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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교양인 사이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by 글짓는 목수

"깊이와 넓이는 서로 대립한다. 깊고 넓게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순이다. 넓게 읽으면 반드시 얕아지고, 깊게 읽으면 반드시 좁아진다."


- 야마구치 슈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중에서 -


관계는 좁고 깊게 지식은 넓고 얕게 가져야 한다. 관계는 에너지 소모가 크다. 그건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것들이 엮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분주하게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관계가 많다는 것은 당신이 가진 역할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역할이 많아지면 책임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이 비즈니스를 한다면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 돈은 당신이 버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사람들이 벌어다 주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맨은 넓고 얕게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의사와 판사

지식은 그럴 수 없다. 과거엔 좁고 깊은 전문 지식이 돈과 명예를 가져다주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전문가가 되려 했다. 배우자의 일 순위도 전문직 남성과 여성이었다. 왜냐 전문가는 잘 먹고 잘 사니 까이다. 결혼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오죽하면 '결혼시장'이라고 말하는가? 나와 너는 결혼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고 상품이었다. 결혼 정년기 때까지 상품의 가치를 올려놓지 않았다면 당신은 가치 있는 상품을 고를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좁고 깊은 지식과 기술을 가진 전문가가 되려고 발버둥 쳤다.


이젠 전문가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전문가들이 만들어 온 세상은 너무도 냉혹하고 잔인하게 변해버렸다. 풍족함을 넘은 과욕이 서로를 물어뜯는 세상을 만들었다. 전문가는 전문가가 아닌 자들을 무지하다며 가르치려고 들었고 우리는 모두가 전문가의 말만 듣고 따라왔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전문가가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비전문가들을 상품(재화)과 이익 창출의 대상(소비자)으로 이용해 왔다. 사람은 옆에 오래 두고 사귀어 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전문가는 옆에 오래 두고 사귀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필요할 때 잠시 만나는 이해관계일뿐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목장 모임

나는 오랜 시간 한 부부의 가정을 방문하며 식사를 함께 했다. 두 남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하나 둘 셋 낳으며 그 긴 시간을 지켜봐 왔다. 사실 그 두 남녀는 나를 변화시킬 그 어떤 전문지식도 부도 명예도 가지지 않은 그저 평범한 아니 어찌 보면 안타깝고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 커플이었다. 혈혈단신 타국에 해외이주 노동자로 영주권도 없이 서로에게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부부였다. 그럼에도 둘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둘이 바라보는 것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사랑했고 그 사랑은 한 방향을 보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랑은 식으면 변하지만 믿음이 굳어지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 믿음은 같은 소망을 가진 자들에게 생겨나는 것이다. 그 두 남녀와 거의 5년 동안 함께 매주 밥을 먹으며 지켜봤다.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나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 [고린도전서] 8:1 -


지식은 절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넘쳐나는 지식 정보 사회에 깨친 사람은 없고 전문가만 넘쳐나는 이유이다. 삶은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서로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삶을 보며 그 삶을 강요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다른 것을 보고 그 안에서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그들은 그 다른 것에서 나와 다른 무엇을 보고 느끼고 가졌는지는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부부의 가정을 지켜보며 가족의 소중함과 믿음의 소중함 그리고 삶은 돈으로 지탱하는 것이 아닌 사랑과 믿음이 더 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도 누군가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이겨낼 수 있고 견뎌낼 수 있다. 이건 마치 전쟁터에 떨어진 두 전우와도 같다.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다.

교양 독서

"지식이 지혜가 되려면 지식이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지혜가 되는 것이다.

지식+삶=지혜’이다.”


모두가 지식 박사가 되려고만 한다. 그건 세상이 자격증과 학위와 직함과 지위 있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중의 관심은 인기이고 인기는 사람을 모으고 사람이 모이면 돈이 모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혜를 가진 교양인이 되려기 보다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선호한다. 전문가는 결국 교양인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현실 사회는 뜨거운 피와 땀이 아닌 차가운 돈과 지식으로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은 먹고사는데 필수지만, 타인과 대화할 때는 그다지 쓸모가 없다.”

