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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Oct 05. 2024

슬로우보우트 투 차이나-7. 인생은 백비처럼

7. 인생은 백비처럼

7. 인생은 백비伯嚭처럼    

  

乌栖曲(오서곡) - 李白(이백)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 때, 오왕의 궁안은 서시에게 취하였다.

오나라 노래와 초나라의 춤으로 환락이 끝나지 않았고, 청산은 반쪽 해를 머금으려 한다.

물시계에서는 떨어지는 물이 많아지고, 일어나 추월이 강의 물결에 빠지는 것을 본다.

동녘 태양이 점점 높아지는데 못다한 즐거움을 어이 하나!     


  이백은 이 시에서 부차와 서시에 빗대어 당현종과 양귀비에 대해 탄식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합려闔閭의 성품을 잔인하고 여자와 재물을 좋아했다고 평했다. 그의 그런 성정은 권력을 잡은 후 더 뚜렷이 나타났다고 한다. 합려는 기원전 514년 자신의 사촌인 오왕 료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료의 아들까지도 자객을 보내 죽였다. 그러나 오자서같은 인재를 품을 정도의 도량은 갖추었다. 반면 후세 사람들은 합려의 아들인 부차夫差에 대해서 허영심 많고 속이 좁았다고 평했다. 전쟁과 토목공사, 특히 운하를 만드는 공사를 밀어붙여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다. 그가 벌였던 공사들 중엔 미녀, 서시西施와 즐기기 위해 벌인 공사도 여럿 있었다. 

  내친 김에 인물평을 더 해 보자면 부차와 함께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성어를 완성한 월왕 구천勾踐은 굴욕의 세월을 견딘 다음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부차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기를 보여줬다. 그런데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 지에 대해선 범려范蠡의 말을 참조하면 된다. 범려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한 후 공신이 되었지만 월나라를 떠나 북쪽의 제나라로 갔다. 그리고 여전히 월에서 대부 노릇을 하는 문종에게 서찰을 보냈다. 범려에게 문종은 젊은 시절 자신을 처음 일을 발탁해준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창고에 넣어 두게 되고, 날랜 토끼를 잡게 되면 사냥개는 삶아질 뿐입니다. 월왕은 목은 불필요하게 길고 입은 새 부리처럼 가벼워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부귀를 함께 누릴 만한 사람은 되지 못하니, 속히 벗어나십시오.”     

  인간이란 사회적 위치가 성품마저 만드는 것일까? 왕이었던 합려, 부차, 구천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 


  다시 오나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합려 시절엔 오나라가 자신의 서쪽이자 장강 중류에 있는 강대국, 초나라를 공격하여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아들 부차 시절엔 부차가 구천의 월나라를 굴복시켰고, 회하淮河 북쪽의 제나라까지 쳐들어갔다. 그때가 오나라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그 시절이 밤하늘의 불꽃만큼이나 짧았다. 합려나 부차가 전쟁을 위해 쑤저우성을 비우면 남쪽의 월이 쳐들어와서 오나라의 발뒤꿈치를 깨물었다. 그러니 오와 월은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오왕 합려 19년(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 공격에 나섰다가 발에 창상을 입고 아들, 부차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파상풍으로 죽었다. 이후 부차가 왕위에 오르니 ‘와신’臥薪하면서 월나라 구천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를 대장으로, 백비伯嚭를 부장으로 두고 월나라와 전쟁을 벌이는데. 이 싸움에서 월왕 구천은 병사를 거의 잃고 회계산會稽山에 쫓겨 들어가 적군에게 포위당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월왕 구천은 대부 문종(文種)을 보내 오나라의 백비를 만나게 하고 그를 통해서 오왕 부차에게 화친을 요청하였다. 여기서 월의 문종이나 범려의 협상력이 발휘된다. 문종과 범려는 아버지 시대의 공신인 오자서를 껄끄러워하는 부차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문종과 범려는 백비에게 뇌물을 바쳐 구천이 죽임을 당하는 것만은 막아냈다. 오자서가 지금 월나라를 멸해야 후환이 없어진다고 만류하였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무시했다. 그렇게 해서 구천과 범려는 오나라의 노비가 되어 오나라로 끌려가서 처참한 굴욕을 당한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오의 승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월의 ‘외교적 승리’가 된다.


<와신상담> 드라마 중- 오나라에 끌려가는 월왕 구천


  오자서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백비伯嚭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고 오자서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한편 범려와 구천의 아부에 방심한 부차는 구천과 범려를 월나라로 돌아가게 한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오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자신의 아들을 제나라에 두고 왔다. 그러런데 간교하고 비정한 백비는 그것을 꼬투리 잡아서 부차 앞에서 오자서를 모함했다. 기원전 485년,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하고 결국 그의 시체를 장강에 던져버렸다. 결국 오자서가 죽은 지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상담’嘗膽의 시간 속에서 복수의 칼을 갈던 구천이 오나라을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킨다. 부차의 자결로 춘추시기, 오나라의 역사는 끝이 났다.       


