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나는 세존 고타마, 부처이자 석가모니인 그분의 제자로, 동료 승려들과 함께 순례를 하다가 위험한 곳에 누워 잠든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다_문학동네] 중에서 –
싯다르타의 친구였던 고빈다는 고타마를 따라 순례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피골이 상접한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홀로 수행 중인 모습을 발견했다. 너무도 야위고 수염이 덥수룩해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고빈다는 위험해 보이는 그를 깨우고 다시 고타마를 따라 길을 재촉한다. 싯다르타는 홀로 침잠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려 했고 고빈다는 멘토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둘은 같은 곳(구도)을 갈망했지만 서로 다른 방식의 길을 선택했다. 하나는 인간(멘토)을 통해 또 다른 하나는 만물(우주)을 통해서 구도의 길을 찾으려 했다.
둘로 나누다
고타마와 싯다르타는 하나의 인물이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의 이름이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그런데 헤세는 이 부처의 삶을 허구를 덧씌워서 소설을 썼다. 그 시작이 바로 부처를 둘로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고타마와 싯다르타를 둘로 쪼개 버렸다. 그것이 이 소설의 설정이고 이 설정을 통해 헤세는 둘로 나눠진 세상을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둘로 쪼개진 세상을 통합하려는 이룰 수 없는 희망을 품었다. 그 꿈은 위험한 것이었고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데미안에서 싹튼 내면의 세계가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세계와 충돌했다. 데미안이 알을 깨고 나온 내면의 자신을 대변하는 소설이었다면 [싯다르타]는 자신(세상이 규명한)이라는 알을 깨고 나온 새로운 자아가 맞닥뜨린 세계와 충돌하는 것을 그린 소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선교사의 집안에서 자라난 헤세는 기독교의 가풍 속에서도 그들의 가족이 인도에서 선교를 했던 덕분에 인도에서 온 문물들을 접하게 되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를 운명을 맞이한다. 우파니샤드, 베다 경전 그리고 중국의 도가 사상까지 접하게 된 헤세는 아마도 자신이 속한 기독교의 세상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의구심은 탐구심이 되었다. 탐구심은 상상을 품고 글이 되었다. 상상은 꿈을 품게 마련이다. 그 꿈은 세상의 종교를 통합하고자 하는 위험하고도 허망한 꿈이었다. 이미 2000년가량을 각자의 독립된 길을 걸어온 동서양의 종교를 통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건 마치 천동설을 믿던 세상에 지동설을 얘기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도 같다. 다행히 헤세는 학설이 아닌 소설 속에 담아내었기 때문에 종교 재판을 받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학설을 철회해야 했다. 갈릴레이가 소설가였다면 그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진실(팩트)을 말하는 선구적인 학자는 그래서 위험하다. 거짓(허구)을 말하는 소설가는 그래서 자유롭다.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증명할 이유도 없다. 다만 소설가의 자유는 고독과 궁핍을 감수해야만 한다. 학설의 자유는 그 반대이다. 학설이 증명과 논거를 통해 입증되면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
고타마와 싯다르타 사이
헤세는 고타마(부처=석가모니)와 싯다르타 사이에 ‘고빈다’를 배치한다. 싯다르타의 친구이자 진리를 구도하는 동지이다. 고빈다는 구도(求道)를 위해 당대의 가장 유명한 고타마의 길을 따라 떠나고 싯다르타는 홀로 숲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헤세가 기독교와 불교의 두 가지 길을 묘사하고자 한 것이라 생각한다. 고타마는 예수와 동일시된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진리와 천국에 도달할 수 없다. 오로지 예수를 통해서만 오메가(Ω, ω, 그리스어: ωμέγα)를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신이 되어야만 한다. 인간을 통해 진리와 영생(깨달음)에 닿는 것은 고타마의 길과 다를 게 없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요한계시록] 22:13 -
여기서 '나'는 바로 예수이다. 예수가 시작과 끝이다. 그건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음이다. 그리고 헤세는 예수를 고타마에 투영했다. 그럼 고빈다는 예수의 첫 번째 제자 베드로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빈다는 스스로 득도와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봤다. 스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결코 타인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 타인의 존재는 구도(求道)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홀로 침잠하고 자신 안에서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위대한 발견과 혁신은 결국 한 사람의 머리에서 이뤄진다. 칸트와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철학자와 과학자도 누가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의 배움 중에 타인이 영감과 도움이 되었을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가 찾아낸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내가 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빈다는 계속 ‘고타마’에게서 답을 구하려고 한다. 이건 예수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예수에게 답과 기적을 구하려는 모습과 닮아있다. 예수는 그런 제자들에게서 지칠 때면 홀로 산에 오르고 광야로 나아간다. 홀로 침잠하며 충전해야 한다. 이건 마치 I(Introvert) 형 인간이 사람들 속에 있으면 기가 빨리는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제자들은 배움과 기적을 얻으면 더 많은 배움과 기적을 고타마에게 의지하게 된다. 이건 종속관계이다.
