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쑤저우에서 시간 보내기 – 중국어 대피소
13. 쑤저우에서 시간 보내기 – 중국어 대피소
나는 쑤저우에 오면 관광지가 몰려 있는 고성古城 쪽보다는 공업원구에서 숙소를 잡는 편이다. 공업원구는 외국계 공장이나 회사들이 많은 신도시라서 쾌적하고 도회적 느낌이다. 인공호수인 금계호 주변을 드라이브하면 휴양지에 와 있는 느낌도 받는다. 또 택시나 버스를 타고 십 분만 가면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중국 전통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고소성에 다다를 수 있다.
그날 아침, 나는 쑤저우 공업원구의 주택가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수란을 곁들인 빵과 커피, 간단한 샐러드를 먹었다. 빵과 함께 나왔던 소스가 홀랜다이스 소스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브런치 가게라고 할 수 있는데 내부 장식은 서양 느낌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깔끔한 현대 식당이었다. 메뉴는 서양의 아침이나 브런치 메뉴가 주로 보였지만 또우장과 면 같은 중국식 메뉴도 있었던 것 같다. 홍콩식 차찬탱은 아니면서 살짝 비슷했다. 그렇다고 가족들이 몰려와서 오전부터 성찬을 즐기는 딤섬 식당 같지는 않았다. 잡지를 들고 식사하는 사람도 있었고 두세 명의 사람이 앉아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여성들이나 데이트 커플이 많은 한국의 브런치 가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강남에는 청시기에 광둥의 딤섬처럼 아침부터 여유 있게 요리를 먹는 생활방식이 있다고 했다. 딤섬과 차별해서 자오차早茶라고 하는데 당연히 부자들이 즐기는 생활 스타일이었다. 오전에 커피와 케이크가 아닌, 커피나 차에 식사를 즐기는 것은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는데 일요일 오전에 집 근처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중국에서 서양 음식을 먹겠다고 생각한 때는 상하이이나 텐진의 과거, 조계지租界地를 둘러 보면서였다. 조계지엔 20세기 당시에 서양에서 수입한 건축자재로 만든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걸어다니면서 보니 레스토랑으로 쓰이는 곳도 여러 곳 눈에 띄었다. 서양 건물답게 대체로 서양 음식 식당이었다. 결국 나는 텐진의 이태리 풍경가와 상하이의 와이탄 북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와 고기요리를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장소를 즐기는 값까지 포함하여 음식값은 비쌌으나 만족할만한 경험은 되지 못했다. 지금처럼 스마트 폰의 미식美食 앱에서의 평가를 참조할 수 없다 보니 대충 그럴듯한 식당을 찾아갔다가 실패한 예였다.
서울에도 외국인들이 모이는 식당이나 술집이 있듯이 베이징이나 텐진, 상하이에도 그런 술집이 있다. 바bar 분위기의 술집들에선 식사나 안주가 될만한 음식도 팔았는데, 대체로 실내 분위기 등 여러 면에서 나에겐 맞지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공간은 쑤저우에 있었다. 공업원구 쪽에서 봉문 쪽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서면 십전가十全街가 나온다. 십전가 옆으론 운하가 흐르고 옛 건물엔 가게들이 있다. 십전가 중간엔 영어책이 벽장 가득 있고 영어로 말하는 스태프, 커피와 간단한 서양 식사가 있는 ‘북벌레’ 레스토랑 겸 카페가 있다. 쑤저우에 거주하거나 방문한 외국인을 위한 공간이다. 나에겐 중국어 대피소 같다고나 할까. 객지에서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쑤저우에선 예외였다. 낮엔 한참 돌아다니다가도 저녁엔 책벌레 카페에 가서 커피나 맥주라도 마시면서 소파에 파묻혀 여행 정보도 얻고 책도 읽었다. 영어로 조근조근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샌드위치 냄새, 뱅쇼 그리고 생맥주 냄새가 옅게 났다. 쑤저우 책벌레의 소박하면서 고전적인 분위기와 위치만큼 나에게 맞는 곳은 없었다. 처음 갔을 때는 쑤저우 관광을 위한 영어 소책자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중국여행의 시작은 책벌레 카페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영어 소책자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정보가 많지 않은 때여서 나는 영어 소책자로 쑤저우를 알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쑤저우 십전가에 가고 싶어졌다. 이번에 가면 십전가에 있는 망사원网师园에 밤에 들르고 싶었다. 망사원은 십전가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있는 골목에 있다. 쉽게 드러내지 않아서 더욱 매력적인 곳이 망사원이다. 망사원에선 봄, 여름, 가을, 주중 저녁에 수쩌우 전통 평탄評彈 공연을 볼 수 있다. 야외정원에서 달빛을 받으며 작은 호수 너머 무대를 감상할 수 있어서 특별하다. 평탄에 관심이 있지는 않지만 밤의 망사원을 보고 싶었고, 망사원에서 나와서 ‘책벌레’ 카페에 들르고 싶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나서 여행 정보를 뒤적이다가 십전가의 그 까페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 다른 곳으로 이전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쑤저우에 가면 다시 십전가를 지날 것이다. 나는 십전가에서 옛날처럼 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