  오늘날 쑤저우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개인 원림의 대표인 졸정원拙政园과 춘추 오의 전성기룰 이끈 합려의 무덤, 호구虎丘를 꼽을 수 있다. 호구는 쑤저우성 바깥에서 이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쑤저우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나에게 춘추오월을 대표하는 인물은 합려나 부차, 구천이 아니라 오자서이다. 그리고 ‘와신상담’ 시기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앞에 언급한 인물 외에 범려나 백비도 중요한 인물이다.  


  오자서는 성공한 인간이면서 비극적 인생을 산 사람이다. 오자서는 자객을 시켜 왕을 암살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서 중원의 현자들로부터 안 좋은 말을 들었으며, 원한에 사무친 과거 때문에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가혹하게 매질해서 역시 여러 사람으로부터 예에 어긋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오점에도 불구하고 오자서는 고난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오자서의 강렬한 일생 이야기를 듣고 나면 후세 사람들은 의지와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말년의 비극은 피해가지 못했다. 젊은 시절, 초나라에서 아버지와 형이 인질로 잡혀있는 사이 오자서는 중원으로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만 했고, 그 사이 형과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정상에 있던 그가 합려가 죽고 부차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위협을 느껴야 했다. 결국 오자서는 아들은 제나라에 맡겨두고 본인은 죽음을 당한다. 마치 오디푸스 왕이 신탁 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신탁대로 되어버리는 비극적 운명을 연상시킨다. 불운을 겪고 역사가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사마천은 오자서를 각별하게 생각해서 열전을 쓰면서 ‘오자서 열전’을 따로 쓰기도 했다. 쑤저우 사람들도 오자서를 잊지 않았다. 사당은 물론 쑤저우성을 감싸고 도는 물길에 있는 부두 가에 동상을 만들어 두었다. 


  범인凡人의 시각에서 범려에 대해서 말하자면 흔하지 않은 재능과 운을 겸비한 사람이다. 범려라고 마냥 편안하게만 살지는 않았다. 구천이 오나라의 노비가 되어 끌려갈 때 같이 노비가 되어 구천과 동행한 사람이 범려였다. 범려는 오월 전쟁의 치열한 심리전에서 협상가이자 전략가로써 활약을 했다. 백비에게 뇌물을 보냈고, 부차에게는 여자들을 바쳤다. 부차에게 보낸 여자 중에 부차가 제일 빠져들었던 여자가 서시였다. 그런데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정치가로서 성공의 정점에서 그는 월나라를 빠져나와 지금의 산동, 제나라로 갔다. 

  여기부터는 민간 설화와 전설의 영역으로 넘어가는데 먼저 범려가 서시와 함께 북쪽 제나라로 도망가서 장사를 해서 거부가 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서시 없이 제나라에서 거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떤 설을 택하든 범려와 서시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것은 형체를 볼 수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꽃향기처럼 당대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후대 사람들은 범려와 서시의 사랑을 극으로 만들었다.

  범려는 장사로 큰 돈을 번 후에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눠주었고 도교와 의학에 심취해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완벽한 인생을 살았고 후세에 범려는 중국에서 상업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천 년 중국 역사에서 더 운 좋은 사람을 나는 본 일이 없다.      


오자서의 채찍질


  춘추오월 시기에 활약한 사람들 중에 현대를 사는 나에게 의미있는 사람은 백비이다. 오자서와 백비는 같은 일은 아니지만 모두 초나라 사람으로 비무기라는 간악한 대신 때문에 일가족이 몰살을 당하는 위험 속에서 망명을 했다. 오자서가 먼저 초나라를 빠져나와 오나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수년 후에 백비가 도망쳐서 오나라로 들어오려는데 인상이 안 좋아서 주위에서 백비를 받아들이지 말자고 했다. 그때 오자서는 ‘백비와 내가 같은 원한은 지니고 있다. 같은 병에 걸리면 서로 불쌍히 여기고 같이 염려하고 서로 구해주려는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백비의 오나라 망명을 도왔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백비는 오나라에 들어온 후 쑤저우 성의 건설에 참여했다. 일종의 기술관료였던 것 같다. 오나라가 멸망한 후 월왕 구천이 백비의 기술관료로서 능력을 높이 사서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관직을 주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월왕 구천이 오의 대신인 백비를 처형했다는 설도 있다. 모두 소문일 뿐 명확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확실한 기록이 없다는 말을 나는 백비가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다 죽었다라고 해석했다. 

  범려가 사업가 재능으로 일한 정치가였다면, 백비는 기술관료로 일한 정치가였다. 역사가 남긴 기록 속의 백비는 오나라의 존립과 발전이라는 장기적인 대의보다는 단기적으로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부차가 듣고 싶은 말을 했고 부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협조했다. 오자서나 범려와 같은 영웅이 아니라면, 조직 속에서 일하는 현대인은 백비처럼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야 화를 면하고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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