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유쾌한 천재, 소동파와 온건 보수주의자, 임어당
16. 유쾌한 천재, 소동파와 온건 보수주의자, 임어당
항주杭州는 중국 남부, 절강성의 제일 큰 도시이다. 전당강钱塘江은 황산에서 발원하여 항주와 상하이 아래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동해에 흘러든다. 항주 중심에 있는 서호西湖는 대략 2000년 전에는 전당강의 일부였다가 서서히 침전물이 쌓이면서 강과 분리되어 호수가 되었다. 항주는 역사적으로 수나라 시절 경항 대운하가 만들어지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특히 북송北宋이 여진족의 금나라에 밀려 수도를 카이펑開封에서 임안临安, 즉 항주로 옮기고 남송南宋 시대를 열면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항주는, 오래 전, 내가 알았던 중국 도시 이름이라고는 베이징, 상하이, 서안, 홍콩 밖에 없었을 때, 내가 다섯 번째로 알게 된 중국 도시였다. 임어당(林語堂 린유탕)의 ‘Gay genius’, <유쾌한 천재>라는 책을 읽고 항주라는 도시 이름을 처음 들었다. 임어당은 1895년 복건성福建省, 가난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중국의 언어학자겸 문명비평가, 문학인으로 살았다. 근래에는 ‘생활의 발견’이 영화제목이나 다른 이름으로 더 익숙하지만, ‘생활의 발견’은 임어당의 대표 수필집이다. 나는 어렸을 때 그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가 독자에게 생활에서 소소한 기쁨을 찾으면서 즐겁게 살아가라는 고리타분한 설교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임어당이 재미없는 목사님 같은 성격의 학자라는 선입관은 어느 날 ‘유쾌한 천재’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싹 바뀌었다. 나는 임어당이 평생 학문에만 정진해서 재미없고 답답한 글만 쓰는 학자라는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 책에서 제일 나의 마음을 움직인 부분은 소동파의 일생이 아니라 임어당이 자신의 소동파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동파 문학을 사랑했었고, 인간 소동파와 소동파가 살다간 시대를 그려낼 결심으로 자료를 모아나갔다고 했다. 그러다가 수년간의 노력 끝에 장학금을 받아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젊고 가난했던 임어당은 책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모아온 소동파에 대한 많은 자료를 고향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소동파에 대한 자료 자체가 자신의 분신이었다. 당시엔 미국을 가려면 적어도 한두 달 동안 배를 타고 가야 했던 시절이었는데 임어당은 화물 수송비를 따로 내고 자료를 싸들고 미국에 갔다. 미국에 살면서 이리저리 이사 다닐 때에도 자료를 모두 들고 다니느라 힘들었지만 그는 소동파에 관한 것만큼은 자신과 따로 떼어 둘 수 없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 <유쾌한 천재>를 읽고 나면 소동파뿐만 아니라 임어당도 이해하게 된다. 임어당은 인위적인 노력파인 왕안석과 자연스런 재능의 소유자인 소동파를 대비시켰다. 궁극적으로 임어당은 사회 속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않는 온건 보수주의자였다.
소동파가 살았던 북송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하자면, 960년에 후주後周의 장군이었던 송 태조 조광윤이 후주의 귀족들로부터 왕권을 무혈로 선양을 받고 개봉开封(카이펑)에 송나라를 건국했다. 조광윤은 정권 초기 왕권 강화 차원에서 중국의 역대 정권이나 이후 후대에 세워졌던 명에서 벌였던 유혈 숙청을 단행하지 않고 온건하게 국가 기반을 다져나갔다. 송나라 이전의 제국들이나 이후의 제국들에서 나타났던 환관 정치가 약했으며 과도하고 잔인한 학살 정치가 없었다. 하지만 북방 초원민족들과의 싸움에서 돈을 주는 유화정책을 편 왕조로 후세 사람들로부터 경시되는 면도 있다. 그런데 송나라가 창건한 초기에 재빨리 돈으로라도 평화를 유지했던 것이 송나라의 상업과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고, 경제력이 막강해지니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계속 돈으로 국방력을 사는 상황이 유지되었다. 어찌 되었든 북송과 남송은 산업 생산력에 있어서 당시 전 세계에서 논란의 여지 없이 최고 수준이었던 제국이었다. 오늘날 카이펑은 중국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발전과 개발의 뒷전에 선 침체한 분위기의 도시로 보일 수 있지만 송 시절 카이펑은 활력과 화려함이 넘치는 도시였다. 사람들은 인정이 넘쳤고 거리엔 많은 수레와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송의 모습이 완벽한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빈부 격차라는 불안요소가 극심했다. 그렇다 보니 북송 조종은 조세제도를 둘러싼 구법파와 신법파의 극적인 대립이 있었다. 북송시대는 중국 왕조에서 드물게 개혁과 보수가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왔다 갔다했던 시대였었다. 구법당과 신법당은 서로 대등한 세력의 파벌로, 송의 젊은 황제가 즉위하면 신법당이 득세를 했고, 왕이 요절을 해서 태후마마가 수렴청정할 때는 구법파가 정권을 잡아서 신법파가 만들어 놓은 토지와 조세 제도를 죄다 이전으로 고쳐 버렸다.
