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Castle 성
4. 캐슬 castle!
만리장성처럼 성벽을 장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성城은 고대 ‘도시’나 도읍지로 이해하면 맞다. 고성古城은 고마을보다 큰 형태이면서 지배세력의 궁이나 업무 공간이 있다. 중국 안에서 유명한 고성은 대도성(북경), 장안성(서안), 동경성(개봉), 리장고성, 핑야오 고성, 쑤저우성, 천주성 등이 있다.
*성벽城壁이 없는 리장丽江 고성
운남은 티베트로부터 이어지는 산이 험준하며 계곡이 깊은 지역이다. 티베트에서 발원한 란찬강, 누강, 진사강이 운남을 지나 흐르는데 란찬강은 베트남의 메콩강의, 누강은 타이와 버마를 흐르는 강의, 진사강은 장강의 상류이다. 강 뿐 아니라 이 지역의 여러 소수민족들의 뿌리는 티베트 족이다. 티베트 족에서 갈라져 나온 이족彝族과 바이족白族은 대리大理에 남조(南詔 653년-902년)를 세웠고, 이후엔 대리국(大理國 937년-1253년)을 세웠다. 남조와 대리국은 티베트의 토번吐蕃국과 협력하여 대륙 내의 당唐을 압박하고 세력균형을 이루기도 했으나 대리국과 티베트국이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할 때는 오히려 대륙 내의 중국왕조들의 공격을 받았다. 대리국은 전성기 시절 당의 십 만 대군의 침입을 맞아 운남 최대 호수인 얼하이洱海호에 칠 만명을 수장시킨 역사도 있다. 대리국은 송宋시기까지 지속하다가 소멸했다.
이후 나시족納西族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해서 리장을 건설했다. 이 시절부터 대륙의 왕조는 운남이나 호남 지역의 소수민족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다스리는 방식 중 하나였던 토사土司 제도로 다스렸다. 그 역사는 토사土司 목 씨의 공간인 ‘목부’木府로 남아있다. 리장은 나시족의 상형문자가 문화로 남아있는 도시이며, 바이족白族, 이족彝族, 리수족傈僳族, 묘苗, 회回, 장藏, 장壮, 보미普米 등의 많은 운남 소수민족의 도시이기도 하다. 리장은 오늘날까지 약 4,000여 채의 전통가옥이 남아 있는데 중국에서 단연 최고의 규모이다.
*제국 수도의 전범典範, 장안長安성
리장이 보기 드물게 과거를 잘 보존된 도시였다면 장안(서안 西安)은 제국의 수도로 중국 및 다른 동아시아 국가 수도 건설에 전범을 제시한 도시였으며, 당나라 시기 세계 최고로 번영한 국제도시였다. 상고시대, 주나라 이후 진한 수당까지 고대국가들의 수도는 관중關中 지역에 있었는데 진秦나라의 수도는 장안의 서쪽 인접 지역인 함양이었다. 이 지역은 중원의 중심에서 보자면 서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견융 등의 이민족의 거주지이기도 했지만, 이런 치우침이 당이 서역과 교역하는 개방성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우리가 아는 장안성을 처음 건설한 사람은 수문제隋文帝였다. 오르도스 지역 북쪽으로 동서로 늘어선 인산산맥陰山山脈의 깊은 땅, 무천武川 집단 출신의 군벌이었던 선비족, 수문제는 전국을 통일한 뒤 수나라를 세웠다. 그는 새 왕조의 기백을 나타내기 위해서 대흥성大興城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건축 업무를 맡은 이는 선비족 공학자이자 도시설계 전문가인 우문개宇文恺였다. 기획도시였던 대흥성은 성벽에는 3각 면에 3개의 문을 만들고, 성안은 바둑판 모양으로 거주지역의 구분하였으며, 남북 중심축을 사이에 놓고 좌우 대칭으로 종묘사직을 배치했다. 또 중심의 주작대가를 중심으로 동시와 서시가 나눠졌다. 당나라 시기에 장안성이 되었고, 당 왕조는 장안석 밖에 대명궁을 건설하였고, 당시 세계 최대 국제도시였다. 그러나 당말 唐末 혼란기에 장안은 반란군에 의해 여러 차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가 새로 변경(카이펑)에 새로 도읍지를 정하면서 장안은 그 영화로운 모습을 잊은 채 지역의 중심도시로만 남았다. 그러다가 명나라 주원장, 홍무제 초기에 당의 장안성을 기초로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남아있는 고대 성곽 건축이 되었다. 주원장은 남경에서 다른 도시로 천도遷都를 마음에 두고 장안성을 다시 쌓은 듯 보이나 결국 천도를 하지 못했다. 이후 명나라 삼대 황제인 영락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기면서 이후 북경이 쭉 수도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춘추시대의 향수가 남아있는 수쩌우성
중국에서도 이천 오백년 전에 지어진 쑤저우성, 혹은 고소성姑苏城 만큼 오랫동안 원형을 보존한 성은 흔치 않다. 물론 춘추시대의 성벽을 그대로 유지해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수한 세월 속에 무너진 곳을 개보수 해왔지만 최초의 성벽 위치와 형태는 유지해왔다. 성안의 길과 거리 분위기 역시 전통적인 풍경을 잘 유지해온 편이다. 현재 쑤저우 시의 중심부에 있는 고소구姑苏區가 옛 고소성 구역이다. 고소성은 대략 직사각형 모양이고 동서로는 3 킬로미터, 남북으로 4 킬로미터 정도이고 성 밖은 해자 물길로 둘러있다. 성의 서쪽 밖엔 항주에서 올라와 진강镇江으로 이어지는 경항대운하가 있는데, 성이 지어졌던 시기엔 대운하가 없었다.
