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글쓰기에 관한 상념
요즘 AI 글을 쓰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음을 실감한다. 나 또한 쳇 GPT를 이용해서 글을 만들어 봤더니 정말 전문가가 쓴 것 같은 글을 만들어주더라. 칼럼이며 에세이며 소설까지 못 쓰는 게 없다. AI에게 물어보니 AI가 쓴 것과 인간이 쓴 글을 AI도 구분하기 힘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럼 글쓰기의 창작도 무의미해지는 것인가? AI가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AI는 일찌감치 인간의 능력을 능가했다. 우리는 AI의 능력을 초월할 수 없다. AI는 제우스와 같다. 신들의 신이다.
하지만 제우스는 다른 신들이 가진 개성을 가지진 않았다. 그리스 신화 속에 수많은 신들은 각자 자신만의 캐릭터를 지니고 있다. 그 고유의 정체성이 그 신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생애 전반에 걸쳐서 서서히 형성되고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개성이 된다. 누군가가 이런 자신의 개성을 일시적으로 베끼고 흉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다.
왜냐? 당신이 AI에게 무언가를 질문할 때마다 모든 영역의 전문가처럼 답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전지전능한 제우스적인 대답을 해줄 것이란 말이다. 당신은 이런 답변을 자신의 것처럼 활용해서 글과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업로드하면서 이익과 명성을 가지려 할 것이다.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이 콘텐츠는 당신이 아니다. 이건 당신의 개성이 사라지는 과정이다. AI에게 대체된 것이다.
독서 모임을 참여하면서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나가는 독서 토론 모임에 참가 전 독후감을 제출해야 하는 원칙이 하나 있다. 그런데 토론 참석자 중에 적지 않은 분들이 AI를 활용해서 독후감을 적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 또한 AI를 활용한다. 나는 자료 조사와 사실 여부 및 통계 등의 자료를 내 글의 논거로 필요할 때 활용한다. 나는 주제를 던져주고 구조와 내용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글쓰기는 나에게 의미가 없다. 나는 글을 쓰면서 사고하고 상상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3D 프린터로 집을 짓는 목수라고 해야 할까. 목수가 아니다. 집 전체의 디자인(외관)과 프레임(구조)을 직접 만들어 봐야지 미적 감각과 구조적 감각이 형성된다. 3D 프린터는 내가 만드는 과정이 없다. 시안과 결과만 있을 뿐이다. 과정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현대인은 이 시간 소모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AI를 활용한다. 스스로가 AI 로봇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모두가 똑같은 로봇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와 그의 두목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어렵네요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저번에 다 얘기하시지 않았나요?”
“네? 제가요?”
그는 나의 질문이 어려웠던 게 아니라 그의 기억력이 나쁜 것이었다. 웃긴 사실은 그가 얼마 전 단독 방에 올린 소설 관련 글귀에서 그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었다. 그것도 아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이다. 나는 그 정도로 디테일한 심오한 생각을 할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왜냐면 오프라인 독서 모임에서 몇 번 그를 만났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의 글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쓴 글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건 자신이 직접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그는 그 사실조차도 잊어버렸다. 아마 AI에게 몇 가지 주제와 질문을 던져서 나온 답변을 자기 것처럼 붙여 넣기를 했을 것이다. 글을 모방하고 베낄 수 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방하고 베낄 수가 없다. 물론 대본을 써놓고 읽는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즉흥적인 토론을 하다 보면 상대방의 언어와 생각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글과 말이 너무 다르다면 그의 글은 그의 것이 아니다.
문체는 성격이다
누구나 단편적으로 혹은 일시적인 영감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또한 AI는 당신에서 아주 완벽한 단편의 글을 순식간에 써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단편은 당신의 문체를 형성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글을 쓴 작가만이 자신만의 문체를 가지게 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몇몇 있다. 그들의 글에서는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그들만의 문체가 있다. 애독자는 그것을 잘 안다. 문체는 쉽게 변하지 않는 작가의 성격이자 개성이다. 그 문체는 여느 글에서나 드러난다. 독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성격의 작가에게 빠져드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성격의 사람에게 끌리는 것과 같다. 오랜 시간 독서를 하다 보면 잘 읽히는 작가의 글이 있다. 나 또한 믿고 보는 작가들이 생겼다. 그들의 문체에 빠져든 것이다. 이야기는 매번 바뀌지만 문체는 바뀌지 않는 법이다.