소동파가 정치인이자 중견 관료로 활동하던 시기는 송 신종神宗(송 6대 황제) 연간인데, 소동파 외에 사마광과 왕안석도 당시 정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인물이었다. 신종은 재상 왕안석을 재상으로 두고 신법, 즉 개혁을 추진했었다. 구법파의 거두인 사마광은 신법을 펼치려는 신종 아래에 있을 수 없어, 낙양에 은거하며 동양 중세 정치행정에 있어서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자치통감’을 썼다. 이 과정에서 신종은 사마광의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소동파는 신법파 대신들한테 찍혀서 지방관직을 하거나, 황주와 혜주, 해남도같은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러면 왕안석은 편안하게 재상으로 복무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조종에서 황후를 등에 업은 구법파들의 등쌀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있다가 결국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칩거에 들어가야 했다. 개혁에 마음이 있던 신종은 다시 왕안석을 조종으로 불러들였으나 그때는 이미 개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후였다. 그래도 신종의 재위기간은 십 팔년 정도는 북송의 성세盛世였었다.
신종이 기대보다 이른 시기에 죽고 황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사마광은 중앙정치에 복귀해서 신종이 만들었던 신법정책을 파기하고 이전으로 되돌리는데 호랑이에 쫓기는 사람처럼 몰두했다. 오죽하면 같은 구법파인 소동파마저 사마광의 급한 행보를 말렸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많았던 사마광은 공교롭게도 일 년 동안 신종의 신법 정책을 이전으로 되돌리는 급한 행보를 끝마치자마자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가족에 불행이 닥쳐 침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왕안석도 그즈음 사망한다. 이후 북송 조종은 신법파와 구법파는 보복에 보복을 주고 받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왕안석이 사라진 신법파는 더이상 신법파가 아니었다. 왕안석의 그늘에 가려 안 보였던 가짜 신법파들이 행세를 시작했다. 그들은 개혁 자체 보다는 자신이 보다 쉽게 영달을 꾀할 수 있어서 신법파로 행세해왔을 뿐이었다. 북송은 명재상 범중엄과 당송팔대가 왕안석,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같은 큰 인물이 황제를 보필하여 활약하던 시절의 절묘함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그때 등장한 희대의 예술가 황제가 휘종이었다. 휘종은 정치는 뒷전이었고 그림과 글씨에 몰두하여 궁중내 직업 화가들보다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황제였다. 강남의 진기한 돌을 이용하여 정원 꾸미기와 천하의 진기한 예술품 수집에 국고를 탕진했다. 이 때 휘종 곁에 있던 유명한 간신이 채경蔡京이었다. 채경은 구법파가 득세하면 구법파 행세를 했고 신법파가 세력을 잡으면 신법파 행세를 했다. 주위에서도 채경의 위험성을 알고 중앙정치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어떻게든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아 송나라 정치를 망치는 원흉이 되었다. 채경 같은 간신이 설쳐서 백성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가 소설, 수호전의 배경이 되었다. 결국 휘종은 거란이 세운 요와 여진이 세운 금 사이에서 잘못된 외교를 펼치다가 여진족에게 침략을 허용하고 만다. 송은 여진족의 금에 패해, 휘종 본인과 북송 황실 일족들은 여진족의 땅으로 끌려갔다. 겨우 살아남은 황실 일부가 장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서 남송을 세워야 했다.
