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늦봄의 쑤저우
9. 늦봄의 쑤저우
늦봄 강남 수향은 좋았다. 나는 영암산 등산을 끝낸 피곤을 잊고, 영암산 앞에 있는 무두木渎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물길 옆엔 수양버들과 이름 모르는 나무들의 생기가 넘쳐흘렀다. 걷고 있으니 은은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강남의 꽃향기라면 계화향이 매혹적이긴 한데 계화는 가을 꽃이다. 결국 계화향은 차나 떡으로 즐기게 된다. 그날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전통 의상(汉服)을 빌려주는 가게에서 옷을 빌려 입고 나온 여성 두세 명이 아치 교각 위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었다. 나까지 무협지의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굳이 춘추시대 오왕 부차를 말하지 않아도, 길을 걷고 있노라면 마을의 유구한 역사가 그냥 바람결로도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무木渎 두 옛마을엔 엄가화원嚴家花園, 화음산방虹飮山房 등과 같은 원림이 있었다. 화음산방만 둘러보았다. 화음산방은 명나라 시기부터 조성된 정원인데, 건륭제가 강남 순방시 쑤저우에 올 때 무려 여섯 차례나 머물러서 황제의 ‘민간 행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희대가 생각보다 커서 인상적이었으나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유료 원림이나 유명 수향마을도 좋지만 입장료를 받지 않는 운하 거리를 그냥 걷는 것이 나에겐 맞았다.
늦은 봄, 강남에선 대바구니에 담아온 연밥이나 양메이杨梅를 파는 행상을 만날 수 있다. 거리에서 연밥을 사서 먹으면서 걸었다. 여러 개의 작은 게를 튀겨 꼬치에 끼워 파는 행상도 있었다. 태호에서 갖고 온 작은 게들일까? 물어보지는 못했다. 게라면 쑤저우 동북쪽의 양청호阳澄湖의 따자시에大闸蟹(민물 털게)가 원조로 유명한데, 주변지역이나 태호에서도 양식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따자시에’ 코스는 상하이의 대표 요리이고, 쑤저우 시내 음식점에선 게살을 밥에 비벼먹거나, 게알을 소로 넣은 바오즈蟹黄汤包를 종종 볼 수 있다.
태호에서 나는 것들 중에, 백어白鱼, 은어银鱼, 백하白虾도 유명하다. 쑤저우 식당 메뉴판에 위의 글자가 있다면 주문해서 먹어볼 만하다. 송슈구이위松鼠桂魚가 쑤저우를 대표하는 음식이기는 하지만 쏘가리(쏘가리가 아닌 다른 생선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음)를 튀겨서 새콤달콤한 쏘스를 얹는 방식이어서 어쩌면 그리 특별한 맛이 아닐 수도 있다. 반면 백어, 은어, 백하를 먹는 방식은 기존의 ‘튀겨서 새콤달콤한 쏘스’를 얹는 방식이 아니라서 오히려 쑤저우만의 담백한 요리 맛을 즐길 수 있다. 새우와 백어白鱼는 부드럽게 쪄서 먹고 은어는 계란부침 속에 넣어 먹는다. 강한 향신료 보다는 재료의 맛을 살리는 담백함은 쑤저우 요리의 대표적인 특색이다. 쑤저우 면 역시 가는 면발에 담백한 국물이 특징이다. 면의 표면을 넓게 늘려서 쫄깃한 식감을 증가시키고 진한 양념에 비벼먹는 다른 지방의 면요리와 구별되는 면이 있다.
내가 중국에서 처음 먹어본 물고기 요리는 시뻘건 기름 위에 물고기 편이 떠다니는 쉐이주위水煮鱼였다. 중국에서 초반에 물고기머리탕魚頭湯을 보고 중국에서는 생선을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음식점에서 쉐이주위가 맛있어 보여서 먹어봤었다. 쉐이주위는 기름기 많은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호감이 가는 모양은 아니다. 그런데 기름국을 모두 마시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음식은 기름을 통해서 맛과 식감을 높이고 어떤 음식은 보존 기간을 늘린다. 쉐이주위 같은 생선 요리도 좋고 쑤저우의 생선들처럼 담백한 것도 좋다.
무두의 운하길은 비교적 단조로운 일자 형이었는데, 나는 주변 옛날 집들이 늘어선 마을 길까지 걷고 또 걸었다. 대나무나 다른 목재로 만든 셔터를 내린 가게들을 지나 좁은 골목길, 농 안으로 들어가 보니 빨래를 내건 집들이 눈에 띄었다. 그 골목 끝에 있는 집에선 몇 사람이 모여 마작을 했다. 마작 테이블 옆에 놓여 있는 사이드 테이블 위엔 찻잔과 비파가 놓여있었다. 비파는 색깔이나 크기가 살구와 비슷한데 맛은 더 상큼한 과일로, 우리나라 남해안에도 있는 아열대 종이다.
늦은 봄, 중국의 과일 가게엔 비파가 있고 쑤저우의 거리엔 양메이 행상이 있다. 양메이는 그냥 먹기에는 너무 시어서 양메이탕이나 양메이주를 만들어 먹는다. 양메이탕과 비슷한데 더 대중적인 음료로 솬메이탕酸梅汤이 있다. 솬메이탕은 제품으로도 출시되어 있어서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 제품으로 나온 음료는 달기도 달지만 뒤 끝에 단맛이 길게 남아 텁텁하다. 쑤저우의 일반 음식점에서 직접 끓인 양메이탕을 한 번 먹어봤다. 매실차랑 유사한 맛이었다. 나는 베이징에서 직접 끓인 솬메이탕을 찾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그때 이미 큰 도시에서는 빙탕과 산사 등을 넣어서 직접 끓인 산메이탕은 자취를 감춘 때였을까? 해가 지도록 무두 옛마을 근처를 헤매다가 택시를 타고 쑤저우 시내로 돌아왔다.
두 해 후 여름, 나는 란조우 시내에 잠깐 있었다. 란조우는 황하 강변에 있는 도시인데 그 지역은 기후가 건조한 황토지대였다. 그리고 위구르인들이 많이 보여서 이국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더운 날씨에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길가에서 집에서 만든 음료를 파는 행상과 마주했다. 살구껍질차杏皮茶. 화선지처럼 보이는 종이에 붓으로 쓴 ‘杏皮茶’라고 쓴 글씨가 정겨웠다. 한 잔 사들고 다시 란조우 시내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살구를 직접 갈아 넣고 파는 주스가 아니라 말린 살구를 보리차 끓이듯 끓여낸 차라서 좋았다.
나의 기억은 수십년 전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경기도 어느 초등학교 앞에 있었던 냉차 리어커였다. 냉차 옆엔 아이스크림 통도 있었다. 그 리어커 주인은 외팔이였는데 팔 한쪽만으로 스쿠프를 이용하여 고깔모양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능숙하게 담아 퍼줘서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났다. 아이스크림 행상은 많이 봤지만 그 이후 냉차를 봤던 기억이 없다. 냉차처럼 가격이 싼 음료를 팔면 수지타산에 안 맞아서 없어진 것일까?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애잔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