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그대가 이겼다. 오 창백한 갈릴리인이여.”
-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중에서 –
창백한 모습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심각한 출혈이 생기면 얼굴이 창백해지기 때문이다. 갈릴리는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다. 그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이 박혀 창백하게 식어갔지만 그는 결국 승리했고 그 승리의 영광은 후세에 그를 추종하던 자들이 누리게 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산 자들이 죽은 자의 말을 대신할 뿐이다. 그래서 확인할 길이 없다. 죽은 자가 원했던 모습인지 아닌지… 율리아누스는 그 창백한 승리자의 영광을 다른 자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창백한 승리자가 남긴 영광에 취한 자들은 그를 살려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배교자가 되었다.
줄리언 반스, 영국 문학계의 거장이다. 처음으로 그의 책을 접했다. 이 책도 독서 모임을 통해 읽게 되었다. ‘이동진’이라는 한 명의 평론가가 한국 출판계와 문화계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내가 속한 독서모임의 장이 그의 찐 팬이다. 그를 향한 팬심이 선정한 책이었다. 이동진은 문학을 하지 않지만 문학계에 영향력은 문학인보다 더 큰 존재가 되었다. 이건 작가와 독자 세계의 힘의 균형을 이뤄가는 것이라고 봐야 할까? 그도 문학평론(독자)과 영화 평론(감상자)에서 입지를 키워 이젠 문학인(출판계)과 영화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소비자이면서 또한 생산자이고 또한 유통업자이다. 요즘은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유통(쿠팡?!) 이 큰 힘을 가진다.
내가 속한 독서 모임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추천한 책이 독서 모임에서 자주 나타난다. 물론 읽고 나면 대부분 후회는 없다. 다만 내가 도서관 서고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다가오는 놀라움은 없다. 내가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만났을 때처럼. 이건 인연(관계)을 통해 이어진 만남이다. 다만 이런 인연을 통한 독서는 뒤에 이어질 독서 토론에서 얻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어떻게든 읽어 낸다. 읽고 나니 놀랍고 또한 어지럽다. 그건 또다시 내 머리 안에서 두 세계의 충돌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유대 땅의 이 어정뱅이들이 내놓은 것과 그리스인을 비롯한 ‘이방인’이 세상에 준 것을 비교하여 제시한다.”
-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중에서 –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태어난 로마인이다. 그는 기독교를 믿는 어머니 아래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배우고 자라난 자이다. 말 그대로 기독교 모태신앙이다. 하지만 그가 자라나던 시기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초기 기독교의 외경들과 다른 밀교 그리고 그리스 문명(헬레니즘)의 수많은 기록들을 접했던 모양이다.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이교도들의 가르침을 모두 깊이 이해해 가는 과정을 거쳤고 그는 이교도들이 가진 이점들과 철학적 관념에 크게 매료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선포한 기독교(아리우스)의 교리가 다른 기독교가(아타나시우스)의 탄압을 멈추고 그들을 옹호하고 또 헬레니즘(고대 그리스 문명) 문화를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그것이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수백 년간 핍박과 박해를 받으며 이제 막 기독교가 꽃피운 세상이었다. 유럽 전역이 신과 하나 된 창백한 갈릴리인의 십자가로 도배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웬 족보도 없는 이상한 황제 하나가 나타나 그것을 다시 무너뜨리려 하니 기독교인들은 분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율리아누스는 과거처럼 기존의 기독교를 탄압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철학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의 육체는 항상 금욕과 절제의 기독교적 삶을 살았고 그의 정신은 다양한 세계가 공존하는 이교도적인 세계를 살았다. 그는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묶어둔 당시 기독교의 행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관념에서 승리할 수 있지만, 관념은 총구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짜로 이기는 일이 거의 없죠 (중략…) 진실은 승자에게로”
-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중에서 -
창백한 갈릴리인은 항상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의 첫 번째 계명이었다. 사랑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그 사랑은 폭력이 되었다. 그가 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폭력이 동원되는 부조리와 모순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랑의 매질’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해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 창백한 갈릴리인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모태신앙인 친구는 장로 아버지의 매질이 무서워 교회에 개근하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그도 교회에서 벗어났다.
평화롭던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도 결국 무력 앞에 모두 무릎 꿇어야 했다. 정신적으로 가장 고양된 정신과 철학을 꽃피운 그리스 문명이 역사의 무대에서 그렇게 빨리 사라진 건 결국 문명의 발전은 정신의 발전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 정신문명이 무력에 짓밟히는 일은 허다하다. 그렇다고 그 정신이 사라지진 않는다. 더 강해지고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정신이 남긴 것은 육체가 죽어도 전승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똑똑한 인간을 죽이고 있네?”
