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주원장이 수향에 드리운 그림자
10. 주원장이 수향에 드리운 그림자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선일까 악일까. 진부한 질문인데, 마치 통속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보듯이, 그 진부한 질문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요즘 나의 생각은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이다. 두려움이 세상을 움직인다.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해서 뜻을 이룬 남자가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이다.
송나라는 변경(개봉)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정하나 만주족의 금의 침입을 받고 결국 수도를 임안(항저우)으로 옯겼다. 임안이 수도였던 시기를 남송이라고 한다. 이후 만주족의 금마저 쫓아내고 대륙을 통일한 세력은 몽고였다. 하지만 몽고족의 원의 지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송원 시기를 거치면서 강남의 생산력과 문화는 크게 발전한다. 특히 쑤저우가 그랬다.
원 말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종교에 기반을 둔 농민반란군인 홍건적이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쳤다. 홍건적은 북쪽 지방과 중원을 휩쓸고, 고려에도 침공을 해서 고려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고려 말기였다. 홍건적의 침입을 어떻게든 막아내서 신진 세력을 떠오른 이간 이성계였다.
홍건적과 원나라 정예군의 싸움에 홍건적이 우위를 점하자 그 세력이 커지면서 홍건적 사이에도 분파가 나타났다. 그 분파들을 이끌었던 군웅들은 호북에 근거지를 둔 진우량(陳友諒, 1316년-1363년), 남경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던 주원장, 오월吳越의 장사성張士誠(1321-1367)이었다. 이들은 천하를 삼분지계처럼 나누어 세력을 다퉜다.
주원장은 천성이 까다롭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나 가로채야 할 것이 있으면,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주변인을 죽여버렸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도 다양하여 취미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화御畫에 나타난 주원장의 얼굴은 기품있고 위엄있어 보이나 실제 그가 임금이 되기 전에 그려진 그림 속의 얼굴은 기괴한 추남이었다. 중국 수천 년 역사에서 한漢 고조 유방劉邦보다 더 낮은 신분에서 출발하여 운 좋게 왕이 된 사나이로 꼽히면서, 동시에 역대왕 중에서 못생기기로 첫 손에 꼽혔다. 그는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군벌이 되기 전엔 먹고 살기 위해 말이 좋아 중노릇이지 구걸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백성들이 그만큼 가혹한 조건에서 살았다고 봐야한다. 그는 홍건적 안에 들어서자 마자 성공의 기틀을 다진다. 당시 자신의 상관이자 이미 홍건적 세력가였던 곽자흥의 양녀 마수영과 결혼하면서 단숨에 조직의 2인자가 된다. 역시 큰 성공의 뒤에는 결혼을 통한 재산과 지위의 승계가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그런데 주원장의 조강지처가 마씨라는 사실은 주원장이 회족(위구르인)이라는 의문을 만들어낸다. 당시 마씨는 주로 회족이었다고 한다. 여튼 주원장은 성격이 강퍅해서 주위 사람을 들들 볶고, 용맹이 지나쳐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주원장과 마지막까지 대립했던 군웅은 장사성이었다. 장사성은 강소성江蘇省 북쪽 지방에서 염전 노동자로 일하던 공인이었는데 관리들의 과도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같이 일하던 일꾼들을 규합하여 스스로 세력을 이뤘다. 쑤저우성의 북쪽, 기차역과 멀지 않은 곳에 쑤저우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망이 좋은 북탑보은사北塔報恩寺가 있다. 보은사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위,촉,오가 서로 겨루던 삼국시대 손권이 거립했다.(238년부터 251년에 사이) 이 절 안의 북사탑은 500년대 초반 건립되었으나 후에 화재로 소실 되었다가 재건과 보수를 거쳤다. 북사탑에 올라서면 하얀 벽에 까만 기와를 얹은 강남식 집들이 늘어선 쑤저우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다만 요즘은 탑 보존 및 안전 문제로 못 올라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탑 주위엔 장사성기공비张士诚纪功碑가 있다. 북사탑 주변을 돌아보면서 장사성기공비에 주위를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비석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장사성(1321-1367)은 역사상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쑤저우와는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장사성은 쑤저우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쑤저우는 남송 시대부터 상공업이 발달해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였다. 쑤저우는 이러한 풍요로움에 걸맞은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그 당시엔 다른 도시와 비교하여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다. 장사성은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매일 연회를 즐기면서 씀씀이가 커서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 들이 모여들었다. 장사성은 천하 제패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그러한 생활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천하의 판세가 결정되기 전, 소주의 민심은 장사성 편에 기울었다. 오월지방의 상인들과 지식인들은 장사성 편에 가담했다. 수호전의 작가, 시내암과 삼국지의 편찬 작가, 나관중도 장사성 군의 군사軍師를 지낸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주원장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적은 진우량이었는데 누구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파양호鄱陽湖 전투에서 주원장이 천신만고 끝에 진우량을 이겼다. 장사성은 두 사람이 파양호에서 혈전을 벌이던 시기에 진우량과 협력해서 주원장을 공격했어야 하나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주원장과 진우량의 싸움에서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역사는 장사성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고 평가한다. 아마 스스로도 후회를 했을 것이다. 진우량이 무너진 이후 장사성은 갑자기 자신보다 덩치가 3배로 커진 주원장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장사성은 1367년에 쑤저우가 함락되면서 몰락했다.
