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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Oct 24. 2024

슬로우보우트 투 차이나-15. 베이징, 라오서 이육사

15. 베이징, 라오서 그리고 이육사

15. 베이징, 라오서 그리고 이육사     


  나는 모름지기 베이징을 진짜 알기 구궁이나 이화원, 경산景山, 빠다링 장성같은 유명 여행지 말고도 베이징의 덜 유명한 곳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 후통들을 아무 생각 없이 종일 걸어 다녔고, 호텔 대신 사합원을 개조한 모텔을 숙소로 잡기도 했다. 베이징 근교의 고마을인 촨디샤에 들렀을 때도 민박을 했었다. 그리고 베이징의 오페라 극장이나 피자 가게를 들렀다. 그런데 베이징을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었을까? 왜 그렇게 그 시간엔 낯선 곳을 알고 싶어했을까. 그것은 어떤 반항이었을까.       

  왕푸징王府井은 베이징 중심, 구궁 근처에 있는 상가 밀집 거리여서 여행객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다. 쇼핑센터와 대형 서점, 서양식 천주교회가 있고, 베이징 특색의 샤오츠(간식) 가게도 많다. 명나라 시절에는 왕부 대신들의 관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런 위험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왕푸징은 탕후루와 지네 튀김으로 외국 여행객들의 시선을 빼앗는 식의 ‘작정한 관광 거리’였다. 왕푸징은 외지인들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 닳고 닳은 상술만 넘쳐나는 장소여서 나에게 왕푸징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베이징 여행의 마지막날, 저녁 시간 비행기여서 베이징 시내 중심에 있는 장소 한 곳 정도는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오전 나는 작가, 라오서가 살았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라오서의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베이징을 상징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라오서 기념관은 왕푸징 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후통에 있어서 방문하기에도 편리했다. 


  라오서老舍(1899-1966)는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 소설가이면서 베이징의 문인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리는 작가이다. 라오서는 청나라 시절의 베이징 후통의 만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만주인이었던 라오서에게 베이징은 쇠락해가는 청나라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만주족의 혼이 스며있는 곳이었다. 라오서는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재능과 노력으로 영국 유학까지 갔다 와서 교수로 일했다. 

  문학 교수로 살던 라오서가 작가가 될 결심을 하고 쓴 작품이 ‘루어투어 시앙쯔’骆驼祥子였다. 1920년대 베이징의 가난한 인력거꾼, 시앙쯔의 삶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비판적 리얼리즘 정신을 기반으로 그려내었다. 작품의 성공으로 라오서는 교수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청나라 봉건제가 망한 혼란기는 작가가 소설만 쓸 수 없는 시기였다. 그는 소설 창작의 본령인 예술가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대중을 향해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글도 썼다. 그는 항일전쟁시기에 중국 공산당의 대일항전을 지지하고 애국심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면 다른 작가나 지식인들에 비하면 라오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순수한’ 작가였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작가적 명성이 확고해진 라오서는 미국에 체류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 머무를 당시 중국 상황에 정통한 펄벅 여사는 라오서에게 중국에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 남아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라고 권유했다. 펄벅은 중국 대륙에 이는 공산화의 바람이 소설 창작인이였던 라오서에게 어떤 위험한 운명으로 다가올지 염려했던 것 같다. 하지만 라오서는 고향,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는 봉건제 청산 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 살면서 새롭게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에 희망을 걸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 중국 당국은 라오서에게 문화계에서 높은 지위를 주었다. 라오서는 여전히 창작에 힘써서 우수한 희곡 작품을 썼고,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같은 요직도 역임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가 시작되자 라오서의 작품은 교조적인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라오서에게 어떤 압력을 가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라오서는 많은 대중들이 이미 읽은 ‘루어투어 시앙쯔’마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일부 내용을 수정해야 했다. 그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공산당 하급 관리를 속물적인 모습에서 건전한 성격으로 살짝 바꿨다고 한다. 아! 작가가 작품 속 인간 묘사를 수정하다니.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직책을 맡는 순간부터 그의 말년 작가 인생에는 금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악몽같은 문화대혁명이 성큼 찾아왔다. 1966년 8월 23일, 그는 베이징의 집 근처에서 홍위병들에게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라오서가 인생 내내 성실하게 쏟아부은 땀과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을 부정당했울 것이 뻔했다. 라오서는 스스로 인생의 마지막 날을 택했을까. 라오서가 행방불명이 되고 이틀 후, 그는 시체로 베이징 시내의 한 호숫가에서 발견되었다. 작가와 교육자, 지식인으로써 영광과 명예가 따르던 그의 삶은 그렇게 한순간에 비극으로 끝이 났다. 