- 베르나르 베르베르 [고양이] 중에서 -
무지한 인간들로 채워진 국가에서 모든 개인이 똑같은 권리를 가지게 되면 생기는 현상이다. 무지의 한 표와 지혜의 한 표가 동등한 힘을 발휘하는 사회는 무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이런 무지한 다수의 시민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유혹하고 선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면 된다. 분노와 혐오의 감정들은 그들의 이성과 지성을 마비시킨다. 그것이 마비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단련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고대 시민 사회에 개개인은 모두 정신적으로 고양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타민족의 무력 앞에 무릎 꿇은 것은 물질문명(무력, 화력, 과학)이 정신문명(철학, 문학, 예술)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리스 아테네 문명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시민사회 밑바탕에 강력한 노예의 노동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강한 해군력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시민도 노예처럼 무지한 무력을 행사하는 타국에 짓밟힌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BC431) 정신은 물질에 의해 그 정신은 가진 존재들 없애버린다. 하지만 그 정신은 무형의 힘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의 힘은 그때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힘은 영생한다.
배교와 회심
율리아누스 황제는 그 보이지 않는 다양한 힘을 믿었다. 모두가 하나의 힘을 볼 때 그는 다양한 힘의 조화를 보았다. 그것이 로마제국을 더 풍성하고 다이내믹한 세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신과 철학에 관심을 가진 그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가 비록 배교자로 낙인찍혔지만 그의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모든 혁명은 성공해야지만 진리와 진실의 왕관을 쓰게 된다. 기독교의 영광을 살아서 누리는 자들은 그것에 취해 그 영광을 내려놓기 두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상대를 죽여야만 했다. 예수는 사랑하라고 했는데 십자가를 앞세워 전쟁을 한 것이 기독교 아닌가? 십자군 전쟁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총칼을 들고 원정을 가지 않았다. 예수는 한 번도 무력으로 전쟁을 도모한 적이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본 적도 없는 자였다. 그는 고대 유대 율법을 따르던 유대교의 신봉자였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예수의 가르침을 알리러 이곳저곳을 떠돌려 핍박받던 기독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쳤다. 그는 기독교에서 ‘회심의 바울’로 잘 알려져 있다. 회심과 배교 너무도 다른 느낌의 두 단어가 비슷한 행위를 한두 사람의 전혀 다른 결과물이다. 똑같이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지났지만 누구는 배교자가 되었고 누구는 회심자가 된 것이다. 이건 한 가지 관점에서만 나의 세계로만 상대를 판단하고 정의하는 사고가 많든 결과이다.
사랑하지만 관용은 없다.
기독교는 과거 위대한 갈릴리인이 죽고 오랜 세월 핍박과 억압의 세월을 이겨냈다. 그래서 이제 다른 종교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것인가? 받은 대로 대갚음해 주는 것인가?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외쳤던 그는 복수를 말한 적은 없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 [마태복음] 5:39 -
왜 기독교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지탄을 받는가? 기독교의 성지였던 서유럽은 이미 탈 기독교화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무지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기독교인들밖에 없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투덜대는 사람 같다. 당신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면 그들이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 하지만 자신은 발을 떼지 않고 상대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창백한 갈릴리인은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을 자신의 건물 안으로 데려오려고만 한다. 반대로 행하고 있다.
“교회에 일신적이고 억압적인 면이 덜했다면, ‘우리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의 추방이 없었다면, 브리튼 사람들은 더 자유롭게 섞였을 것이고, 다른 인종 간 출생은 정산이 되었을 것이고, 백색은 우월의 지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중에서 -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그 갈릴리인의 말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 아닌가? 창백한 갈릴리인은 신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자신을 종교로 경전으로 못 박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모두를 사랑하라고 했을 뿐이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는 항상 미움과 혐오가 스며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진공의 감정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당신이 득도한 수도승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배교라는 말은 이미 혐오와 분노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은 보지도 듣지도 않고 그냥 배척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런 자들을 죽이고 없애려 한다. 이것이 그 갈릴리인이 피를 흘리며 원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너와 엘리자베스 핀치의 관계를 짧게 묘사하라. ‘그녀는 나에게 조언하는 벼락이었다.”
-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중에서 –
소설 속 주인공이 우러러보는 스승, 엘리자베스 핀치는 마치 여자 제우스 같다. 제우스의 상징이 바로 벼락(번개)이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상징이다.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과 그리스 문명의 부활을 도모하는 스승의 부활을 마치 예수의 부활과 동일시하려는 듯 보인다. 기독교가 오랜 시간 세계를 지배하는 동안 벌어진 인류 역사의 타락을 다른 문명의 부활로 회복하려는 것일까? 소설은 이야기 형식을 빌려 세상의 종교와 철학의 메타노이아(회심 or 배교)를 꿈꾼다.
당신은 어떤 메타노이아를 꿈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