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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글은 닮았다

카페에서 방해꾼이 옆에 앉았다

by 글짓는 목수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장소가 아주 중요하다.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카페가 문을 여는 시간 아무도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익숙한 곳에는 익숙한 물건들이 수시로 나를 유혹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 가야 한다. 물론 그 익숙지 않은 공간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익숙해진다. 그럼 다시 또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찾아야 한다.


나는 왠지는 설명할 순 없지만 익숙함과 낯설음 사이에서 글이 가장 잘 써진다. 처음 가는 완전히 낯선 곳에서는 주변을 관찰하느라 글을 쓸 수 없고 나의 방처럼 익숙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에서는 익숙한 물건들과 그것들과 엮여있는 (집안) 일들을 떠올리기 때문에 글에 몰입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사물들 때문이다. 약간은 낯설고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가 나를 글이라는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


이제 집 앞의 카페는 낯설음보다 익숙함의 영역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버렸다. 몇 달 동안 반복적으로 찾는 공간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더욱이 비슷한 시간에 나타나는 사람들까지도 익숙해지고 있다. 항상 비슷한 일정한 시간대에 나타나는 사람들, 서로를 알지만 모르는 사이이다. 안면만 있는 사이지만 적잖은 시간을 그렇게 마주치다 보면 안면 뒤에 가려진 것들이 떠오른다. 이건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건지 모르지만 나처럼 머릿속에 상상이 쉬지 않고 개입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계속 관찰하며 그들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게 된다. 외면에서 드러나는 모습으로는 더 이상 상상이 불가능해지면(물론 대화를 통해 관계를 가진다면 달라지겠지만) 공간도 사람도 모두 익숙한 곳이 되어 더 이상 나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지 못한다. 다시 나에게 낯설음과 익숙함의 사이에 펼쳐지는 상상의 공간이 필요하다.


최근에 카페에 나타나기 시작한 한 익숙한 남자는 그 넓은 카페 공간 속에서 왜 하필 매번 내 근처에 자리를 잡는 건지 모르겠다. 계속 산만한 행동들과 기침소리가 나를 방해한다. 익숙한 방해꾼이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을 멈추게 만들었다. 카페에 입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에게 이 시간은 너무 소중한데 이렇게 허비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일기라도 써야겠다는 마음에 다시 하얀 백지 화면을 띄웠다. 그런데 일기로 시작한 글이 폭풍 에세이로 변해버렸다.

Writing in Mcdonald, 35 Town Terrace, Glenmore Park NSW 2745 오스트레일리아


카공족은 진짜 몰입 or 집중을 할까


카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그건 나처럼 카페에 앉아 컴퓨터 혹은 태블릿 혹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자들이 과연 집중을 잘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하는 것이다. 대부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사람 그리고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는 사람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나의 시선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글에 빠지면 의식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들 중에는 서로의 시선을 의식하고 몸을 산만하게 움직이는 자들이 많다. 분명 그들은 몰입이나 집중이 아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보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무의식의 몰입은 주변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화면에 무엇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시선과 행동으로 유추해 보건대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나 업무 아니면 영상물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잠시 몰입에서 빠져나와 카페 안으로 시선을 옮겨 잠시 사색을 할 때마다 순간 그들의 움직임과 시선이 변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들이 그런 시선에 반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그런 시선의 통제 속에서 자신을 다잡기 위함일까? 아님 그저 그런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그들도 카페라는 공간에서는 집에서 하는 자세나 행동을 취할 수는 없다. 내가 그런 시선이 있는 공간 속에서 나 스스로의 일상적인 행동들을 배제시키고 몰입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카페에 카공족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리라. 익숙한 공간 속에서는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Writing with coffee in George Kendall Riverside Park, NSW. Aus

넓은 땅을 가진 호주나 캐나다 같은 곳처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색과 산책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축복이다. 그런 드넓고 한적한 공원이 없는 한국의 도시에서 몰입과 집중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적절한 낯설음이 존재하는 카페밖에 없는 듯 보인다. 요즘같이 뜨겁고 무더운 날은 더욱 그렇다. 삶이 각박해지는 이유는 그런 사방이 막힌 도시와 익숙한 것들에서 벗어나기 힘든 환경 때문이다.


