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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과학 사이

[왜 칸트인가] 김상환 - 세 번째 -

by 글짓는 목수

"초월론적 차원은 물자체와 현상계 사이에 위치하는 것처럼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형식과학과 심리학 사이에 자리한다."

- 김상환 [왜 칸트인가] 86p -


철학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철학이 형이상학(形而上學)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형태를 지니지 않은’ , '형상을 넘어선' 학문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 철학을 대변할 수 없지만 형이상학은 철학의 근본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빼고선 철학을 말할 수가 없다. 그건 뿌리가 없이는 줄기와 가지와 잎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발견과 증명의 영역은 과학이 책임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심리학이라는 또 다른 학문으로 그것을 분석하려 한다. 철학은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다. 과학만으로 그렇다고 심리만으로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자체와 인간의 뇌에서 받아들이는 현상계 사이를 탐구한다. 이곳은 미지의 세계이다. 인간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선다. 나도 미지의 세계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철학이 재미있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왜 칸트인가] 또다시 집어 들었다. 3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진선미의 철학] (서평 참조) 니체와 쇼펜하우어와 같은 지금은 우리에게 대중적인 철학을 들여다보다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철학자가 누구인가를 거슬러 가니 칸트가 나왔다. 근대 철학은 모두 이 칸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더라. 요즘 독서모임에서 철학 읽기를 하고 있다. 호스트를 하다 보니 다시 집어 들 게 되었다. 다시 봐도 어렵다. 칸트는 철학계의 양자역학과도 같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기도 하다. 또 새로운 칸트의 철학을 발견하고 글을 쓴다.


물자체와 현상계


칸트의 철학은 ‘관념론’을 빼놓을 수 없다. 관념론을 논하려면 물자체와 현상계라는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 현상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물자체는 쉽게 실제로 존재하는 물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현상계는 이 물체가 우리의 감각(Senor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 등)으로 분석되어 뇌에서 이해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물자체와 현상계는 다르다. 물자체의 본질을 인간은 알 수가 없다. 그저 인간의 뇌(프레임)에 의해 판단되고 해석될 뿐이다. 이것이 관념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럼 당신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있음을 의미한다. 세계의 중심이 나이고 인간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 물자체와 현상계가 동일하다.

대상과 주체

눈앞에 사과가 하나 놓여 있다. 인간이 보는 사과는 사과의 빨간 껍질만 눈에 보일 뿐이다. 하지만 박쥐가 보는 혹은 돌고래가 보는 새가 보는 사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들의 감각은 인간의 감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센서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과가 그들의 뇌에서는 다른 현상계를 구축한다. 인간은 그들의 뇌에서 구현된 현상계를 알 수 없다. 물론 이제 인간이 그들의 감각과 뇌를 분석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시뮬레이션은 100% 동일하게 인간이 느끼고 인지할 수는 없다. 인간은 지금 당신이 갇혀있는 육체 센서의 한계로 인해 육체를 초월한 감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체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육체와 시간 두 가지에 의해 갇혀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질과 시간 사이에 갇힌 존재

육체는 물리적인 제약이고 시간은 물리와 비물리를 정의하는 개념이고 이 개념이 인간 사고의 제약을 가져온다. 이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태동으로 이제 그 제약에서 조금씩 벗어나려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의 인식 체계에 의해서 물자체를 다양한 관념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인식의 변화는 또한 인류가 보편적 가치관과 공통적인 관습 등에 의해서 더욱더 고착되어 있어서 그 전환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위대한 발견과 발명을 하는 인물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문화적 인식과 관습에 얽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닫혀버린 세계관은 절대 그 너머에 있는 세계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선구자와 혁신가들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자신도 미친놈(외톨이)이 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나를 때린다

“그리스어 ‘메타 피직스(Metaphysics:형이상학)’는 자연학(Physics) 너머(Meta)에 있는 학문이다”


