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 세 번째 -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 니체 [즐거운 학문] 중에서 -
길은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은 어딘가(Where)로 가기 위한 이동과 운송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항상 내비게이션의 최단 거리를 찾고 이동과 운송 거리를 줄여서 최단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건 시간과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걸 경제학 용어로 (기회)비용을 줄이는 행위이다. 비용 절감(Cost reducing)이다.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때문에 우리는 길 위에서 산책과 사색이 아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산책은 하다가 멈춰 서서 사색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동과 물류(운송)가 멈추면 동맥경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멈출 수도 없고 속도는 지치지 않을 만큼의 최고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마라톤과 같다. 목적지까지 최적의 최고의 속도를 유지하며 가야 한다. 현대인들이 사색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매일 산책하며 보낸 여가 시간은 종종 유쾌한 명상으로 채워지곤 했는데, 그 기억을 잃어버려 몹시 안타깝다. 이제 앞으로 떠오르는 명상들을 기록해두려 한다.”
- 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중에서 -
과거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3개월 가량을 시드니 교외의 오래된 2층 벽돌집에 머물렀다. 그곳은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는데 그 집 근처에 숲과 잔디밭으로 이뤄진 근사한 공원이 있었다. 공원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원이었는데 나즈막한 언덕이 있어 운동으로 걷기 좋은 공원이었다. 공원 가운데는 남북으로 흐르는 개울이 하나 있었다. 그 개울을 중심으로 서쪽은 숲이었고 동쪽은 잔디밭으로 되어있었다. 서쪽은 숲의 음지가 동쪽은 잔디밭의 양지였다. 나는 매일 아침 그 공원을 찾아서 산책을 즐겼다. 숲과 잔디밭을 계속 오고 가면서 오디오 북을 들으면서 사색했다. 그때 정말 많은 사색을 즐겼던 기억이 있다. 놀라운 발상 스치고 신기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메모를 했다. 그리고 다시 걷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산책을 이어갔다. 가끔씩은 잔디밭에 노니는 새들을 구경하고 때론 숲 속에 거미줄과 작은 동물들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것들을 관찰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아침마다 1시간씩 공원을 산책하면서 3개월 동안 수십 편의 에세이와 단편을 썼다. 그때 페소아의 글을 읽고 쓴 에세이가 많았는데 그게 얼마 전에 책[페소아리즘]이 되었다.
나이대별 운동
한국에서 지낼 때는 산책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왜 할 일 없이 걷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운동을 하려면 뛰거나 헬스장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거나 짧은 시간에 강도 높은 운동으로 심폐기능과 근력을 강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20대 때는 그렇게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효율적으로 운동했다. 그때의 운동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몸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어깨를 넓히고 가슴 근육과 이두와 삼두근을 키우기 위해 벤치프레스와 아령 운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일단 상체가 좋아야 옷이 잘 받는다.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20대의 운동은 옷걸이를 위한, 즉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보여주기에 운동이었던 것 같다.
30대가 되고 직장 생활을 좀 하다 보니 좁은 실내의 헬스장에 출근하듯 갇혀서 운동하는 것이 갑갑했다. 마치 회사와 학교에 출근과 등교를 하는 것 같이 로봇처럼 퇴근과 하교 후에도 똑같은 패턴의 일상이 지겨웠다. 산을 찾았다. 산 길은 그런 쳇바퀴 도는 운동과는 다른 항상 다른 풍경과 길을 보여주니 지겹지가 않았다. 자연에서 땀 흘리는 것이 훨씬 더 낫더라. 게다가 등산을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더 큰 재미를 더한다. 더욱이 여자들도 끼어있는 산행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운동 후 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운동과 이성과의 만남을 동시에 누리는 효과도 있었다. 이성과 함께 하는 운동은 땀을 흘리며 데워진 몸과 마음이 이성과의 관계를 더욱 자극하고 촉진했다. 일석이조이다. 다만 이성과 섞여서 산을 오를 때는 그 어떤 사색도 불가능하다. 이성에게 눈길과 대화가 오고 가는 상황에 무슨 사색을 하겠는가? 사색이 아닌 사심만 생겨날 뿐이다.
