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강남을 여행한 만주인
5. 강남을 여행한 만주인
홍루몽紅樓夢은 청 건륭제 시절에 조설근曹雪芹이 쓴 작품으로, 중국 4대 기서奇書에 꼽힐 만큼 중국에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나 역시 인생 어느 순간엔가 삼국지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를 책이나 만화로 즐긴 기억이 있는데 홍루몽에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출현한 이유도 있겠지만, 청나라 봉건 생활 풍경을 집대성한 매우 중국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홍루몽은 역사나 무협에서 소재를 찾은 이전의 소설들과 달리 여자들의 활동공간 속에서 소재와 배경을 찾았다. 홍루몽은 남경의 저택이자 장원莊園, 원림园林인 대관원大觀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렸으나, 도덕 관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도덕 안에서 사는 인간, 특히 여성을 그려냈다. 주인공이 등장하는 도입부는 신기한 돌이 환생하여 인간 세상에 오는데, 도교와 불교적인 분위기가 짙어 이전 시대의 작품보다 더 예스러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근대 부르주아 통속소설처럼 청춘남녀의 연애 감정을 이야기한다. 홍루몽 이전에 금병매도 애정 이야기를 다뤘는데 기혼남녀의 성생활 풍속도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다뤘다. 홍루몽처럼 인간과 연애 감정이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대해 섬세한 통찰을 하고 있지 않다. 당시 청나라는 자본주의 산업발달 수준이 높지 않았음에도 조설근은 혼자 창작 능력을 갈고 다듬어서 근대문학 정신을 표현하는 문학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런 문학 업적을 이뤄낸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조설근은 18세기 남경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경에서 태어났으면 남경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그의 집안의 독특한 내력은 그를 남경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나의 머릿속에 그는 ‘강남을 유람한 만주인’이었다. 조설근의 집안은 만주에 살던 만주족이었으며 조부모 대에 청 황실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베이징에서 그의 부모는 황실 업무를 담당하다가 남경에 요직을 얻어 남경에서 부호로 살게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권이 있는 좋은 자리에 최고 권력층이 꽂아 준 셈이었다. 그러니 그 집안은 청 황제의 입김에 따라 흥망이 순식간에 바뀔 수 있었다. 황제의 배려가 사라지자 조설근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고 조설근은 베이징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그는 베이징의 외곽, 향산 아래 동네에서 여기저기 옮겨 살며 가난 속에서 작품을 집필했다. 나는 그가 얼마만큼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자각 속에서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가 중년과 말년에 베이징에서 지낸 것은 타향을 헤맸다기보다는 고향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이징은 만주족의 도시였으니까. 아마도 어린 시절, 남경에서의 부유한 생활은 꿈이었을 것이다. 붉은색 누각에서의 꿈.
조설근에게 남경은 청춘과 사랑, 부유함의 땅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전생의 인연처럼 남경과 엮여 있는 또 다른 도시는 소주였다. 홍루몽의 1장엔 고소姑苏, 소주성을 창문이라고 지칭하고, 창문 밖의 십리, 산당가를 ‘부귀영화와 풍요의 땅’이라고 했다. 홍루몽 작품 속 대관원 역시 소주의 대표적인 원림인 ‘졸정원’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 옛날 땅이 동남쪽으로 기울었을 때, 이 동남지방의 한 귀퉁이에 고소姑苏라는 큰 고을이 있었다. 그 성의 이름을 창문阊门이라 했는데, 인간세상에서 첫째, 둘째가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창문 밖에 십리가十里街라는 거리가 있고 그 안에는 인청仁清이라는 골목이 있는데 골목 안에 한 낡은 절이 있었다. 들어가는 길이 매우 좁은 그 절을 사람들은 모두 호로묘葫芦庙라고 불렀다”
홍루몽紅樓夢 제 1 장 중.
