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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대설 사이

[비밀 문장] 박상우 - 두 번째 -

by 글짓는 목수

“나는 대설 우주를 압축 반영한 소설이다.”

- 박상우 [비밀 문장] 중에서 –


소설은 왜 소설일까? 소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소설(小說)의 한자 뜻을 뜯어보면 작은 이야기이다. 그럼 그 반대말은 큰 이야기, 즉 대설(大說)이 된다. 이건 동양에서만 통하는 의미이다. 왜냐 영어로 소설은 Novel 혹은 Fiction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에는 이런 작은 이야기나 큰 이야기라는 의미가 없다. Novel은 라틴어 ‘새롭다’는 의미의 Novellus라는 단어에서 기원했으며 fiction도 ‘꾸며내다’라는 라틴어 fictio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소설의 기원이 품고 있는 의미는 동서양이 다르다.

대설과 소설 = 범아일여 (梵我一如)

이건 동서양의 가치관과 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고대 동양의 사상은 인간과 우주를 하나의 연결된 존재(범아일여 : 梵我一如)로 보았고 서로 상호 작용하며 돌아간다고 보았다. 하지만 고대 서양의 사상은 인간과 우주는 분리된 존재로 보았다. 이건 신이 인간과 분리되었다는 이원론적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


소설은 인간이 쓴 창작물이지만 이건 신이 창조한 대설과 연결되어 있다. 대설 우주 안에 소설이 있고 소설 안에 또한 대설이 담겨 있다. 이건 20세기에 착안된 서양의 프랙털(Fractal) 이론과도 흡사하다. 모든 작은 부분 안에 전체가 반영된 우주의 물상이 들어간 구조이다. 간혹 인스타나 숏츠에서 사진이 계속 줌인(Zoom in) 되면서 전체 사진에서 미세한 작은 것을 확대하니 계속 새로운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프랙털을 잘 설명하고 있다. 세계 안에 세계가 끝없이 연결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과 대설의 관계를 설명한다. 내 안에 우주가 있다.

프렉탈 구조

“하나 안에 모든 게 담겨 있고 모든 것 안에 하나가 담겨 있다. 한 점의 티끌에 우주가 담겨 있고 모든 티끌이 다 그와 같다.”

- 의상대사 [법성계] 중에서 -


이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All in One, One in all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문명 세계는 포화 상태에 다다랐다. 지구도 그 생명을 다해가고 언제까지 우리의 육체의 온전함을 지켜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는 괜찮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후손 세대들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다. 지금 태어난 세대는 2100년까지 살아야 하지만 물질세계가 인간과 생명이 견딜 수 있는 환경을 그때까지 유지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만 살고 볼 일이다’라는 마인드가 지금의 환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아직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나만 살면 그만, 내 가족만 잘 살면 그만, 우리 국가와 민족만 살면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외부 세계의 대상을 바라본다.


지구의 모든 존재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이건 아직도 모두가 자신 안이 아닌 외부 세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으려는 인간들이 만든 결과이다. 외부 세계를 정복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바꿔나가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외부 세계의 물질과 인간들을 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여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수직 관계의 피라미드 안에서 좀 더 높은 자리의 위치로 올라가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외부 세계와 인간들의 크기와 숫자를 늘려가려 발버둥 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자아실현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현실 세계의 현상을 변경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문제는 자신 안에 세계를 전혀 모르고 외부 세계에서 자아실현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이건 자신 안에 있는 고유의 그것과는 상관없이 외부의 자극과 유혹과 교육에 의해 정해지고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그것을 쫓아가기 바쁘다. 성공을 향해 가는 길이다. 물질문명의 발전을 위해 힘쓰는 인간들이다. 다수가 그 길 위에서 생의 대부분을 살다가 돌아가신다.


그들이 이룩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한국의 경제성장, GDP의 수치에 일부가 되었다. 그들의 존재는 숫자가 되었다. 인문철학적(언어적) 존재가 경제 수학적(숫자적) 존재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을 기억하는 존재는 혈연과 지연으로 엮인 자들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도 나이가 들어 죽으면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나의 증조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난 증조할아버지를 눈으로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의 기억에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증조할아버지는 한국의 물질문명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것이다. 농사도 지었을 것이고 그 농작물로 여럿이 배를 채웠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때는 경제적 수치가 정량화도 되지 않던 시절이라 그 숫자도 알 수 없다. 존재는 그저 가문의 족보에 쓰인 이름 세 글자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는 비석도 없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난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무엇을 남길 수 있나?


만약 그 증조할아버지가 당시 글을 알아서 썼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지금 그 글을 읽으며 그때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인간이었는지 조금을 알게 될 것이다. 글로 그 모습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도 남기지 않은 오래전 조상이라면 글로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건 우리가 과거 조상들이 남긴 글을 읽으며 그 인물의 모습을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과도 같다.


“원작에서 느꼈던 인물과 너무 다른 거 같아요.”


명작은 항상 영상으로 제작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명작은 항상 소설에서 기인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영화와 드라마가 되어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소설을 읽진 않아도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이미지)는 극본(글)에서 비롯된다. 글이 시작이고 이미지와 영상은 그것의 2차 혹은 3차 창작물이다.