-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중에서 –


과거 독서 초보 시절 처음 접했던 채사장의 [지대넓얕] 시리즈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는 어찌 책 이름도 그렇게 잘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말하는 얕고 넓은 생각은 바로 교양이었다. 아마도 그는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10년 전에 깨달았던 모양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12

최근 정치인과 전문가들의 토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들은 지식과 팩트로 상대방을 짓누르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상대를 이김으로써 얻는 승리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부와 권력은 그들을 근시안의 좁고 편협한 인간으로 만들어 간다. 논쟁으로 이겨서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전문가들은 모두가 부처와 예수가 될 것이다. 논쟁은 적의와 미움과 혐오만 낳을 뿐이다.


편을 가르고 나누고 대립하는 구조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편을 만들고 무리를 만들기 위함이고 방향이 같은 무리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한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인류 문명의 발전 방식이다. 또한 사피엔스의 본성이다. 이건 부처와 예수가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가 죽은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무리를 거느리고 힘을 가진 자들에게는 위협이다. 기득권을 무너뜨리려는 자는 그래서 피를 본다. 급진적인 혁명이 항상 피를 부르는 이유이다.

대선 토론?! 논쟁!?

저변의 교양


“다 뒤집어엎어야 한다니깐요, 이 망할 노무 세상, 안 그래요?”


얼마 전 대화 중에 정치 얘기가 나와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좋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정치와 종교 얘기는 한국에서는 금기 주제이다. 좋던 사이도 한순간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정치와 종교 이야기이다. 왜 그런 것인가? 그건 정치와 종교가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나의 밥벌이(현실)를 대변하고 종교(이상)는 나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하고 침해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때문에 색이 다른 정치인과 종교인는 서로 한자리에서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무슨 소리를 해도 그 의미를 곡해해서 듣기 마련이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감정이 실린 격앙된 말투는 이미 그 자가 반대의 생각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토론은 항상 차분하고 평온하며 위트와 유머가 함께 있어야 한다. 요즘 독서 모임에서 토론을 자주 하다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독서 토론 모임에는 반드시 이것에 능한 자가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당신이 뭔데, 내 말을 끊는 건데요. 당신이 뭐 대통령이라도 됩니까? 뭡니까?”


열변을 토하는 자를 막을 방법이 없다. 누군가가 하던 말을 끊어먹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왠지 모르게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듣는 사람만 괴롭다. 그런 사람은 그 사람에게 자신이 말하고 있는 모습을 녹화해서 보여주고 싶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청자의 반응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프라인의 모임은 서로 눈빛과 표정을 보면서 얘기를 한다. 화자가 여러 청자를 보면서 말을 할 때 청자들의 눈빛과 표정을 확인해야 한다. 의미 있는 소통은 서로의 눈빛과 표정이 교류하면서 이뤄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표정이 굳어가고 눈빛을 외면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토로나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이다. 모두가 각자 소중한 개인의 시간을 할애해서 온 자리에 누가 타인의 자기 자랑과 토로를 듣고 싶겠는가? 만약 돈을 받는 상담사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말이다. 토론은 상담이 아니다.

소통과 교류, 예수와 부처

(일방의) 소통이 아닌 교류


토론이 논쟁이 아닌 그리고 상담이 아닌 수평적이고 모두에게 의미 있고 흥미로운 시간이 되려면 서로 교감하고 교류하는 양방향 소통이 필요하다. 문제는 모두가 그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 그런 능력을 기르기 위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올바른 토론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권한을 가진 자가 필요하기도 하다. 과거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 예수와 부처는 그들을 중재했다. 그것 또한 가르침이었다. 스승은 제자들을 분리하고 나누는 자가 아니라 함께 하고 통합하는 자이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자가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 진정한 스승과 교양인은 통합과 조화를 지향하는 자이다. 전문가들은 자기들만의 조직(협회, 단체)을 만들지만 교양인들은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는 오픈된 광장으로 향한다. 과거 소크라테스가 매일 아고라 광장으로 나갔듯이…


사회는 전문가와 교양인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교양인이 많으면 사회는 따뜻해질 것임은 분명하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

야마구치 슈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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