- 김상환 [왜 칸트인가] 중에서 -


자연학이란 다른 말로 물리학이다. 물리(物理)는 사물의 이치이다. 그러니까 사물의 이치에서 벗어나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도 사물의 한 부분이다. 인간도 사물의 영역에 속해 있지만 인간의 사유 능력은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 그래서 심리학(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리는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이다. 심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마음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100만 원에서 1만 원을 빼고 99만 원을 줄 수 있는 사랑이에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라.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이냐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보는 시간이었다. 숫자에 대한 찐 사랑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가 숫자의 앞뒤에 붙인 글자를 빼버리면 이 의미는 전달될 수 없다. 지극히 수학적인 표현이지만 숫자로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예시가 아닐까? 그분이 1만 원을 남긴 건 그 사랑의 실패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만 원으로 집에 돌아갈 차비는 남겨 두어야 한다. 현실에서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고전 속 '개츠비'나 '베르테르' 같은 인물이 위대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런 실패와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보험은 그런 우리의 심리를 이용해 돈을 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물리나 심리는 모두 돈이 된다. 좌우에 어느 한쪽에 자리 잡으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물리의 세계를 바꾸는 일을 하거나 비물리(마음)를 다루는 일을 하면 전문직 인간이 될 수 있고 전문적일수록 돈과 지위가 따라온다. 이런 물리적인 세상을 바꾸는 자들과 사람의 마음을 다루고 조정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철학자이다.


“철학하고 자빠졌네”


교수도 아닌데 철학하면 굶어 죽기 십상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철학과’는 비인기 학과의 최고봉이었다. 철학과는 그저 대학 간판을 위해 턱걸이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학과였다. 좀 부실한 간판의 인기 학과를 가느냐 아니면 좋은 간판을 위해 철학을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철학과를 다니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주변에 철학과를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서 그들이 뭘 배우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철학 교양서가 제일 재미있다. 세상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소설을 쓰고 철학 교양서를 뒤적이는 내 모습은 어쩌면 가장 거지되기 쉬운 코스를 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 궁핍한 문학도에 명함 없는 개똥 철학자로 글을 쓰는 내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계속 이것을 할 수 있는 건 이 시간이 나에게 가장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젊은 시절 군말 없이 큰 사고 없이 돈을 벌었던 시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처자식 없어 온전히 나에게 시간을 쏟을 수 있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자유는 고독을 견딘 대가로 누리는 것임을 안다. 고독이 싫다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둘 다 누리고 싶다. 세상에 어디 모든 것을 누리고 가지는 자가 있겠는가? 가진 것과 누리는 것에 감사하면 만사형통이다. 칸트의 말처럼 모든 것은 나의 관념이 지배하는 것이다.

과학과 심리학

심리학과 과학 사이


나는 과학과 심리학의 돈 되는 학문 사이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한다. 과학교양서와 심리학 교양서를 읽으면 내 머릿속의 개똥철학이 그것들과 교섭 작전을 벌이면서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거기에 문학이 섞이면 에세이인지 칼럼인지 수필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산문이 탄생한다. 나의 글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 글의 장점을 하나 들라면 아마도 AI가 따라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보성 글과 감성적 글과 사적인 경험이 섞인 글을 AI가 쓰는 날이 온다면 나는 대체될 것이다. 그럼 아마 작가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과학과 철학의 연결 그리고 심리학과 문학의 연결, 때로는 이 네 가지가 모두 연결되는 그 어떤 글의 탄생을 갈망한다. 이건 내가 가장 바라고 지향하는 글이기도 하다. 모든 영역에서 접점을 찾아내어서 그것들을 연결하고 융합해서 이야기 속에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면서 위대한 일이 아닐까?


지식과 지혜와 감성과 삶을 담은 이야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철학이 자리한다. 그건 철학이 그 모든 것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도 철학을 했고 카뮈도 철학을 했고 다른 모든 예술가들이 그들만의 철학을 지닌 것은 그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학문과 예술은 모래성과 같다.


야마구치 슈 (1970~)

“교양 없는 전문가야말로 우리의 문명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다.”

-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중에서 -


교양은 철학(이성)과 예술(감성)의 함양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철학 없는 전문가들과 예술가(유행)들은 그저 돈과 명예와 인기만을 좇아서 계속 뿌리를 옮겨 다니는 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위태롭게 하고 어지럽게 만들 뿐이다.


그럼 나는 교양인이 되고 싶은 건가? 아니다 교양도 관념화된 것이라 싫다. 그냥 비위협적인(人)이 되고 싶다.


당신은 어떤 인(人)이 되고 싶은가?


[왜 칸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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