바둑과 작곡

글, 가장 많은 경우의 수 - 예측불가


글은 예측불가의 영역이다. 바둑과 음악보다도 경우의 수가 많아서 AI도 예측할 수 없다. 한 인간의 글이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도 모르는 것이 AI의 한계이다. 이건 마치 소수의 규칙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리만가설 (리만假說, Riemann hypothesis)과도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들 속에서 소수(소수는 1과 자기 자신 외에는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1보다 큰 자연수)의 규칙을 알아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글은 한 인간의 세계를 가장 개성 있게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또한 누구나 접근할 수 있으며 진입 장벽이 없는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글이 완전히 같을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누가 Crtl+c와 Crtl+v 붙여 넣기를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하물며 AI에게 글을 써달라고 같은 주제를 던져줘도 매번 조금씩은 달라지는 것이 글이다. 글은 같을 수가 없다. 물론 답이 있는 글은 내용이 비슷할 순 있어도 표현이나 문장 구조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전 속에 담긴 내용과 주제는 크게 변하지 않아도 그 표현되는 방식과 이야기의 구조는 작가마다 계속 바뀌어 왔다. 같은 주제로도 계속 감동받을 수 있는 이유이다.

자기만의 글쓰기 = 스토리텔링

“깨어나지 않는 한, 깨어나서 자기 스토리의 재창조자가 되지 않는 한 존재도 인생도, 한갓 꿈에 지나지 않는다.”

- 박상우 [비밀 문장] 중에서 -


아무나 할 수 있어서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이 글쓰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둑을 잘 두고, 악기를 잘 다루고, 기구를 잘 다루는 것은 기술이라며 너도 나도 배우려 하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재능 있는 인간이고 전문적인 사람이라 칭송한다. 물론 작가도 잘 쓰면 칭송받지만 너도나도 쓸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글로서 칭송받으려면 정말 지독하게 쓰고 또 써야 한다. 그래도 칭송받기 어려운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나는 7년간 500만 자 넘게 썼지만 아직도 무명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페소아도 그렇게 쓰고 또 썼지만 살아생전 칭송받지 못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칭송받기를 체념하면 계속 쓸 수 있다.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다. 체념은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걸 알기 때문에 계속 쓴다.

르네 데카르 (1596~16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가 남긴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실존주의자들은 굳이 생각을 해야만 하냐? 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만으로도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을 제외한 동식물들에 제한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그것들과 구분되는 유일한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던가. 그럼 인간은 이 생각 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이 땅에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를 증명한다.”


나는 이런 표현으로 바꾸고 싶다. 물론 글이 아닌 다른 영역(예술)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들은 글보다 다른 방식을 선호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보편성을 지녔다. 공평하다. 누구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인생은 모두가 같은 출발점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같다. 모두가 같은 출발점이다. 물론 글을 배우지 못한 시절에 태어나신 분들에게는 이것도 불공평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한국은 위대하신 왕(세종)을 둔 행운으로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 말은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나라라는 말이다.

세종대왕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중에서 -


우리는 말이 너무 많은 세상을 살아간다. TV와 유튜브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말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 카페에도 어지럽게 말들이 날아다닌다. 소음이다. 다행히 내 귀를 덮고 있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덕분에 그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글을 쓸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 (1889~1951)

“쓸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쓰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뭘 말하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 왜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글은 눈에 보인다. 때문에 고칠 수 있다. 퇴고이다. 사람을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은 고쳐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고쳐 쓰다 보면 글이 정제되고 간결해지고 명확해진다. 그에 따라 말도 다듬어진다.


왜 연설가들이 연설문을 보고 연설을 하는가? 그건 그 연설가가 많이 써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글 잘 쓰는 비서관들을 항상 옆에 둔다. 말은 보이지 않아 정제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실언이 생기고 그건 주워 담을 수 없다. 말이 많으면 문제가 많아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많이 써본 사람은 원고 없이도 말을 조리 있게 할 확률이 높다. 글이 바로 말을 다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눈에 보일 때만 고칠 수 있다. 쓰지 않고 말만 하는 사람들이 분란을 많이 일으키고 자기 오류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누구나 이름이 있다. 여태껏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나와 같은 이름은 수백수천 개가 넘을지도 모른다. 남기면 뭘 하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색인되지 않는 정보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읽었다고 내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책만 많이 읽는다고 모두 기억되진 않는 것과 같다. 기억된 것이 밖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고 표현될 때 비로소 존속한다. 나의 뇌 속에 갇혀 호흡이 끊김과 동시에 소멸되는 그 무한한 정보는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름 세 글자가 남들과 구별되려면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 많은 글자들의 조합이 당신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글자들이 만든 이야기(소설)가 대설 우주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이야기가 우주의 섭리를 품고 있는 것이라면 이건 당신이 대설이 된 것이고 당신의 소설 안의 존재가 또 다른 소설을 품게 될 것이다. 이건 마치 마블 코믹스와 해리포터 같은 세계관과 유사하다. 큰 세계가 안에 있는 다른 세계들이 또 다른 수많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섭리이다. 대설이 소설을 소설이 대설을 만드는 끝없이 뻗어가는 우주의 섭리이다.


당신의 삶이 우주의 먼지 한 조각으로 사라질지 아니면 우주의 또 하나의 소설과 대설이 될지는 당신이 무엇을 남기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박상우 [비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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