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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 사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by 글짓는 목수

"내가 왜 이렇게 어린애 같은지 모르겠군. 일단 보고 싶으면 이렇게 못 견디는 것일까? 정말 나는 어린애인 것 같아."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아이가 된다. 사랑에 빠지고 싶은 이유는 아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럼 아이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이가 되면 세상 모든 고민들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대상만 눈에 보인다. 그 한 대상을 통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그 대상이 이성(異性)이다. 이성(理性)을 잃고 사리분별이 흐려진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유치해지는 이유이다. 그것이 마냥 좋다. 아이들처럼...


유치한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 남녀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랑을 나눈다. 어린아이들은 서로 사랑하면 낮과 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냥 다가가서 손을 잡고 끌어당기고 안으며 뽀뽀를 한다. 어른들은 그런 꼬마 아이들의 사랑을 보고 즐거워하며 웃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것이 아닐까?

어둠 속 성인의 사랑

눈앞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너무도 사랑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다가가서 손을 잡고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건 아주 무례하고 경솔한 행동이다. 경우에 따라서 사회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이다. 성추행으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서로 사랑하는 연인과 부부 사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사실 연인이나 부부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미 서로를 소유할 권리를 가진 남녀는 굳이 보이는 곳에서 그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둘만의 공간을 찾아간다. 그리고 수시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찾아들어 서로의 애정 행위를 즐긴다.

어린아이의 사랑

아이들은 어떤가? 권리 유무를 따지지 않고 자신이 좋으면 다가가서 볼에 입을 맞춘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 아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볼에 입맞춤을 당한 아이는 만약 자기도 좋아하면 그 아이를 따라서 입을 맞춘다. 만약 그 아이에 대해 그런 감정이 없으면 멍하게 그 아이를 쳐다볼 것이다. 아이는 생각한다. 이 아이가 왜 내 볼에 입을 맞췄을까? 그때부터 아이는 그 아이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싫어하면 밀쳐낼 것이다. 아이들은 감정에 솔직하다. 아이들은 이렇게 사랑한다. 말로 사랑을 얘기하고 글로 계약하며 사랑하지 않는다. 마음 가는 데로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랑이다. 어른이 된 남녀가 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性)에 눈을 뜨게 되면서 사랑이 성적인 것과 연결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번식이 가능해진 암수는 이 성적인 굴레에 묶여 아이처럼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몸이 아닌 말로 말이 아닌 돈으로


어른 남녀의 사랑은 몸이 먼저 움직이면 안 되기 때문에 말로 사랑을 시작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사랑을 속삭인다’는 표현을 쓴다.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에 남녀가 서로 녹아들고 말에 향연을 통해 몸을 내어주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어른 남녀의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른 남녀는 이것만으로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무리 말이 달콤하고 마음을 사로잡아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말이 아닌 상대가 가진 물질과 명함을 확인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상대가 가진 것이 자신의 것보다 부족하거나 초라하면 달콤했던 상대의 언어는 가진 게 없어서 생긴 능력이라 생각한다.


사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자신을 대변해 주기 때문에 언어의 기술과 온도를 올려야 할 필요가 없다. 물질 문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보다는 돈과 물질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얻기 위해 말이 아닌 돈을 번다. 사랑이 밥먹여 주지 않는다. 어른들은 그것이 사랑을 얻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들의 사랑은 자꾸 사라지고 바뀌기를 반복한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사랑이 순수하고 고결한 것은 망설임 없이 몸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몸은 정직하다. 남녀가 서로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며 수음 행위를 통해 강렬한 환희를 느끼는 것은 서로의 거짓 없는 모습을 숨김없이 다 드러내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몸은 거짓을 표현할 수 없다. 아직 성 정체성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입었든 벗었든 행동에 큰 변화가 없다. 똑같이 행동한다. 하지만 성 정체성이 생긴 어른은 서로 벗었을 때만 숨겨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이 상대에게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상대에게 강렬한 신뢰 같은 것이 생긴다. 성인의 사랑이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사랑은 온전할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는 현실과 이상을 모두 가진, 더 정확히는 이 두 세계의 균형을 지향하는 남녀라면 두 가지의 사랑을 병행해야 한다.