  라오서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펑푸후통丰富胡同 기념관에서 만난 소탈한 인상의 라오서 사진이 그에 대한 애잔한 감정을 자극했다. 다른 중국 명사들의 옛집에 비하면 라오서의 마지막 집은 소박한 편이기도 했다. 기념관을 대충 둘로 보고 마당으로 나오니 라오서 부부가 심었다는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가을에 동북 지방이 아닌 중국 땅을 걷다 보면 한국만큼 감나무를 많이 볼 수는 없다. 평범한 한국 집 뜨락에 가장 흔한 것이 감나무이고 감을 가장 맛있게 먹는 사람도 한국 사람이다. 라오서가 심은 감나무를 보니 라오서에 대해 어떤 끈끈한 유대감마저 생기는 기분이었다.      


  라오서의 기념관을 나와서도 ‘66, 08, 23’으로 고정되어 있던 작업실 탁자의 달력 이미지가 머릿속에 기분 나쁘게 남아 있었다. 라오서는 후통을 걸어나가면서 자신이 무서운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었다. 라오서처럼 문학에만 조용히 정진한 사람에게 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런 덫과 함정이 있어야 했을까. 나는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높은 담의 그림자가 드리운 길을 걸어가면서 내가 문화대혁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잊고 지냈음을 인정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살이 썩고 뼈가 꺾이는 고통을 당했다. 비명횡사가 복 받은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예술가나 지주뿐만 아니라 수십 년 혁명에 앞장서온 군인이나 정치가들도 천길 낭떠러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굴러떨어졌고 날카로운 칼날들이 있는 덫에 빠졌다. 그 덫을 피해간 사람은 마우쩌뚱 자신을 제외하면 주은래 정도였을까. 당대 권력의 2인자 유소기의 비참한 최후를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주은래는 어떻게 숙청의 대상을 피해나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광란과 상관없이 살아간 공산주의 운동가도 있다. 나는 루쉰魯迅(1881-1936)의 인생을 떠올렸다. 라오서도 유명한 작가이지만 루쉰은 중국 현대 문학의 상징으로 중국 내 위치는 훨씬 확고하다. 루쉰은 청이 무너진 이후의 혼란기에 사상운동가 겸 근대 문학의 개척자로서 사회주의 혁명에 앞장서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기 전에 사망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예술가나 지식인들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겪은 모진 고난을 겪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으로 보자면 좋은 인생이었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용허궁雍和宫 근처 후통에 있는 수제 햄버거를 식당으로 갔다. 햄버거에 커피만을 시켰는데 가격과 맛이 모두 좋았다. 나는 수제 맥주에 감자튀김, 피클까지 주문해 먹어버렸다. 혼자서 꽤 많이 먹은 셈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밖을 보니 골목엔 장기를 두는 베이징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목줄을 매지 않고 자유로이 다니는 몇 마리의 강아지들이 장기판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그 가게에 있는 수제 맥주를 더 마시고 싶었지만, 곧 귀국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완벽한 오후였다.   


   

  한국에 돌아왔다. 이화원이나 스치하이를 쏘다녔던 저녁, 중국에서 먹었던 요리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내 생활이 좀 더 괜찮아졌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베이징 후통에서 먹었던 햄버거와 커피 그리고 피클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까 베이징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음식은 카오야나 찐장로쓰, 양 요리 등등이 아니라 아메리칸 스타일의 햄버거였을까? 어쩌면 엘에이에서 내 인생의 비빔밥이나 해장국을 만날 수도 있고, 서울에서 내 인생의 꿔바로우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딜dill과 물밤water chestnut을 재배해서 먹어볼 계획을 세웠었다. 딜로는 오이피클을 만들고 물밤으로 마티가오馬蹄糕까지는 못 만들겠지만 조림 요리에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물밤 묘목은 구하지 못했고 딜Dill은 씨앗까지 구해놓고도 심지 못했다. 딜을 심었다고 해도 한국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시들어 갔을 것이다. 우리 집에 멀쩡한 상태로 들어왔다가 죽어 나간 로즈마리 화분이 여럿 있었다. 


<이회영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뤼순 감옥 전시실과 이육사 사진>


  다시 몇 년 후, 나는 인터넷에서 왕푸징 근처의 후통이 재개발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우연히 발견했다. 재개발로 헐리는 건물 중엔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옥사한 건물이 있다고 했다. 그 후통은 동창東廠이 있었던 음습한 곳이었다. 동창东厂은 명나라의 악명 높은 비밀정보조직으로 원래의 목적은 관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만들어진 황제 직속의 기관이었으나, 환관들이 주로 정적 제거나 반란 세력을 몰아 죽이기 위한 정보를 캐고 고문을 행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일본의 베이징 점령 시기에 일본 헌병대는 동창 건물 일부를 감옥시설로 사용했다고 한다. 나는 그 기사를 읽기 전까지 왕푸징 주변 후통에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고, 특히 이육사가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막연히 뤼순旅顺이나 서대문 형문소 정도로 짐작했던 것 같다. 참고로 뤼순 감옥은 랴오닝성 다롄 주변에 있고,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갇히었었고,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 곳이다. 40년의 짧은 생애 동안 17번의 옥살이를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이육사. 그는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앞둔 1944년 추운 1월에 베이징, 일제 헌병대 감옥의 쇠창살 아래에서 숨을 거뒀다. 숨이 막혀 왔다. 

  베이징을 알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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