주석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오.”
- 김용의 「월녀검」 중 일부
무협소설가, 김용은 비슷한 시기 중원과 달리 왜 오월 지역에서만 우수한 청동검이 제작되었던가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제시한다. 수쩌우 북쪽 태호 주변에 있는 우시無錫는 고대엔 주석의 산지였다. 주석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주석과 구리를 섞는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주석은 아무 곳에서나 나는 광물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문명 발달단계에서 청동기 시기가 없거나 매우 미약한 지역이 있는 이유도 주석 산지가 전 세계적으로 고루 퍼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녀검’에서 보면 영리했던 오자서는 주석이 나는 석산錫山을 병사들을 시켜 지키게 했던 것 같다. 우시無錫라는 도시 이름이 원래 그 지역이 노천 주석 산지였으나 이미 고대시대에 주석을 다 채굴해서 주석이 없어졌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물론 주석산지가 가까이 있었다는 한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환경 요인으로 북마남선北馬南船을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중원은 주나라 이후 전쟁에서 마차가 주된 이동 수단이자 병장기였다. 반면 장강 이남은 배를 타고 이동했고 배에서 내려 백병전으로 칼을 들고 격투를 벌이다 보니 검제련 술이 발달했다는 설명이다. 나는 마차와 배라는 차이가 중원과 오월 사이의 청동 제련술 차이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에 그리 동의를 하는 편은 아니다.
어쨌든 청동검에 대해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전설속의 명검이 실제로 발견되었다는 데에 있다. 월나라 구천의 검이 1965년 호북성湖北省에서 발굴되었는데 이천 여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녹슬지 않은 아름다운 외관에 영롱한 빛을 뿜고 있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또 1983년에는 부차모夫差矛와 과戈도 호북성에서 출토되었다. 오늘날 오왕 합려와 부차, 월왕 구천의 검과 무기류는 꾸준히 발견되는데, 지금까지 나온 총 숫자는 수십 자루 이상 된다고 한다. 주로 전국시대 초나라의 영토에 출토되었는데, 진시황이나 손권이 합려의 검들을 찾아 합려의 무덤에 들렸듯이 초나라 사람들이 월의 땅을 차지하자 오월의 청동검을 찾아나섰음을 알 수 있다.
오왕과 월왕의 검들은 속속 세상에 나왔다. 고분 발굴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유명 소장가가 소장품으로 갖고 있던 것을 박물관이 구입해서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수쩌우박물관에 있는 부차검夫差劒이 그런 경우이다.
쑤저우박물관蘇州博物館은 어린 시절을 강남의 원림 집에서 자랐고, 성년이 되어 유명한 건축가가 된 레오밍 페이가 설계했다. 건물도 특색 있고, 눈여겨볼 만한 유물도 많다. 그리고 소주박물관의 옆은 태평천국의 충왕부 건물로 이어지고, 충왕부의 뒤쪽엔 졸정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