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문장] 박상우 - 세 번째 -
"미생물은 미미해서 미생물(微生物)이 아니라 아름다워서 미생물(美生物)인 걸 사람들이 잘 몰라요. 고배율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렇게 오묘하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달리 없지요."
- 박상우 [비밀 문장] 중에서 p220 -
작다는 것은 쉽게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작은 것은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쳐다봐야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미세한 생물의 세계는 주의 깊게 관찰하는 자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주변을 주의 깊게 관찰할 여유가 없다. 미세(微細) 함은 심미(審美)적이다. 가깝고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지만 우리는 항상 멀고 큰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거대하고 웅장한 성당과 신전 그리고 만질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물체에게만 그 아름다움을 느낀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생명이 살아 있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세계에도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함을 알지 못한다. 작아서 미(微)생물이 아니라 아름다워서 미(美)생물이다.
“살이 좀 찌신 거 같네요”
오랜만에 본 지인이 내게 말했다. 요즘 몸에 살이 부쩍 오른 모양이다. 호주에 있을 때는 매일 몸을 쓰고 수영을 하는 일상 때문에 살이 오를 틈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수영을 멈췄다. 요요현상인가? 그건 한국의 물 반 사람 반인 비좁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과거 호주로 가기 전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엔 매일 수영 새벽반에 다녔다. 수영을 하고 회사에 출근하는 일상을 4년가량 보냈다. 그땐 붐비는 수영장이 당연했고 일상이었다. 앞에 가는 사람의 발바닥이 손에 닿는 건 수영장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호주에서 사람이 별로 없는 50m 야외 수영장에 한 레일을 홀로 독점하며 수영을 하는 일상을 6년간 누리다 보니 25m의 좁은 수영장은 보기만 해도 숨 막힌다. 좁은 땅덩이에 사는 존재는 적은 자원을 나눠 써야 한다. 그때는 좁은지 몰랐는데 넓은 땅덩이를 향유하다 와서인지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더라.
운동을 해야 했다. 운동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헬스장을 나 또한 떠올렸다. 러닝 머신 위에서 뛰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풍경의 변화도 없는 러닝 머신 위의 걷기와 뛰기는 나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사실 운동이 고문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얼마 전 읽은 김영하 작가의 [단 한 번의 삶]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트레드밀(Treadmill)로 불리는 러닝머신은 원래 19세기 영국에서 죄수들에게 중노동을 시키기 위해 고안된 고문 기구였다.”
-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중에서 -
다른 사람들은 잘도 걷고 뛰는 그 기구가 나에겐 왜 그리 이유 없이 지겹고 고통스럽게 느껴졌을까 했는데 그 이유를 알아냈다. 우리는 보통 싫고 좋고의 명확한 이유를 모르고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싫어하며 좋아한다. 그냥 느낌적인 느낌이다. 그걸 말이나 글과 같은 언어로 풀어내는 사람이 작가 아니겠는가. 나도 이것을 즐긴다. 나도 작가인가 보다.
자연에서 걷다
산에 오르기로 했다. 산에서 걷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다. 물론 몸이 고통스러운 건 같지만 고통 뒤에 가지는 남다른 성취감이 있다. 올라갈수록 달라지는 풍경과 몸을 감싸는 자연의 기운이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요즘 이틀에 한 번꼴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짧은 산행 코스를 선택해서 매일 땀을 흘리며 자연 속을 누비고 다닌다.
“맨날 같은 산에 오르면 지겹지도 않아요?”
누가 그러더라. 같은 산이 지겹지도 않냐고. 난 아니다. 하나의 산이 품고 있는 다양함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산에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고 같은 등산로도 반대로 가면 완전히 다른 경치를 선사한다. 또한 사계절이 있는 한국은 시기에 따라서도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보는 각도와 시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주변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관심과 관찰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럼 매일 같은 길을 걷고 올라도 매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에 등산을 할 때는 보지 못했다. 그때는 얼마나 빨리 정상을 찍고 시간을 단축하는 가에 집중했다. 그 시간으로 나의 체력이 증진되었음에 성취감을 느끼던 나였다.
“어랏! 또 새로운 꽃이 폈네!”
며칠 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들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자세를 낮추고 그 꽃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다. 꽃이 마치 몸을 일으켜 세운 보라색 코브라 뱀처럼 보였다. 여러 마리의 코브라가 바람에 흔들거리며 마치 피리 소리에 따라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골무꽃?!”
정말 그러고 보니 골무처럼 생긴 것 같다. 꽃의 머리가 골무 모양을 한 데서 그 이름을 따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골무꽃 이름의 유래를 검색했다. 찾아보니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들어본 듯한 이야기가 바로 이 꽃의 전설이었다. 그 전설은 이러했다.
아주 먼 옛날 할아버지 뱃사공이 장마로 불어난 물에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뱀을 한 마리 구해 줬다. 훗날 이 할아버지는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 옥 중으로 이 뱀이 나타나 그 할아버지의 발목을 물고 도망가 버린다. 할아버지는 은혜도 모르는 뱀을 원망했다. 그리고 몸에 독이 퍼져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 뱀이 다시 나타나 풀잎 하나를 물고 와서 그 할아버지의 발목에 붙여주고 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씻은 듯이 나았다. 그리고 그 고을의 원님의 부인이 뱀에 물려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할아버지는 그 원님의 부인을 그 풀잎으로 처방해 목숨을 구해줬다. 그 일로 할아버지는 다시 풀려나고 원님으로부터 금은보화까지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실제로 한방에서는 골무꽃을 한신초(韓信草)라 부르며 해독, 타박상, 치통을 치료하는 데 쓴다고 한다. 그리고 꽃말은 전설에서 느껴지듯이 “의협심”(혹은 고귀함)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10분이 흘렀다. 나의 산행은 언제나 시작 시간은 정해졌지만 종료 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 이건 마치 세상에 오는 시간은 정해졌지만 세상을 떠나는 시간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내려오려 했던 과거의 등산에서는 알지 못했다. 그 산행의 과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지를…
목표와 결과만을 향해 살아가던 시절 나에겐 길은 언제나 고통과 고난의 과정이었고 그것을 견뎌내고 올라가면 성공과 성취가 나를 반길 거라는 믿음만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그때의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더 화려한 자동차 그리고 지금 보다 더 넓고 큰 아파트 그리고 지금 보다 더 넓고 큰 책상을 가진 임원이 되는 것이었다.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낙오된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고상한 푸념이구만!”
누군가 그랬다. 맞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이건 과거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세월이 지나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이라는 게 돌고 돈다더니 틀리지 않다. 그 자의 말처럼 성공하고 뒤처지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의 나의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과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이 능력이 국가와 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이 아니라서 안타깝지만 나는 국가와 사회와 기업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나로서도 존재해야 할 권리도 있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 권리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물론 그 대가로 풍요와 편리를 누리며 사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선택하고 누리고 사는 건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만 나는 과거 그것들을 누리고 즐겨봤다. 지금 와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니 그 세계가 그리 행복해 보이진 않더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공존하지만 대부분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현혹되어 살아가는 것 같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에 핀 꽃을 가만히 앉아서 들여다볼 수 있는 자는 아마도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자일 것이다. 그 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 자가 내가 되었다.
“사물을 항상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사물을 새롭게 갱신한다는 것이며 다층화한다는 것이다. 관조적인 인간은 자신이 사는 마을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서도 전체 우주를 손안에 둘 수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내 주변의 미미(微微)한 곳에 무한한 아름다움(美)이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는 쉽게 아름다워진다.
*아름답다 = 나 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