다시 ‘유쾌한 천재’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임어당의 소동파와 왕안석에 대한 생각은 명확했다. 임어당은 소동파의 꾸밈없는 인간성과 멋을 아는 생활태도를 좋아했다. 반면 왕안석은 외골수의 편협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왕안석의 꾸밈 있는 성정性情이 정치와 만날 때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고 보았다. 왕안석같은 인물이 세상에서 득세할 때는 천하에 여유와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시대가 도래한다고 했다. 단 임어당도 왕안석을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있는 평범한 관리들이나 허섭스레기 같은 간신들과 나란히 놓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기본 전제는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말 안해도 알만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면이 임어당의 정치색이 명확히 드러나는 면이었다. 왕안석이 사마광이나 소동파와 서로 안부를 묻고 덕담하는 서신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소리이며, 왕안석도 당송팔대가에 꼽힐만큼 문장과 학문에서 그 시대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이었다. 적나라하게 말해 왕안석이 소동파를 귀양 보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임어당은 왕안석의 인간성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왕안석은 평소 관복도 잘 빨아입지 않았고, 책 읽으면서 구상에 몰두하다 보면 탁자 위의 벌레를 간식으로 착각해서 집어 먹고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임어당은 그런 왕안석의 인간적 면모를 천재인 척 하려는 부자연스러움으로 읽었다. 왕안석의 행동을 작위스러움, 즉 본능을 거스른다는 측면에서 비판을 했다. 임어당은 개혁보다는 천하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더 중시했고, 그런 관점에서 왕안석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임어당은 싫어했다. 임어당의 눈에 왕안석은 행동이 튀는,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개혁은 튀고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임어당의 이념이었다.
다만 왕안석이 탁자 위의 벌레를 집어 먹는 일화에 대한 이견異見도 있는데, 어떤 학자는 왕안석의 그런 일화는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과장된 소문이라고 말했다.
임어당은 소동파를 사랑했던 문학청년의 모습을 간직한 학자임은 내가 위에서 소개했다. 하지만 임어당이 살다간 시대는 봉건왕조가 깨지고 이념이 대립하던 시대였다. 소동파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 임어당이었다. 임어당의 인생에 대하 좀더 알아보면 단순히 소동파를 사랑했던 문학청년의 모습의 또 다른 면에 있는 임어당을 이해하게 된다.
임어당은 상해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다음 미국의 하버드, 독일의 예나와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가서 언어학 등을 공부해서, 1920년 대 중반 베이징대 교수가 되었다. 그 시절은 봉건왕조인 청이 망하고 각 지역마다 군벌들이 활개를 치던 혼란기였다. 임어당은 중국사회개혁에 열을 올리던 문예운동가, 루쉰에게 영향을 받아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그런 활동때문에 임어당은 베이징대학에서 물러나서 남쪽, 샤먼厦门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는 1930년대 미국 대학의 초청을 받아 해외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중국 고전 번역도 하고 ‘생활의 발견’ 등을 영어로 출간해서 서구권에서 유명해졌다. 이후 1940년대 다시 중국에 돌아오지만 대륙엔 사회주의 운동 열풍이 불고 있었다. 당시 루쉰을 비롯한 대륙의 문학인들은 사회주의 예술관을 받아들여 문학의 목적을 사회 개조의 도구로 보았다. 반면 임어당은 문학은 개인 감정의 표현이라는 예술관을 고수하는 입장이어서 문학을 사회 변화의 도구로만 쓰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1950년 대에 임어당은 중국 대륙에서 일던 거대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회오리 속에서 대만을 택할 수 밖 없었다. 그는 싱가포르와 대만에서 학자로써 활동하다가, 홍콩에서 사망했다. 그것은 마치 구법당 소동파가 신법당의 등쌀에 못 이겨 황주, 혜주, 해남도와 같은 당시에는 문명이 미치지 않았던 미개척 귀양지를 떠돌다가 고향이나 중앙정치에 끝내 복귀하지 못 한 채 죽은 것과 비슷한 삶이었다. 사랑하면 닮는 것일까? 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래의 가사와 같은 운명을 산다는 말처럼 임어당도 결국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 낸 소동파와 어느 면에서 닮은 운명을 살다 갔다.
임어당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생활의 발견’이다. 임어당이 미국에 체류 중에 영어로 써서 서구인들 사이에서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다. ‘유쾌한 천재’를 읽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 한 생각이지만, 임어당이 ‘생활의 발견’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것은 ‘생활의 발견’이 아니라 ‘중국인의 생활의 발견’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