샤롯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사랑

균형을 잡을 수 없는 사랑 (가질 수 없는 사랑)


샤롯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사랑은 정신에서 시작되었다. 마음에 품은 그녀가 점점 커져가면서 그 감정을 숨길 수가 없게 된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마련이다. 자기 통제가 강하면 좀 더 오래 숨길 수는 있지만 종국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랑을 드러난다. 그런데 베르테르의 사랑은 유부녀다. 정신적인 사랑은 자신의 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누구도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정신의 사랑이 육체로 옮겨갈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더욱이 그 육체적 사랑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합일을 이룬다는 생각은 정신의 사랑이 커져버린 베르테르에게는 지옥과도 같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품은 짝사랑은 삶의 희망이고 열정으로 옮겨가지만 이룰 가능성이 없는 짝사랑은 절망이 된다. 만약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이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 되어 버린다.


“부정한 아내와 그녀를 유혹한 비열한 정부(情夫)에 대해 정당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들을 살해한 남편이나 또는 환희의 순간에 이성을 잃고 억누를 길 없는 사랑의 환락에 몸을 내맡긴 처녀, 이들을 향해 누가 맨 먼저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


샤롯테의 남편이 베르테르에게 말한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 이런 불륜의 사랑은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결혼한 남녀도 서로 상대의 신체와 정신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지만 당시에 결혼은 상대의 대한 소유권을 의미했다. 그건 정당한 권리였다. 물론 지금도 결혼은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식적인 계약이기에 이를 어기면 사회와 대중의 지탄 대상이 된다. 비단 남녀관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졌기에 이런 계약을 깨뜨리는 일방적인 행위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랑과 결혼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한 분리될 수도 있다. 이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문제는 사랑도 식을 수 있고 계약도 파기될 수 있는 것이 남녀관계이다. 이 둘(사랑과 결혼)은 결국 모두 믿음 위에서만 지탱된다. 때문에 남녀는 사랑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결혼 계약이 유지될 수 있다. 사랑 없는 믿음에만 근거한 계약은 유지되기가 어렵다. 만약 그렇게 유지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비지니스와 같다.


비지니스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다만 같은 비전(소망)을 공유하기 때문에 비지니스가 유지된다. 남녀의 신뢰가 사랑을 통해 생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남녀의 사랑이 사라지고 식어도 헤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서로 헤어지면 아쉬울게 많다. 아니면 사랑이 소망으로 갈아탄 것인가?

타이밍의 맞아 떨어진 사랑 = 결혼

결혼은 타이밍


사랑과 결혼이 일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랑이 찾아오는 시기와 결혼이 찾아드는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결혼은 타이밍’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는 데는 시기가 있지만 사랑이 찾아오는 시기는 대중 없다. 예측불허다. 언제 어떻게 사랑이 찾아들지 알 수 있는 남녀는 없다. 그래서 남녀는 언제나 사랑을 꿈꾸지만 언제나 결혼을 꿈꾸진 않는다.


이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번식을 위해서만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번식 없이도 사랑을 계속 갈구한다. 물론 유전자는 그것 때문에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이라면 여성에게는 해당사항이 되지 않는다. 여성은 번식을 할 수 있는 시기(가임기)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번식을 할 수 없어도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유전자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이건 영원히 사랑받고자 하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알베르트가 그녀의 날씬한 몸을 껴안고 있다고 생각하면, 빌헬름, 나는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 같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


상사병에 질투까지 더해지면 고통은 배가 된다. 자신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부러움은 열정을 불태울 수 있지만 가질 수 없는데 누군가에게 독점된 사랑은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버린다. 영혼이 다 타버리면 인간은 삶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다.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 밖에 없다. ‘시간이 약이다’ 혹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젊은 베르테르는 그 시간을 견딜 영혼마저 다 태워버린 모양이다.

박상우 [비밀 문장]

“강렬하게 원하는 것은 언젠가는 자살의 근거가 된다.”

- 박상우 [비밀 문장] 중에서 -


젊음의 혈기는 결국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모두 불타버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앗아가 버렸다. 어쩌면 이 시대의 남녀가 이제 더 이상 강렬하게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그런 강렬함이 가져다줄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


가질 수 있는 사랑은 간절한 희망을 품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랑은 강력한 절망이 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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