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속 노을을 바라보며...
코가 막힌다.
한쪽 코가 꽉 막혀 버렸다. 코가 막히면 뇌가 띵해진다. 그 말은 글을 쓸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뇌로 공급되는 산소가 줄어든다. 새벽 4시 반 가장 정신이 맑아야 할 시간에 뇌가 작동을 멈춰 버렸다. 낭패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기 싫었던 이유였다. 봄이면 시작되는 이 지긋지긋한 미세먼지와의 전쟁, 또다시 시작되었다. 호주에서 맑은 공기와 매일 아침 수영으로 회복되었던 비염이 다시 재발했다. 과거 오랜 시간 비염 때문에 적잖이 고생을 했다. 이비인후과도 다니고 좋다는 한방약도 써보고 술도 담배도 끊고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런 노력들로 증상이 조금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먼지가 나의 코를 계속 괴롭혔다. 코가 막히거나 아니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콧물로 고역을 치르는 나날을 보내곤 했다.
"우아! 노을이 너무 예뻐, 봐봐 엄청 붉게 타오르잖아"
미세 먼저 속 붉은 노을
해 질 녘 강변 멀리 떨어지는 노을이 예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 피를 흘리는 듯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던 젊은 여자들이 멈춰 서서 그 노을을 보고 사진을 찍는다.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지금 그들 앞에 보이는 핏빛의 노을은 고통의 붉은색이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자들이 보고 있는 노을이다. 유난히도 붉은 저 노을은 미세 먼지가 모두 삼켜버린 푸른빛 때문에 더욱더 붉게 보이는 것이었다. 6년 전 이 자리에서 봤던 노을은 주황색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핏빛이 되어버렸다. 마스크를 쓴 채로 한쪽 코로만 숨을 쉬며 바라보는 저 붉은 노을은 나에겐 전혀 아름답지 않다.
작년 발리의 해변가에서 봤던 붉은 노을을 기억한다. 그때는 물론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두 콧구멍으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켜며 바라보던 붉은 노을이었다. 그 붉은빛은 열대의 수증기가 삼켜버린 푸른빛 때문에 붉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명하게 붉다. 그 붉은빛이 나의 얼굴에 닿는다. 약하지만 따스한 온기가 부딪치는 것이 느껴진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태양 주변부로 갈수록 주황과 노랑 그리고 멀리 푸른빛이 희미하게 함께 공존한다. 다만 붉은빛이 강해질수록 다른 빛깔들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이건 아름다운 노을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황홀경이다.
미세먼지 속의 노을은 마치 파스텔톤의 붉음이다. 다른 모든 빛은 먼지 속에 산란되어 우리의 눈에 도달하지 못한다. 오직 붉은빛만 먼지 속에 퍼져서 우리의 눈에 도달한다. 이때는 물감이 퍼지듯이 붉게 물든다는 표현보다 가스실에 붉은 가스가 퍼져나가는 장면이 더 잘 어울린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아름답다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제 진정한 아름다움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비슷하게 보이기만 하면 그것이 다 아름다움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현혹되어 그것이 품고 있는 것이 유독한 가스인지 먼지인지도 모른 체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는 그 먼지로 뒤덮인 태양이 난반사되는 붉은 하늘을 보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 며칠째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을 보면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숨 쉴 수 있었던 때가 그리워진다.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코가 막혀 숨쉬기 힘들 거라는 걸 20년 전에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30년 전에는 물을 사서 마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는 공기도 사서 마셔야 할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그 모든 것이 당연했었지만 이제는 당연하지 않다.
미세먼지 – 보통
스마트 폰의 날씨 정보에는 이제 항상 미세 먼지 정보가 함께 뜬다. 하늘은 뿌연데 미세먼지 농도는 ‘보통’이란다. 거짓이다. 이제 국가는 국민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육체적 건강을 위협하려 하는 것인가? 어떻게 이런 뿌연 하늘이 ‘보통’의 하늘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비정상의 정상화인가? 한국의 미세먼지 기준은 너무도 완화되어 있다. 왜냐? 1년 365일 중에 보통인 날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호주의 대기 측정 기준으로 지금 한국의 미세먼지 농도는 나쁨 아니면 아주 나쁨 상태이다. 야외활동 자제를 권고할 기준이 한국에서는 보통이 되어 버렸다.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니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 몸이 그렇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신체 반응은 언제나 솔직하다. 이건 내가 컨트롤하고 단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19가 덮치고 세계의 공장이 멈췄을 때 맑은 하늘이 나타났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생산성을 올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스템은 이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의 생산성(GDP)의 제고가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지만 그 생산성의 향상과 증가는 또한 모두가 공멸하는 길이기도 함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지만 그것이 다 같이 죽는 길임을 알지 못한다. 상대를 밟아야 내가 올라가는 경쟁과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의 방식이 인류의 산업과 문명의 발전 방식이었다. 그래서 인류는 결국 공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주에 발견되는 차갑게 식어버린 혹은 뜨겁게 타오르는 혹독한 환경을 가진 모든 행성들은 모두 오래전 과거 인간들이 살다가 오염시키고 황폐화시킨 결과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렇게 계속 인류가 멸종되고 생성되는 역사가 138억 년 동안 반복되어 온 것은 아닐까?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정말 찰나의 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인류는 영원히 살 것처럼 경쟁하고 전쟁하며 치열하고 잔인하게 살지만 잠깐 살다 행성의 파괴와 함께 소멸한다. 어린 시절에는 봄이 오면 꽃들의 향기를 맡으며 봄을 만끽했지만 이제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다. 며칠 전 산에 오르고 나서 몸이 아팠다. 보통 산을 오르고 나면 몸에 땀이 나고 활력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세 먼지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산을 타며 너무 많은 유해한 것들이 몸속에 축적된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양쪽 코가 모두 막혀버리고 며칠 동안 입으로 숨을 쉬었다. 막힌 코에서 콧물까지 흐른다. 며칠 동안 계속 미세먼지 속 뿌연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코가 막혀서 머리가 띵한 것이 글을 쓰려해도 잘 써지지가 않았다. 계속 코를 훌쩍거리며 음악을 들어도 좀처럼 몰입으로 빠져들 수가 없다.
빨리 이 봄이 지나가고 더워 죽을 것 같더라도 남태평양 고기압의 먼지 없는 공기를 마시고 싶다. 혹여 이젠 태평양 고기압도 먼지를 몰고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더위와 먼지가 합쳐진 여름 날씨는 상상도 하기 싫다. 아름다운 4계절을 가진 한국은 머잖아 지옥 같은 4계절을 경험하는 나라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름다움과 고통스러움 사이
먼지 속 붉게 번져가는 노을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는 길거리의 저 여자들이 차라리 부럽다.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고통인지 모르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데워지는 냄비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는 것이 나은 것일까? 그동안 공포와 불안을 느끼면서 죽어 가는 것보다 그게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냄비 속 개구리처럼 느끼고 있다면 이 죽음은 막을 길이 없다. 나는 다른 세계의 청정 환경을 알아버린 탓에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느낄 수 없음에 고통스럽다. 아름다움과 고통스러움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고통이 될 줄이야. 무지한 자가 쉽게 행복해진다는 진리는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이유를 모른 체 죽어가는 것보다 알면서 죽어가는 것만큼 괴롭고 공포스러운 것도 없다.
내일은 이 먼지가 지나가고 맑은 하늘에 선명한 노을을 볼 수 있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