흑과 백
인간은 스승이라는 알을 깨고 나가야 하지만 주는 먹이가 편하고 익숙하다.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최근에 본 영화 [승부]가 떠오르지 않는가? 조훈현(스승)은 자신이 온 길을 제자(이창호)에게 강요한다. 이창호는 갈등한다. 스승이라는 알에 갇혀 고통받다가 결국 자신이 그 알을 깨고 나오기로 결심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큰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며 힘들고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을 견뎌야 하는 길이다. 그가 스승을 깨고 나오지 않았다면 이창호라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은 도움이 되는 존재이며 또한 방해가 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둘은 상호보완적이고 또한 상호 대립적이다. 스승이며 또한 적군이다. 흑(어둠)과 백(빛)은 항상 존재하며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는 것이다.
고빈다가 속한 고타마를 따르는 수행 집단은 예수를 앞장 세워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제자들의 집단과 닮아있다. 예수라는 신적인 존재가 가져다주는 믿음과 자부심이 그들의 야망과 욕망을 불러왔다.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의 새로운 왕이 되길 바랐다. 이건 모세가 가나안 땅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구약(출애굽기)의 얘기와도 맞닿아 있다. 신은 모세와 그와 함께한 1 세대의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1세대의 부모(스승)들이 모두 죽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세대들이 가나안에 입성한다. 이건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지혜를 전하는 이야기이다. 옛것에 얽매어서는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교회에서 어떻게 전달되고 알려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한 개국 공신들은 예수를 앞에 세워 내각을 형성하는 내각 대신의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들이 정말 진리와 천국을 갈망했다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어야 했을 것이다. 모두가 예수를 배신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길을 택했다. 물론 예수의 부활로 제자들은 뒤늦게 복음을 알리기 위해 각자 독립적으로 순교의 길을 걷는다.
헤세는 성경을 너무도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선교사 집안에서 자랐다. 그의 머릿속은 동양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도가 사상이 성경 속 이야기와 뒤섞여 하나의 허구를 만들어 내었다. 이 허구는 너무나도 많은 서양인들이 읽었다. 헤세는 서양에서 동양의 사상을 가장 널리 알린 인물이 되었다. 소설은 너도 나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전문 서적이나 학술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 대중을 더 많이 일깨우고 깨닫게 하는 매체라 볼 수 있다. 다만 진실이 아니기에 왈가불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서 전해진다.
나 또한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내가 궁금해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것을 또 다른 누군가도 이미 150년 전에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 서구는 탈 기독교화 되어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그 자리는 카페와 술집 아니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있다.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서양인들이 타락해서 그렇다’라고 과연 그런 것일까? 타락한 인간들이 교회를 떠나간 것일까?
나는 모른다. 그들을 모두 만나서 이야기 나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유럽의 시민들은 적어도 한국인들보다는 더 많이 책을 읽고 사색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처럼 이토록 숨 가쁘게 살지도 않는다. 한국처럼 야식과 각종 먹거리로 넘쳐나는 일상을 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누가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없다. 그건 삶은 계속되고 옳고 그름이란 영원히 판명 나지 않는다는 것이 싯다르타가 말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색할 줄 압니다. 나는 기다릴 줄 압니다. 나는 단식할 줄 압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_문학동네] 중에서 –
한국인이 가장 하지 못하는 것이 싯다르타의 가장 큰 세 가지 자랑거리였다. 곳곳에 눈을 현혹하는 간판과 광고들로 둘러싸인 빌딩 숲은 사색을 방해하고 가장 빠른 당일 배송의 쿠팡과 초고속 인터넷(5G) 그리고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떠나는 서양인들이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자와 한 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가 너무도 궁금해진다. 나는 호기심과 질문으로 충만해 있다. 그것을 풀어낼 곳이 없어서 여기에 계속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식과 기다림 그리고 사색을 하는가? 혹시 과식과 분주함과 자극과 흥분 상태를 쫓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단식과 과식, 기다림과 분주함, 자극과 사색 사이를 살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가 없다. 왜냐? 이곳은 그렇게 살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고타마와 싯다르타 사이에서 고민한 ‘고빈다’는 헤세의 고뇌가 만든 인물이 아닐까? 나 또한 소설을 읽으며 헤세의 고뇌를 잠시나마 느껴본다.
당신은 무엇이 느껴지는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