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산당가山塘街 그리고 낙천樂天
11. 산당가山塘街 그리고 낙천樂天
쑤저우성 북서쪽 창문阊门에서 시작되는 산당가는 쑤저우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거리이다. 산당가山塘街는 쑤저우성의 서북 쪽에 있는 창문阊门에서 서북쪽으로 7리 길이로 뻗은 길이면서, 그 길의 끝은 합려의 무덤인 호구虎丘이다. 합려가 죽은 후, 아들 부차가3000자루의 명검을 함께 묻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진시황과 항우,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까지 천하의 호걸들이 합려의 검을 찾겠다고 호구에 와서 발굴하였지만 끝내 못 찾았다는 사실도 전설이 되어 내려온다.
산당가가 시작되는 창문阊门 옆은 여러 물길이 모였다가 갈라지는 혈穴과 같은 곳이다. 소주성을 둘러싼 외운하 물길은 그 물길대로 이어가고, 서북 방향과 서쪽 방향으로 무려 두 개의 새로운 물길이 트인다. 서북 방향의 물길이 산당운하 물길이고, 서쪽으로 난 물길은 한산사寒山寺로 이어진다. 한산사로 이어진 물길은 그대로 경항대운하의 물길로 곧바로 합쳐진다. 항주에서 올라온 대운하 물길은 태호와 쑤저우 사이를 지나 진강镇江과 양주扬州로 이어진다.
산당가는 창문 부근의 백거이白居易 기념관이 있는 시작 부분부터 약 사 백 미터 안에 음식점과 찻집, 기념품 가게들이 모여있다. 특히 산당가 운하에서 안쪽에 있는 산당노가(山塘老街 산탕라오지에)에는 새롭게 유행하는 음식점부터 쑤저우의 전통 음식을 파는 유서 깊은 가게까지 다양하게 있다. 또 옛 시절에 깔아놓은 석판이 아직도 남아있는 길이기도 하다. 옛 소주의 기억을 소환하기 가장 좋은 거리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산당가는 평강로, 관전가와 함께 소주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번잡한 관광거리이다.
산당가를 만든 이는 당나라 시인이자 행정가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이다. 백거이는 825년, 쑤저우자사苏州刺史로 부임하여 호구와 쑤저우성을 연결하는 길이 대략 3,600 미터에 이르는 산당하山塘河 운하를 뚫었다. 성에서 주변 지역으로 가는 운하길이 늘어나자 쑤저우의 백성들은 감격하여, 백거이가 다른 지방으로 이임한 후에, 산당가를 백공제白公堤라 불렀고, 백거이를 기리는 사당, 백공사白公祠도 설립했다. 백거이는 쑤저우에 부인하기 전에 항주자사로 있을 때에도 서호西湖의 치수 사업에 참여하여 제방을 쌓았었다. 서호에 가면 서호를 반으로 나누는 소동파가 쌓은 소제蘇堤와 함께 백제百提 위를 거닐면서 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보통 사람에겐 평생 관리로 일하면서 백성을 위해 운하를 건설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백거이는 수많은 시를 지어 이백(701년-762년), 두보(712년-770년)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놀라운 인생이었다. 중국 문학사상 최대의 천재인 이백을 보자. 역사가 인정하는 천재이긴 하나, 워낙 시심이 강하다 보니 관직 생활을 잠시 한 후 강호를 주유周遊하며 살았다. 말년에 도교 심취하여 산에 들어가 취중 도사로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다른 시인인 두보는 이백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으나 운이 안 좋아 관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고단한 일생을 보냈다. 특히 말년에는 전란에 쫓기며 신산스럽게 살았다. 사후에 얻은 시성詩聖이라는 명예도 좋지만, 생전에 가난에 시달렸으니 범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좋은 인생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반면 백거이는 모범적이고 운 좋은 일생을 보냈다. 북송 때의 천재 소동파(1037-1101)도 너무 잘난 나머지 중앙 관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평생을 유배지를 떠돌았다. 그것에 비하면 백거이는 가끔 옳은 소리를 해서 삼 년 정도 짧은 기간 동안 한직에 머무는 불운을 당하는 정도였다. 그는 다시 조종에 등용되어 관리로 살수 있었다. 그리고 은퇴한 후 낙양에 집을 마련하여 문학에 정진하면서 인생 마무리를 했다. 그의 문장에 대한 태도에 그의 문학관이 집약되어 있다. 이백은 시를 쓸 때 한 잔 술에 막힘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갔다고 하며, 두보는 열 번의 손질을 했다고 한다. 반면 백거이는 시를 탈고할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파에게 먼저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는 노파가 알아들었는지를 묻고, 만약 모르겠다고 하면 그녀가 뜻을 알 때까지 몇 번이고 고친 후에야 비로소 붓을 놓았다고 한다.
문장에 대한 태도는 그의 문학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백거이는 시인이면서도 사회운동가의 태도를 취했는데, 그는 문학은 통속적이면서도 사회상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진취적인 문학관을 가졌었다. 그가 산 시대인 8세기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문학관이었다. 백거이는 문장은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것에 맞춰 써야 하며, 문장은 문장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학관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장한가長恨歌같은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장한가는 양귀비와 당현종의 애정을 그린 장편 서사시이다.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청淸시기 희곡, 장생전長生殿으로 되살아나, 오늘날에도 경극의 주요 레퍼토리로 남아있다. 조선을 포함하여 후대의 유가 선비들 중엔 백거이의 장한가를 점잖치 못한 창작이라고 흠을 잡는 이도 있었다.
백거이의 문학관에 호감이 생겨 백거이의 대표작을 찾아봤었다. 그의 대표작인 비파행은 내가 어린 시절에 많이 봤던 통속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정감이 짙었다. 잘나가던 시절을 뒤로 한 채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는 기녀와 조종의 미움을 사서 귀향을 온 사내가 배 위에서 만난다. 기녀는 모처럼 비파를 뜯고 두 사람은 흉허물 없는 친구처럼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백거이는 시 속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아는 사이이어야 하는가’라는 소박하고 친근한 품성의 말을 남겼다. 백거이의 호는 ‘낙천’樂天인데 밝고 긍정적인 그의 인성에도 잘 어울리고, 천년 번영 속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꾼 소주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