주원장은 중원의 패권을 거머쥐었고, 금릉(남경)을 도읍으로 정하고 명나라를 연다. 홍무제 주원장은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한 영웅으로도 인정받지만,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과 그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3대 황제 영락제 역시 자신의 조카와의 싸움(전쟁) 끝에 왕위에 오른 후 수많은 신진 사대부와 관료를 쓸데없이 잔인하게 많이 죽였다. 명나라 초기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조선 초기가 비슷하다고 거론되는데, 태조 홍무제와 영락제가 죽인 관료와 가족들의 숫자만 수만에 이른다는 소리에, 조선과 명의 초반 역사가 비슷하다는 주장은 내 머릿속에서 싹 달아났다.
영락제는 명나라의 역사적 특징을 만든 왕이기도 했다. 수도를 남경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베이징 성을 건설해서 베이징을 대륙의 수도로 만들었으며, 환관을 궁내외 정보 기관원으로 이용하는 기관을 만들어 환관을 이용한 정보 정치를 했다. 이렇게 명나라 초기엔 황제 개인의 잔혹함이 특징이었다면 말기는 무능한 사대 암군暗君으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환관들의 정보 정치.가 특징이었다. 명나라의 암군이란 10대 정덕제, 11대 가정제, 13대 만력제, 15대 천계제를 가리키는데 정사를 아예 돌보지 않고 태업을 했던 군주들로 결국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인도했다.
홍건족이 세상을 휩쓸던 원말명초였다. 한반도 역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정권 교체기였다. 이 시기에 조선과 관련된 시를 지은 문인이 있다. 쑤저우의 문인, 고계(高啓, 1336~1374)가 친한 선비인 주검교(周檢校)의 집에 초대받아 들렀다. 그리고 연회석 상에 나와 춤을 추고 고려말로 노래를 부르는 조선의 어린 소녀를 보고 주검교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주검교는 자신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홍건적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배를 골고 있는 어린 소녀아이를 돈을 주고 사서 소주로 데려왔다고 했다고 했다.
조선아가.朝鮮兒歌
조선의 아이 검은 머리
방금 잘라 두 눈썹 위에 가지런한데
잔치 자리에 방금 불려나와 마주보며 노래하고 춤춘다.
무명 겉옷 부드럽게 두르고 고리고리 늘어뜨리고
가벼운 몸 빙빙돌리고 가는 목소리로 노래한다.
달 출렁이고 꽃이 흔들림은 취중에 보이는 것이라
조선말 노래지만 어찌 통역이 필요하겠는가?
깊은 정은 고향 떠나온 한을 호소함을 알겠노라
노래를 끝내고 손님들 앞에서 무릎 꿇고 절을 올리는데
까마귀는 우물가에서 울고 촛불만 타오른다.
조선은 까마득한 곳에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무슨 연고로 조선아이가 이곳에 와 있는지 의아해한다.
주인이 나와 옛날 사신 따라 왔던 이야기를 하는데
만리 바다를 순풍을 타고 3일 만에 당도했으나
전란이 일어나 나라는 망하고 궁궐은 황폐해져
폐관되어 닭만이 울어대는 숙사에 행인으로 묵게 되었소.
-중략-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고아가 되고 낯선 땅까지 흘러 들어갔던 누군가의 운명이 애닲다. 하지만 이 노래를 읊었던 고계 앞엔 더욱 안타까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자, 장사성에게 극진하게 대우받던 당대의 쑤저우의 문인과 지성인들 화를 면하지 못했다. 최고의 문인이었던 천재 시인 고계高啓는 일단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중용되어 ‘원사’元史까지 편찬하지만 끝내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에 처해졌고, 이름난 학자 양기楊基는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장우張羽는 호송 도중에 자살했다. 이들 이외에도 문화의 도시 쑤저우를 빛내던 많은 지식인들이 살해되었다. 주원장의 쑤저우 지식인에 대한 탄압은 명나라 초기, 쑤저우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쑤저우 상인들에게는 다른 도시에 비해 더 무거운 세금도 메겨졌다. 하지만 명 태조가 워낙 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였기 때문에 꼭 쑤저우 지식인들에 대해서만 박해를 가했다고 보기 어렵다. 주원장은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권력의 중추를 장악하고 강남 지주층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10만명에 달하는 강남 지주층, 개국공신, 관료들을 처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