강남에 다녀간 만주족 중엔 청 황제들도 있다. 강희제도 그랬지만 건륭제도 대략 60년의 제위 기간 중에 강남 순방을 여섯 차례 했다. 황제는 순방 중 남경을 지날 때는 조설근 집에 여러 차례 머물렀다고 하니 조설근의 집안과 청 황실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 수 있다. 건륭제는 특히 송명시기에 소금 무역으로 명성을 떨친 도시, 양주揚州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나는 기분이 좀 묘했다. 요녕을 거쳐 심양에 있던 청은 산해관을 넘어 중원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청은 강남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격하여 무너뜨리며 대륙 통일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강남 사람들이 저항하다가 죽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양주성 학살이었다. 명청교체기인 1645년 청군에 의해 명나라 제3의 대도시인 양주성에서 10일에 걸쳐 대학살이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죽은 사람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일반인 왕수초는 당시 자신이 보고 겪은 끔찍한 일을 ‘양주십일’이라는 문서가 기록해 두었다. 이 서적은 청나라 시기 금서禁書였고 양주성에서의 일은 감춰졌다.
어쨌든 청나라가 자리를 잡은 후, 황제들은 강남 순행巡幸을 즐겼던 것 같다. 황제가 다녀간 강남의 도시들엔 흔적을 남겼는데, 쑤저우에도 황제 순행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관전가, 십전가, 한산사 등엔 모두 황제들이 다녀간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건륭제가 관전가 부근의 송학루에서 송서계어松鼠桂魚를 먹고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송서계어는 쏘가리에 칼집을 내어 튀긴 요리로 완성된 요리 모양이 다람쥐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륭제는 항주와 소주의 풍경을 좋아해서 베이징으로 돌아간 후 이화원颐和园에 소주가蘇州街를 만들도록 했다. 훗날 영국과 프랑스 군의 침입으로 이화원과 원명원이 파괴되었을 때 서태후는 이화원 복원에 거액의 국방비를 퍼부어 화려한 모습으로 복구했다.
홍루몽을 작품으로 좋아했다면 베이징 남쪽에 있는 작품 배경을 재현한 ‘대관원’을 찾아가 보는 것이 좋았다. 사진으로 대충 본 조설근 옛집은 베이징 시민도 아닌 여행객이 일부러 찾아가 볼만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겨울이 한참인 2월 오후, 베이징 식물원 안에 있는 ‘조설근 옛집’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베이징 시민들의 가벼운 소풍 장소로 가을 단풍이 유명한 향산은 베이징의 북서쪽이며 이화원을 지나 있었다. 나는 조설근 옛집을 구경한 다음 겨울이니 베이징 식물원의 온실을 구경해 볼 계획이었다.
버스를 타고 먼저 베이징 식물원으로 갔다. 겨울이라 볼 것이 없는 관계로 입장료를 낼 필요가 없었는데 나는 멍청하게도 입장료까지 내면서 식물원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베이징 식물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길을 물어볼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겨울이라 말라비틀어진 화단 식물 외에 볼 것이 없는 식물원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목적지인 조설근 옛집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해는 뉘엿뉘엿 져서 온실도 못 들어가고 조설근 집도 못 찾고 말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향산에 올라 베이징 시내나 내려다보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를 했다. 그런데 나의 중국 여행은 많은 경우 엉성한 계획으로 장소를 못 찾거나, 참관 시간을 놓쳐서 관람을 못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박물관이나 공원 관람 기회를 놓친 것에 비하면 별일도 아니었다. 조설근은 내 마음속의 허상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조설근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채, 홍루몽이 인기 소설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래서 홍루몽이 누구의 작품이냐에 대한 논란이 따라다녔다. 이런 일은 저작권 개념이 확립되기 전의 사회에서 탄생한 작품에 흔히 따라다니는 일이었다. 근세에 홍루몽의 원작자는 학자들에 의해 ‘조설근’이라고 결론이 내려졌지만 후세 연구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기도 했다.
여행을 마치고 향산에 대해서 다시 찾아봤다. 향산은 청나라 시기에는 베이징 외곽의 황실 원림의 일부였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향산 등산코스와 향산공원, 벽운사碧云寺, 마오쩌뚱의 별장인 쌍청연서가 눈에 띄었다. 벽운사는 라마식 탑이 인상적이었고 쌍청연사는 인상적인 것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여러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나는 콕 집어서 ‘조설근 옛집’을 가보고 싶어했다. 이런 유난스러움이 나 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