40대가 되고 나니 사람들과 섞여서 하는 운동에서 멀어졌다. 40대의 시작을 한국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환경이 바뀐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때부터 혼자 하는 운동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혼자 사색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혼자 등산하고 산책하고 수영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혼자 몸을 움직이는 시간은 사색이 병행된다. 수영과 등산은 사색과는 멀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수영을 하고 등산을 하면서 사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당신이 수영과 등산을 오랜 시간하고 나서 몸이 그것에 익숙해지고 나면 사색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건 수영과 등산 중에 몸이 웜업(Warm up)이 되고 운동량의 임계점(마라토너스 하이)을 넘고 난 후부터 가능하다. 그 이후에는 몸이 평온한 상태에 돌입하며뇌가 자유로워지며 생각이 가능해진다. 그때부터는 팔다리가 움직이면서 뇌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몸과 뇌가 따로 놀 수 있다. 물속과 숲 속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도심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물속과 숲 속에는 눈을 현혹하는 그 어떤 광고나 인위적인 소리와 자극들이 없기 때문이다. 도심지를 걸으면서 산책과 사색을 즐길 수 없는 것은 건물들 사이로 너무 많은 자극과 유혹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때문이다. 도시는 갖가지 소음과 오고 가는 행인 그리고 차량들로 가득한다.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피해다니면서 걸어야 한다. 위험하다. 도시의 현대인이 사색과 멀어지는 이유이다.
일상의 사색
한국으로 돌아온 후, 다시 도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호주에서의 그런 청정한 숲 속의 공원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뿌연 도시의 삶은 보기만 해도 숨 막히더라. 그래도 어쩔 것인가? 산책과 사색의 이로움을 경험했기에 그것을 놓을 수 없다. 또한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산책과 사색의 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내가 사는 동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강이 있다. 이른 아침마다 강변을 걷고 늦은 오후에는 산에 오른다. 산책 중에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사색하고 산을 오르면서 운동에서 사색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한다. 공기가 좋지 않은 날이 많아 마스크를 쓰고 나가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환경을 탓하고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도 감사할 따름이다. 과거엔 주변에 산과 강이 있는 곳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있어도 그것의 소중함과 유용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더라.
일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니다 보니 일상에 감사한 것들이 많다. 바쁜 일상을 살던 과거엔 일상과 주변이 빨리 지나가야 할 것으로만 여겨졌다. 왜냐? 빨리 지나가야 돈이 들어오고 그 돈으로 더 나은 것을 누리고 지금 보다 더 나은 것들을 욕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상과 주변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몰랐다. 내 집 반경 2~3km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자전거가 있어서 반경 10km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니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더라. 사람들은 수백수천 킬로 떨어진 바다 건너 이국의 풍경과 이색적인 환경 속에서만 그것을 경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휴가 되면 공항은 북새통을 이룬다. 다가올 해외 여행의 며칠을 위해 대부분의 하루를 똑같이 반복하며 반복되는 길 위에 새로운 변화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산과 강과 작은 서점과 동네 도서관 아담하고 조요한 카페,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그 모든 길 위에서 매일 다른 꽃과 풍경과 다른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불어내는 상념들과 그 상념들이 만들어 내는 나의 이야기가 글이 되어 매일매일 피어난다. 이 모든 게 놀라울 따름이지만 과거엔 이 놀라운 것이 바로 주변과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먼 미래와 먼 나라와 먼 목표만을 향해 오늘을 구간 반복하며 살아가는 시간들은 나의 해마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이었다. 그건 그 어떤 감동도 추억도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감동과 추억과 기록을 남기며 매일 새롭게 느끼고 만들고 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산책은 (…)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것입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있는 세계와 연결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니까요.”
-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중에서 -
산책이 삶의 전부였던 한 사람이 남긴 글은 후세에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과 공감을 남겼다. 얼마 전에 나 또한 그의 책(산책자)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소리와 소음 사이] 참조, 온갖 소음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자신을 찾고 내 안에 소리를 듣는 방법은 산책과 사색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모두 산책하고 사색했다. 그들의 사유는 걸으면서 시작된다.
생각이 없는가? 그럼 조용한 곳에서 걸어라.
생각이 피어오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