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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Oct 23. 2024

슬로우보우트 투 차이나-14 춘절은 베이징 KFC에서

14. 춘절은 베이징 KFC에서

14. 춘절은 베이징 KFC에서   

     

  그해 춘절 기간을 나는 베이징에서 S와 함께 보냈다. 우리는 이미 고궁故宫이나 만리장성, 이화원 같은 대표 관광지는 둘러보았고 새로운 장소를 찾고 있었다. 춘절 전에 S가 중국인 지인에게 춘절에 원명원圆明园에 갈 계획이라고 했더니, 그 중국인은 ‘겨울에 그 돌무더기를 뭣 하러 보러가냐’고 하면서 천단天壇 공원을 권했다. 그가 말하길, 정월 초하루 아침에 천단 공원에서 기를 받으면 일 년 재수가 좋다고 했다. 또 천단 공원을 본 다음엔 베이징 시내 용담龍潭공원이나 지단地壇공원에서 열리는 묘회廟會를 둘러 보라고 권해줬다. 춘절 오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 공원에 갔다가 오후에 땅에 제사를 지내는 지단 공원에 가는 것은 나름 괜찮은 일정 같았다. 베이징은 고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일단, 월단, 천단, 지단이 있는데 각기 태양 달 하늘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천단공원과 지단공원의 의미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묘회’는 뭐지? 듣도 보도 못한 행사였다. 어쨌거나 우리는 좀 빡빡한 일정이겠지만 원명원과 천단공원 그리고 지단공원까지 모두 둘러 보기로 했다.      

  베이징은 몽골족이 도시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명나라 영락제가 1406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명청 시대,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도시 건설자들은 자금성 뿐 아니라 도시 전체의 계획에 있어서 철저하게 풍수지리와 주역 사상을 따라 만들었다. 자금성紫禁城이라는 이름은 북두칠성의 기준점이 되는 별인 자미성에서 왔다. 자금성은 정 남향을 따라 정방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자금성은 세상의 중심이면서 기준인 자오선子午線 상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베이징은 평원 위에 지어진 도시로 북쪽으로는 연산 산맥이 동서로 있어 초원과 중원의 자연경계를 이뤄준다. 연산산맥의 산줄기엔 무텐위(慕田峪) 등의 장성이 있는데, 유명한 빠다링(八达岭) 장성에서 연산 산맥 줄기가 끝이 나고 남북으로 늘어선 태항산맥의 줄기가 시작된다. 남북으로 이어진 태항산맥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를 이룬다. 


  베이징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산은 북서 방향에 있는 향산이다. 향산은 황실 원림의 일부였고, 그 향산에서 조금 더 나오면 이화원(颐和园)과 원명원이 나란히 있다. 고궁을 보면 알겠지만 고궁은 공적 업무의 공간이어서 웅장하고 멋있기는 하나 나무 하나 없는 삭막한 곳이다. 반면 원명원은 이궁(離宮)으로서 청 황실의 사적 생활이 이뤄진 공간이었다. 그래서 원명원 안엔 황실의 진기한 보물과 동식물, 서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곤명호와 소주가 등이 있는 이화원은 서태후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서태후는 주로 이화원에서 머물면서 정사를 보았다. 2차 아편전쟁으로 파괴를 당한 후에 서태후가 나랏돈을 쏟아부어 심혈을 기울여 복구한 영향으로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원명원은 주로 건륭제 시절에 유명했던 건축물이 들어섰다. 청나라가 제국으로써 그 위용을 뽐내던 시절은 강희제, 옹정제와 건륭제로 이어지는 시절이었는데, 건륭제는 준가르 지역 공격에서 승리하면서 외몽골과 위구르 지역을 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건륭제는 광대한 영역을 확장한 왕답게 건축 분야에도 열정을 쏟았다.      

