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향 마을과 거상
12. 수향 마을과 거상
명청 시기엔 중국 전역에서 상단, 혹은 상방商帮의 활동에 기반한 거부巨富가 출현했다. 그 들 중 가장 유명한 집단은 산서성의 진상晋商이었고, 안휘성의 휘상徽商 역시 유명했다. 산서성 상인들은 특히 큰 저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영화 홍등 촬영지로 유명한 교가대원, 상가대원, 왕가대원, 핑야오고성平遥古城 같은 것들이 있다. 산서성은 태항산맥 서쪽이면서 과거부터 몽고나 만주와 교역을 많이 했었다. 청 시기엔 금융업으로도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또 유명한 거부 중엔 청나라 말기의 호설암이 있는데 그의 고택故宅은 항저우에 있다. 호설암 역시 청나라 말기 관의 협력을 얻은 사업과 금융업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들도 세월이 변화고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중화인민공화국 이후로는 산서나 안휘같은 내륙 지방보다는 해안가를 끼고 있는 광둥성, 절강성에서 큰 부자가 나왔다. 최근에는 IT 트렌드에 올라탄 사람들 중에 큰 부자가 나왔다. 큰 부자는 시대가 만들었고, 흐름이 바뀌면 큰 부자들의 위치도 엄청난 낙차를 보이면서 추락하기도 했다.
원말元末 시기에 강남 수향에서 전국적인 부자가 나왔다. 주어장周庄의 심만삼이다. 심만삼에게는 원래 이름이 있었으나 만호萬戶 부자 중에 세 번째 쯤 된다고 해서 만삼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원말 명대에 이르러 중국은 본격적인 상인 거부들이 출현했다. 그 시기에 주어장에서 거부가 나왔다는 것은 쑤저우가 산업 생산력에서 전성기를 누렸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심만삼은 거부였으니 말년까지 유복한 삶을 살았을까? 그는 지식인은 아니지만 명태조 주원장과의 대립 속에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에 관한 기록은 정사나 믿을 만한 문헌보다는 민담의 형태로 전해져 온다.
소주 시내에서 30㎞ 남동쪽, 곤산崑山 지역에 주장周庄 마을이 있다. 주장은 ‘강남 제일의 수향’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수향 중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소주의 원림들이 인공미를 보여준다면, 주장의 마을 길과 원림은 뛰어난 자연을 이용해서 만들어져서 더욱 아름답다. 인문환경과 자연환경의 조화는 강남 수향마을의 정수로 평가 받았다.
쌍교는 주장의 상징과 같은 다리인데, 아치형 돌다리인 세덕교世德橋와 돌로 만든 형교인 영안교永安橋가 직각으로 이뤄져 있다. 이 다리는 진일비陳逸飛의 그림으로 유명하고, 주장은 1984년 중국계 미국인 화가인 진일비가 그린 38점의 유화가 뉴욕에 전시되면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 화가인 우관중吳冠中이 그린 주장 그림도 유명하다. 쌍교 남쪽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심청沈廳이 나타난다. 심청은 심만삼의 후손 심본인이 건륭제 시대인 1742년에 건축했다. 2,900㎡ 규모로 100칸에 이른다. 심만삼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심청 벽엔 심만삼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가 동판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다.
태호 남쪽의 남순南浔 출생했지만 원나라 말기, 그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주장으로 옮겨와 성장했고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심만삼은 갈대가 무성한 저지대 습지였던 저우장 주변에 곡식과 유채, 뽕나무를 재배하여 엄청난 수확을 거두어서 인생 초반기에 돈을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부자가 된 길은 소주의 거부 육덕원陸德源을 만나서, 육덕원의 해상 무역을 이어받으면서였다. 심지어 육덕원은 인생 말년에 도교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애제자였었던 심만삼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사라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내려온다. 심만삼의 인생에 소중한 귀인이었던 셈이다. 이후에는 저우장을 거점으로 장사에 나섰다. 저장성 일대에서 생산되는 실크, 도자기, 공예품을 수출하고, 해외의 보석과 향료를 수입하는 대외 무역을 통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고, 일약 강남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아마도 육덕원이나 심만삼이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는 것은 밀무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나라나 명나라 내내 개인의 사적인 해외무역은 대체로 금지되었다. 원나라나 명나라 시절엔 쑤저우 북서쪽은 장강과 연결되는 물길을 따라 해외로 연결되었다. 영락제 시절, 정화鄭和의 해외 원정대가 출발한 항구 역시 남경이라는 설도 있지만 쑤저우 외곽의 항구라는 말도 있다.
