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미성숙 상태란 자기 자신의 이성을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_1784)」중에서 -
중우정치(衆愚政治)라는 말이 있다. 대중이 무지하면 한 명의 뛰어난 우두머리를 따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건 반대로 무지한 대중은 쉽게 다룰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리석은 군중은 뛰어난 한 명 혹은 소수의 통치자들을 따르게 된다. 그 뛰어난 한 명과 소수가 선한 영향력을 가졌고 윤리와 철학(사랑의 지혜)을 가진 자들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럼 태평성대로 백성들이 큰 불만을 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민중은 삶은 그들의 사익과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독재이다.
민중의 삶이 나락으로 가는데 그들이 호의호식하면 민중은 서서히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 과정이 민중이 깨어나는 과정이다. 나를 읽고 쓰게 만들고 지금의 생각과 태도를 만든 것 또한 세상에 대한 의심과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바로 계몽의 과정이다. 계몽에는 반드시 핍박과 억압이 따른다. 민중이 깨어나는 것을 제압하는 방법은 계엄으로 다루면 된다. 민중은 이미 한 번 그 역사를 경험했다. 역사에서 배우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똑같은 방식을 쓰는 자는 그 자가 더 무지하다는 방증이다. 다수의 똑똑한 민중이 무지한 한 명 혹은 소수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똑똑함과 무지함은 그 둘을 같은 자리에 앉혀 놓고 대화와 토론을 시켜보면 금방 들통이 나게 되어있다. 한 사람의 언어의 한계는 바로 그 사람의 한계이다.
“당신이 따지고 싶은 것에 대해 따지고 싶은 만큼 따져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_1784)」 프리드리히 2세의 답변 중에서 -
민중을 깨어나게 하는 철학자가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다. 그럼 그들을 유혹하기 마련이다. 민중을 이끄는 철학자와 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술책이다. 과거 춘추전국시대 공자 또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각 제후(왕)들에게 조언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자신이 안착할 만한 제후를 만나지 못했다. 정치는 철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친해지기는 쉽지 않다. 공자는 완전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좁혀질 순 있겠지만 하나 될 순 없는 법이다. 현실은 타협의 연속이다. 타협과 이해가 없다면 그건 독재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주의자는 독재자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정치인(政治人)과 정치가(政治家) 사이
우리는 정치를 하는 사람을 보통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그건 우리가 정치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를 잘하는 태평성대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면 정치인은 정치가로 불릴 것이다. 정치인은 한낱 보통의 인간과 다를 게 없다. 일반인이 가진 본성과 습성을 가졌는데 어찌 운이 좋아서 정치를 하게 된 인간이다. 하지만 정치가는 다르다. 가(家)는 집을 의미한다. 정치로 집을 운영하는 자이다. 인(人)은 개인이다. 개인이 나라를 다스리면 어찌 되는지 우리는 과거 역사를 통해 여실히 경험했다. 국가(國家)도 하나의 집이다. 집을 다스리는 자는 가정 구성원의 행복과 안전을 모두 책임지는 자이다. 국민이 바로 구성원이다. 자국민을 국가의 적으로 만드는 자가 정치를 하면 그건 정치인이다. 한국에는 정치인만 득실댄다.
“제가 기존 종교를 동요시키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철학의 자유가 어떤 한계 내에서 억제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673. 3. 30]”
- 스피노자 (1632~1677)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중에서 발췌 –
스피노자 역시 국가의 통치자와 당시의 종교였던 개신교(칼뱅주의)로부터 회유를 받았던 모양이다. 민중을 깨우치는 철학이 정치와 부딪치는 것은 정치와 종교가 항상 부패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부패할 틈이 없다. 왜냐 철학자는 먹고 마시고 노는 시간보다 읽고 사색하고 쓰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다. 철학자가 먹고 마시고 권력과 유흥을 쫓는다면 그들은 철학인 일 것이다. 취미 삼아 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 속에 그런 철학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철학자는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다.
“국가의 목적은 자유다”
- 스피노자 –
국가는 국민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물론 자유는 권리지만 책임도 따른다. 그 책임은 국민 개개인이 그 자유의 권리를 보장받기 돈을 내는 것이다. 세금이다. 버는 만큼 낸다. 많이 버는 사람은 그 나라의 국민들의 인기와 도움으로 더 많은 돈을 가지는 것이기에 좀 더 내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국가이다. 국가의 구성원은 가족이다. 대가족이라서 일도 많고 문제도 많기에 좀 더 많은 정치가와 공무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대가족을 운영하기 위한 유료 봉사자가 바로 정치가이고 공무원이다. 그들은 개인보다는 공인에 가깝다. 그런 공인이 개인처럼 행동하면 국가는 망해간다.
“가로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 [마태복음] 22:21 -
과거 예수는 예루살렘 민중과 로마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로마 통치하에서 부당한 세금 갈취에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건 당시 로마의 군대가 너무나 강력했고 힘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으며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당함에 대적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지만 현실과 이상을 분리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핍박과 박해에 속에서도 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통치자에게도 민중에게도 모두 최선의 선택이다. 민중과 군대가 피를 흘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예수는 결국 그 둘 사이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고귀한 것이다.
지금은 고대 제국 사회도 중세 봉건 사회도 아니다.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이다.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인 시대이다. 예수가 살던 시기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많은 민중이 깨어났고 다수를 이루었다. 카이사르 같은 절대 권력은 용납할 수 없다. 의회 정치이고 직접 민주제이다. 지금 현실의 절대 권력 복종하라는 저 성경 구절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카이사르도 하나님께로”
단순 무식한 카이사르가 지혜로운 다수의 민중을 이끌 수는 없는 것이다. 민중은 이제 지혜로운 사람을 고를 능력을 갖추었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의 문제는 그 자의 언행과 태도 그리고 삶을 보면 된다. 만들어진 것이 아닌 본래의 것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것이 어렵다. 가짜 정보와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래서 국민은 더 깨어나야만 한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한복음] 13:34 -
기만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사랑을 품고 있어야 한다. 철학(Philosophy)은 사랑(Philos)과 지혜(Sophy)의 합성어이다. 사랑을 지혜롭게 가르친 자가 바로 예수이다. 그는 사랑만이 해답이라고 말했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법정에서 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엄으로 계몽되었다’고. 그 계몽은 말 그대로 개몽(개꿈, 夢)이 아니었을까? 그 자의 말장난 같은 표현은 결국 그 자의 무지를 드러내는 형국이 되었다. 계몽(啓蒙)은 절대 강압과 무력의 위협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은 스스로 되는 것이다. 그 자는 법전만 잘 외워서 법조인인 된 모양이다. 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이다. 언어의 한계가 자신의 한계이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
나는 그가 임마누엘 칸트보다 지적이거나 지혜롭다고 생각할 수 없다. 계엄(戒嚴)으로 계몽(啓蒙) 된 역사는 없다.
당신은 동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