장편의 갈망
작가는 장편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 AI에게 책 한 권 분량의 장편 소설을 써달라고 할 수도 있다. 이미 시중에는 AI가 쓴 장편 소설도 있다. 하지만 이건 AI가 쓴 것이라고 대중에게 밝힐 수밖에 없다. 왜냐 당신이 AI에게 장편 소설을 써달라고 해서 써낸 소설을 당신은 모두 기억할 수 없다. 당신이 읽어보고 독자로서 기억하는 것과 직접 작가로서 쓰고 기억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작가는 자신의 뇌의 여러 부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생하게 기억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왔다. 작가보다 그 이야기를 더 잘 아는 독자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잘 읽히는 글을 바로 자신이 쓴 글이다.
AI가 써 준 소설은 당신이 직접 쓰면서 느끼는 편도체와 해마 그리고 전두엽이 상호 작용하는 자극을 전혀 받지 않았다. 어떤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인상적인지도 모르며, 전체의 윤곽과 줄거리를 당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다. 당신이 그 글의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편소설과 스토리 공모전은 없어질 수 없다. 잘 만든 장편은 여러 가지 2차(그림) 3차(영상)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원작자만이 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주제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서사와 묘사 뒤에 숨겨진 다른 함의 또한 원작자만이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진 않는다. 원작자가 연출을 하는 경우 그 원작의 느낌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 물론 뛰어난 연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창작 능력과 연출 능력을 다르다. 모든 작가가 장편 서사와 논지를 가진 글을 갈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짧은 단편과 단상을 가진 글은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다. AI는 이런 단편과 단상도 지속적으로 계속 일관된 문체를 가진 체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AI는 모든 문체를 가졌지만 한 가지 문체만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관성 있는 개성을 가질 수 없다. 물론 당신은 누군가 다른 작가의 문체를 선택해서 일관적으로 써달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 그럼 그건 다른 작가를 모방하는 것뿐이다.
AI와 인간의 구분
AI 콘텐츠가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다. 무엇이 AI고 무엇이 인간이 만든 것인지 구분도 힘들다. 모두가 조금씩은 AI의 도움을 받고 콘텐츠를 만든다. AI 협업 비중을 알 수도 없다. 나 또한 AI를 활용해서 영상을 만들고 있다. 원작은 나의 창작이지만 2차 3차 콘텐츠는 모두 AI의 도움을 받고 있다. 지금껏 수십 편의 영상 콘텐츠를 만들었다. 호응이 그리 좋지 않다. 너무 많은 AI 영상 때문에 이제는 AI 영상도 고퀄이 아니면 노출이 되지 않는 시대이다. 전략을 바꿔야 할 때이다. 이제 앞으로 사람들은 진정성 있는 실제의 콘텐츠를 선호하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창작자가 드러나지 않는 의심스러운 콘텐츠에 놀아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다운 것에 끌리기 마련이다.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고 싶지 않다. AI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AI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럴수록 오프라인의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콘텐츠의 선호도가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온라인의 콘텐츠의 출처와 저작자와의 오프라인 만남과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활성화될 것이다. 온-오프라인의 연결과 융합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살아 숨 쉬는 존재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본성을 지녔다. 실체도 출처도 문체도 없는 존재에게 자신(시간과 돈과 몸과 정신을) 내어줄 사람은 없다.
누구나 온라인 천재
누구나 온라인에서는 천재들이고 만물박사들이다. 하지만 오프라인으로 나오면 그들의 모습은 아주 초라해진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자신의 입으로 출력하는 것이 온라인에서 출력되는 콘텐츠와 너무도 대조적이다. 내가 읽기와 쓰기에서 듣기와 말하기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읽고 쓴 것이 아닌 자는 상대방과의 대화와 토론 속에서 자신이 읽고 쓴 것을 말할 수가 없다. 왜냐 읽지 않았고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AI였지 당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당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과거 성인(예수,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들은 글을 쓰지 않았다. 그저 대중들 앞에서 직접 듣고 말하는 방식으로 진리와 섭리를 얘기했다. 그들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즉흥적인 상황에서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 아닌가? 그들의 머릿속에 마치 AI 칩이 심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뭐 우리도 언젠가 우리의 뇌에 칩을 심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그날이 오면 그때는 토론과 대화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다른 생각과 의견과 개성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온라인 세계에는 천재 같은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직접 만나 보라. 생각보다 실망이 크다. 물론 그들은 오프라인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지만...
말은 한 사람의 성격을 대변한다. 말과 글은 크게 다를 수 없다. 글에서 드러나는 문체가 당신의 성격이다. 또한 글은 말을 다듬는다. 글은 생각하고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내뱉을 수 있는 말과 다르다. 글쓰기가 늘면 말하기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당신은 문체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