쑤저우는 과거로부터 오吳라고 불렸는데, 오월吳越은 고대부터 그 땅에 살아온 토착민들이 있었다. 실제로 황하강 주변 지역과는 또 다른 신석기 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춘추시대엔 주周 왕실이 보낸 제후가 다스리는 제후국이었다. 그러다가 오나라는 춘추시대 말기, 합려 때에 이르러 강성해졌고, 오나라 남쪽에 있던 월도 비슷한 시기에 짧은 전성기를 누렸다.
쑤저우성은 오왕 합려가 초나라 출신 오자서에게 명하여 건축되었다. 오자서를 중심으로 백비 등 또 다른 초나라 출신 대신들도 성의 건축에 참가했다. 그래서 지금은 흔적도 없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궁성의 모습을 쑤저우 성의 모습에서 추측하기도 한다. .
합려 시기에 중원에 패자 중 하나로 떠올랐던 오나라는 합려의 아들 부차시기에 이웃 나라인 월에 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통일 제국이었던 진한秦漢 시대를 지나 삼국시대가 오호, 쑤저우를 포함한 장강 하류 지역에 다시 오나라가 등장한다. 삼국지 속에 등장하는 손권孫權의 오나라이다. 사람들은 춘추시대의 오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동오東吳라고 부른다. 손권은 역사상 처음으로 금릉金陵, 오늘날 남경을 도읍으로 삼았다. 금릉은 이후 여러 왕조의 도읍지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도 장수성江苏省의 수도이다. 이후 동오는 사마염의 진晉에 의해 멸망 당한다. 중국 역사는 육조시대라는 혼란의 시기를 거쳐 수당시기에 이른다. 이후에 다시 왕조가 바뀔 때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겪지만, 이후에 오호십육국이나 오대십국 시기처럼 작은 나라들이 장기간 난립하는 시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수당 시대를 거치면서 강남 개발이 이뤄지는데, 특히 수양제의 운하 건설은 장강 하류 지역의 발전을 촉진했다.
쑤저우는 흥성과 쇠락을 몇 차례 겪으면서도 여전히 번화했고 구조도 그대로 이어졌다. 비교적 심각했던 역사적 파괴는 진나라 말기와 금나라, 몽골과의 전쟁이 있었던 남송 때였다고 한다. 그래도 성의 도시 건축물들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될 때마다 원래의 자리에 중건되어서 도시의 기본적인 형태에 변화가 없었다. 이는 모두 운하 덕분이랄 수 있다. 이미 형성된 수로망을 기본으로 건물을 중건하는 것이어서 도시 회복이 신속히 되었고, 거리나 지역 명칭은 모두 과거의 것에서 바뀌지 않았다.
이런 설명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당 시대에 소주자사刺史를 역임한 백낙천의 증언이다. 백낙천은 “붉은 난간, 390대의 다리”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송나라 때의 ‘평강도’平江圖에는 359개의 다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당에서 송 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평강도에 새겨진 사당과 전당은 250여 곳이었다. ‘평강’은 송 시절의 쑤저우를 칭하던 말이다. 평강도는 남송 1229년,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가장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돌에 도시의 지도를 새긴 도시 평면도이다. 높이 2.76미터에 너비 1.48미터로서로서, 송나라 당시 쑤저우성의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쑤저우 문묘에 보존되어있다.
송宋 시기를 거치면서 전반적으로 강남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명明 시기에 쑤저우는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했다. 청나라 시기에도 여전히 쑤저우는 번성했으나 청 후반기로 갈수록 서양과의 교역이 빈번했던 남쪽 해안 도시의 부가 중국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갔다. 그리고 청 왕조가 말기엔 쑤저우 동쪽의 상하이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후 상하이 주변지역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상하이라는 거대 도시에 빨려들어가면서 쑤저우는 상하이의 뒤뜰과 같은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쑤저우는 상하이와 베이징을 잇는 철도 교통망 상에 있는 도시여서 여전히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다. 오늘날 인구만 천 이백만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