호주에 머물 때는 자주 드넓은 공원을 찾아 독서와 산책 그리고 사색을 즐겼다. 하지만 한국에 온 뒤로는 수많은 간판들과 건물들로 사방이 막힌 환경은 생각이 뻗어나갈 공간을 주지 못하더라. 거리를 걸으면 상념에 빠져들 수도 없다. 사람들과 차들과 건물들과 소음들 때문에 한시도 깊은 몰입으로 빠져들 수 없다. 눈과 귀를 현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너무 익숙하지 않은 공간(카페나 도서관)에 앉아서 상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운이 좋아야 한다. 간혹 오늘처럼 옆에 감기 환자나 수전증 환자라도 앉는 날에는 쉽지 않다. 드넓은 공원처럼 나의 반경 10m를 온전히 홀로 쓸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몰입은 호주에서 보다 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몰입을 계속 찾게 되는 것은 그것이 주는 환희와 기쁨을 호주에서 십분 경험했기 때문이다.

Writing in Krispy Kreme Auburn, NSW

나는 카페와 도서관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의 몰입이 아닌 의도적인 집중력에 의존해서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건 목표를 달성하면 사라질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의도적인 집중이 가져다줄 기쁜 결과를 위해 이 시간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결과를 알 수 없지만 당장의 기쁨을 느끼는 몰입에 빠져들고 있다. 그래서 매일 계속하고 싶고 이것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목적 없는 공부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공부임을 깨닫고 있다. 다들 공부가 목표 달성으로 바뀌어 버린 세상은 성공을 위해서만 공부할 뿐 성장을 위해 공부하는 자는 드물다. 성공하지 못한 성장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자신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는 것인지를. 다만 그것이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해 불안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불안은 근본기분이다. 성공을 쫓는 자들은 불안을 회피하고 고통과 권태 사이만 오고 가면 잠시 찾아드는 쾌락과 성취만 느낄 뿐이다.


현실은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시선의 차가움과 따가움보다 내가 느끼는 환희와 성장의 기쁨이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다.

Writing in McDonald's Windsor. NSW

삶과 글은 닮았다


오늘은 자리를 잘못 잡아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 상황이 오랜만에 폭풍 키보딩의 경험을 선사했다. 약간의 분노가 만든 상념은 때론 흥분 섞인 폭발적인 글쓰기를 유도해 내기도 한다.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폭발은 끝없이 뻗어가는 우주처럼 속도감이 있다. 또한 정제되지 않고 격정적이다. 쓰다 보면 처음과 달리 거칠던 키보딩은 서서히 차분함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서서히 정제된 감성과 절제된 이성이 개입한다. 퇴고이다. 글이 정제되는 과정이다. 쓰고 또 쓰다 보면 감정이 정리되고 그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격한 감정이 글로 밖으로 표현되면서 정리되고 정제된다. 몰아치던 감정이 글이라는 형식과 질서에 의해 다듬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은 기본적으로 이성적임(형식과 맥락과 논리성)을 전제한다. 감성(정)이 이성의 틀(프레임)을 통과해서 하얀 백지에 드러나기 때문에 감정에 취해 있던 나는 깨어난다. 이제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을 전환시킨다. 글쓰기가 나의 삶과 감정을 관조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럼 삶이 눈에 보이게 된다. 삶 속에 있던 나를 삶 밖에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오늘도 쓰려던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새로운 감정이 불러온 상념을 쓰고 말았다. 항상 그렇다. 나의 글쓰기는 언제나 내가 뭘 쓰게 될지 모르는 기대감과 호기심 때문에 계속 쓰게 되는 것 같다. 쓰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쓰면서 알아가는 것이다. 삶도 살아가면서 알아가듯이 말이다.


삶과 글은 닮아 있다. 알 수 없다. 어떻게 살게 될지 어떻게 쓰게 될지...


답을 알려면 그냥 계속 살아보고 그냥 계속 써보는 것뿐이다.


카페에서... with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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