  건륭제는 원명원에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을 짓도록 지시했는데, 특히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화려한 서양루(西洋樓) 건물군과 정원을 짓도록 했다. 서양루(西洋樓) 안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해안당(海晏堂)인데, 서양 건축 양식을 도입한 돌기둥을 세워 만들었다. 또 해안당 앞에는 십이지 신상이 물을 뿜는 분수대가 있었는데 일종의 물시계로 십이지신상은 자신이 상징하는 시간에 입에서 물을 뿜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해안당의 호화로움과 웅장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또 해안당 근처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을 모방한 미로 형식의 정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1860년, 2차 아편 전쟁 때 영국군과 프랑스 군에 의해 원명원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해안당은 그나마 석조 건물이어서 잔해라도 남았지 원명원 내의 다른 건물들은 목조 건물이어서 방화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또 건물 안에 있던 수 만점의 책과 진귀한 도자기, 비단, 생활 용품들도 함께 불에 타 사라졌거나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화원도 파괴되었지만 서태후의 적극적인 의지로 복구가 되었던 이화원과 달리 원명원은 폐허가 된 채 내버려 졌으며 이후 중국인들에 의한 손상도 진행되었다.      



  춘절은 맑은 날씨였고 꼭 어렸을 때 부모님 손을 잡고 큰집에 가는 설날처럼 추웠다. 나와 S는 이른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원명원에 갔다. 입장하자마자 그 유명한 돌무더기를 볼 줄 알았는데 원명원도 다른 대륙의 관광지처럼 예상보다 넓었다. 관람 열차도 있었는데 겨울철 아침이라서 운행을 안 했다. 우리는 나무들이 늘어선 작은 언덕과 연못이 있는 길을 걸어갔다. 겨울이어서 꽃이나 풀은 없었고, 잎이 진 나무들만 늘어서 있었다. 황실 정원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나 만주의 어느 겨울 들판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겨울 추위에 얼어 있는 호수를 지나서 어느새 그 유명한 ‘돌무더기’, 해안당 앞에 와있었다. 외부 문화에 진취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건륭제는 서양 선교사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서구 문물의 우수성에 눈을 뜨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야심 찼던 시도는 청말의 혼란 속에서 돌무더기로 남아 있게 되었다. 중국은 서양의 침략에 당한 역사 현장을 남기기 위해 무너진 서양루 잔해를 그대로 둔다고 했다. 우리는 프랑스 로코코 양식을 모방해서 만든 누각과 정원도 구경했다. 물론 누각과 정원은 현대에 다시 복구된 것이었다. 원명원은 봄이나 여름, 가을에 왔다면 소풍지로 꽤 괜찮을 것 같았지만 겨울도 좋았다. 잎을 모두 떨군 거목들과 서양의 침략에 파괴당한 석조 건물의 잔해는 묘하게 어울렸다.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돌무더기만 보았어도 좋았어’라고 말하고 싶은 곳이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원명원을 빠져나오는데 보니, 꽁꽁 언 저수지 위에서 청 귀족과 팔기군 복장을 입은 스케이트 가무단이 깃발을 들고 공연을 했다. 춘절이라고 시 측에서 준비한 행사 같았다. 원명원을 빠져나오니 입구 앞에선 사자 탈춤을 공연하는 잡기단도 와 있었다. 태양을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은 단원이 시소 위에서 탈을 쓴 사자와 놀면서 재주를 넘었다. 명절 분위기가 제도로 났다. 

   천단 공원 역시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면 바로 앞에 기년전 등의 유명한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많이 있는 평지를 지나 가야했다. 마침내 기년전 앞에 섰을 때는 눈이 부시게 선명한 파란 현판과 기와나 기둥의 황금색 문양에 눈의 부셔서 비현실적이 느낌마저 들었다. 워낙 유명한 건축물이다 보니 이미 여러 차례 사진으로 봐서 그런지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천단 공원에서 나와서 지단공원으로 갔다. 시간은 벌써 오후였다. 묘회廟會란 이러했다. 청나라 시절에 베이징에는 많은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고, 그 사당 앞에는 제사 지낼 때 쓰는 물건을 파는 상가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묘회는 그런 상가들의 모임이자 행사였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이후에 묘회는 없어져야할 봉건적인 잔재로 여겨져서 민간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부는 묘회廟會를 전통문화라고 인정하면서 부활시켰다. 중국 정부는 묘회를 다양한 민족들의 융합의 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85년 이후 베이징의 용담공원과 지단 공원에서 묘회가 열렸는데, 그러니까 묘회는 좋게 말하면 춘절에 열리는 전통 문화 행사이고, 나쁘게 말하면 관제 행사 쯤 되는 것 같았다. 과거에 여의도에서 열렸던 관제 행사가 생각이 났다. 