1368년 몽골족의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의 개국황제가 된 주원장이 심만삼의 집을 방문했다. 심만삼은 장사성의 시체를 운구한 일로 인해, 주원장의 미움을 샀었다. 성질이 폭력적인 주원장은 자기보다 잘나고 부자인 사람을 보는 성미는 아니었다. 그러자 심만삼은 심 씨 집안에서 귀빈을 모실 때 필수 메뉴인 돼지족발 요리를 준비하여 주원장을 대접하는데, 주원장은 통째로 조리된 족발을 앞에 두고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말이냐?’라며 시비를 걸었다. 애당초 주원장이 심가를 찾은 목적은, 눈에 거슬리는 부자인 심만삼을 제압하기 위한 건수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족발 요리를 놓고 트집을 잡았다.
통째로 조리된 족발이니 당연히 칼로 잘라 먹어야 했지만, 황제 앞에서 칼을 손으로 잡는 것은 역모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칼로 족발을 자르는 것은 문제였다. 자신의 미천했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주원장은 통상적인 문자 사용에도 매우 민감하였는데, 문자옥文子獄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었다. 예를 들면, 주원장은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은 자신의 승려 생활을 비웃는 글자로 금기어로 만들었다. 황제의 성씨인 주朱zhu와 발음이 같은 돼지(猪 zhu)를 ‘돼지’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이런 상황이니 주원장 앞에서 칼로 돼지를 자르는 것은 황제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될 것이 뻔했다. 심만삼은 족발에서 뼈를 뽑아내어 그것으로 족발을 잘라서 주원장이 먹도록했다. 그러자 주원장이 ‘요리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돼지 족발이라고 했다가는 주원장의 발을 먹는 것이 되므로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심만삼은 자신의 무릎을 두드리며, ‘만삼제’(만삼의 발굽)라고 대답하여 그날의 위기는 넘겼다. 만삼제는 오늘날에도 그 지역의 잔치에서 고급 메뉴로 자주 등장하며 칼을 쓰지 않고 뼈로 잘라 먹는 것이 풍습으로 전해진다.
심만삼은 한 번 위기는 넘겼으나 집요한 주원장 성격상 거기에서 그치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당시 주원장은 나라를 개국하고 남경에 성을 쌓았다. 상인인 심만삼은 알아서 권력자인 주원장에게 성을 쌓는 일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심만삼이 사재를 털어 성의 1/3을 쌓고, 주원장의 백만대군이 나머지를 쌓는데, 심만삼이 딱 3일 먼저 완공했다. 이에 주원장이 기분이 상했는데, 상황파악이 안 된 심만삼이 백만 황금을 털어 성을 쌓았던 군사들을 위로하겠다고 진심 선의로 말했다. 그러나 까다로운 성미의 주원장이 볼 때 당연히 황제가 백만대군을 위로해야 하는데, 심만삼의 행위가 본분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주원장은 심만삼에게 동전 한잎을 주었다. 그리고는 내일부터 하루에 두 배씩 이자를 갚으라고 했다. 다음날 두잎, 그 다음날 네잎.... 한 달이 지나니 무려 5억 냥이 훨씬 넘었다. 그 후로 주원장은 트집을 잡아 심만삼의 재산을 홀딱 벗겨 먹는 것도 모자라서 죽이려 들었으나, 주원장의 부인인 마왕후의 간언으로 목숨만 건지고 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심만삼은 귀양지를 전전하다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객지에서 사망했다.
주장 마을 입구를 지나니 저우장의 특색 요리인 ‘만삼제万三蹄’를 진공포장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여럿 보였다. 상업화의 냄새가 솔솔 났다.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된 후 주장周庄은 이전의 수향의 정취를 잃어버렸다는 악평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안 변하는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