  지단 공원엔 중국 전통 민속 기념품을 파는 천막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베이징 시민들이 인산인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와 있었다. 기념품 따위는 안 사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결국 잉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림을 사고 말았다. 춘절에 좋은 기를 받아야 한다는 중국인을 속되다고 속으로 비웃어 주었는데, 나는 등용문의 기운을 준다는 그림을 덜컥 샀다. 그렇게 춘절 겨울 오후가 평온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 소리에 S와 나는 자석에 끌려가는 철가루처럼 무대쪽으로 갔다.     

  공원 한쪽에 마련된 무대에선 전통 복장을 멋지게 갖춰 입은 몽골 청년들이 전통 노래와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첼로만큼이나 큰 마두금도 서서 연주했다. 그들의 노래는 초원에서 동물을 부르는 소리 같으면서도 용맹한 전사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목소리 같았다. 마두금 연주는 말을 타고 초원을 호쾌하게 달려가는 용사의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의 기세 같았다. 당시엔 유튜브도 없어서 ‘월드 뮤직’을 찾아 듣는 것이 비교적 어려웠었다. 서구 음악엔 관심이 많으나 ‘월드 뮤직’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몽골 음악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나와 S는 그날 처음 몽골 음악을 듣고 ‘초원 음악’의 수준과 매력에 깜짝 놀랐다. 어쩌면 무대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어서 더욱 인상 깊었는지도 몰랐다. 베이징에서의 새해 첫날이 ‘몽골의 발견’으로 끝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공연 중간에 S가 대충 청년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들은 그날의 공연을 위해서 기차만 열 시간 정도 타고 왔다고 했다. 중국내 ‘내몽고자치구’가 동서로 매우 광활한 지역에 걸쳐 있고 도시 지역이 아니다 보니 그렇게 오랜 시간 이동해야 하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S와 나는 목에 과도한 힘을 주어 내는 몽골의 전통 노래법과 한국의 창이 꽤 유사하다는 의견을 주고받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대체로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저녁에 스치하이(什刹海)에 있다는 솬양로涮羊肉 식당을 찾아갔으나 춘절이라 예상대로 영업을 하지 않았다. 솬양로涮羊肉는 겨울에 특히 어울리는 베이징을 대표하는 음식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베이징 덕duck’보다는 신선로에 나오는 솬양로가 베이징에 가장 어울리는 음식 같았다. 


                                  화북지망의 짜장면. 북경의 닭구이. 북경의 양볶음


  한국 설도 그렇지만 중국 춘절은 특별한 기간이다. 일 년 내내 하루도 안 쉬던 식당이 춘절에만 몰아서 이 주 내내 쉬거나, 평소에 물건이 많지 않던 찻잎 가게가 춘절이 다가오면 천장까지 찻잎 상자를 쌓아둔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차는 춘절 전에 대부분 어딘가로 팔리고, 정월 한 달 내내 가게 문을 닫았다가 다음 달에 문을 연다. 그해 베이징에서 지낸 설 연휴에 나는 미국의 유명 패스트 푸드 가게인 컨더치(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중국 어딘가를 춘절 기간에 여행한다는 것은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마치 한국에 있었다면 명절에 패스트푸드 가게엔 절대 안 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중국의 패스트푸드 가게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날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걸으면서 밤하늘을 쳐다보는데 몽골 가수들의 노래 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들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그 노래보다 더 단조로운 곡조가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어린 시절 지방의 친척 집에 가면, 집 밖 골목에서 ‘세트악, 세트악’ 목에 힘을 주어 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 소리는 몽골 노래의 발성법과 꽤 닮았었다. 또 시장에 가면 목에 잔뜩 힘을 주어 외치며 손님을 끌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는지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장사꾼들이 있을까.

  나름 괜찮은 정월 초하루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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