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종이나라 사람처럼

[음악소설집_수면 위로] 김연수

by 글짓는 목수

"매일 아침마다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게 진실이 맞다면 나는 그걸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안다. 그게 내게는 애도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 김연수 [음악 소설집 - 수면 위로] 중에서 81p-


누구나 저마다의 진실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진실이 진리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진리를 믿으며 그것과 다른 진리를 미워한다. 하나의 진리를 사랑하면 다른 진리를 미워하게 된다.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있는 애증(愛憎)이라는 모순적인 단어가 이해되는 이유이다.


인간은 서로의 진리를 부정한다. 그건 인간이 3차원의 공간에 살면서 2차원 밖에 보지 못하면서 4차원을 이야기하는 모순 속에 살기 때문이다. 사는 곳과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 대부분이 2차원의 평면, 즉 종이 나라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누군가는 원통을 보고 원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직사각형이라 말하며 누군가는 둘 다가 된다고 말하며 또 누군가는 그 무엇도 아닌 것이라 말한다. 모두가 진리이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다. 그건 내가 나의 믿어온 진리의 시간이 길고 오래되어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중함의 크기는 내가 쏟아부은 시간에 비례한다.


“네가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 때문이야.”

- 생텍쥐 베리 [어린 왕자] 중에서 -



독립서점 [크레타]에서 진행한 독서리더 양성 교육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육과정 중 교육 교재로 선정한 책이었다. 5명의 소설가의 단편을 담은 소설집이었다. 가볍게 읽어내려간 단편 속에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문장이 또 많은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정리되지 않은 상념들이 뒤섞여 어지럽다. 어지러움에서 벗어나려면 써야 한다. 쓰면 어지러운 것들이 정리되며 버릴 것과 남길 것들이 명확해진다. 그럼 나는 그 상념에서 자유로워진다.

독서 모임 리더 양성 교육 with 크레타 in 전포밭개마을

잊는다는 것은 버리는 행위 같지만 그건 사실 털어냄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전가시키고 분담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고통과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생각과 감정이 표현되어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마도 그런 효과를 불러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토해내듯 쓰고 나면 아주 후련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작가는 그 해방감과 환희에 중독된다. 그래서 계속 쓸 수 있다. 글쓰기도 중독과 같다. 단지 중독을 일으키는 매개체가 없고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운동과 비슷하다. 필력도 체력과 비슷하다.


”진실을 쓰는 일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됐다. 진실되게 쓴 문장들만 새로운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썼던 내용을 여러 번 다시 쓰기도 했다. - 김연수 [음악 소설집 - 수면 위로] 중에서 -


진실을 쓴다는 것이 용기가 필요한 것은 나의 진실이 누군가에겐 불편한 진실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 모두가 각자의 진실을 진리로 믿기 때문에 이건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다. 글쓰기에 용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들은 다른 진리를 마주할 때 분노를 느낀다. 만약 그 진리가 자신이 평생도록 믿어온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작가는 그런 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해야 한다. 만약 이런 용기가 없는 작가라면 그냥 보편적인 내용, 즉 모든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제만 쓸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나 서로 사랑하라는 누구나 반대할 수 없는 그런 주제들이다. 물론 그들이 그런 주제에 관심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쓰면 쓸수록 자신 안에서 빠져나와 인간과 사회와 우주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여러 가지 모순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 모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독자들에게 그 기회를 던지는 것이다. 문학의 더 큰 역할이다. 위로와 공감에서 의문과 성찰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문학은 위로와 공감에만 너무 깊이 빠져있는 것 같다.


우리가 나와 다른 진리를 마주하면 사실 슬픔을 느껴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함하다. 하지만 우리는 슬픔보다는 분노와 더 가깝게 지낸다. 슬픔은 패배와 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오랜 시간 인식되어 온 탓이다. 분노는 승리를 위한 경쟁심을 불태우고 이것이 성장과 발전의 추진력이 된다. 분노의 질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슬픔에 잠긴 것보다 차라리 분노로 가득 찬 것이 이로운 이유이다. 분노가 현실의 삶에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배드민턴 경기 (강서체육관)

“저랑 실력이 너무 차이가 나는 사람과 팀이 되고 싶진 않아요."


얼마 전 오래 동안 알고 지낸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로 여러 시도 대회를 휩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친구였다. 그가 대회를 나갈 때면 항상 그와 한 팀을 이루고 싶은 선수들의 러브콜을 받는다고 한다. 아마추어 배드민턴은 복식경기 밖에 없다. (단식은 체력 소모가 크고 참여율과 시간적 문제로 인해) 그는 항상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자신과 레벨이 맞고 호흡이 잘 맞는 선수를 선택해야 한다. 그는 아주 냉철하고 분석적이어서 누가 자신과 잘 맞는지를 잘 안다. 그래서 시도대회에서 그렇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기회보다 자신이 우승할 확률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때문에 그는 대회가 다가오면 항상 힘들어하는 모양이었다. 이기고 싶은 마음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등산

“그래서 나는 함께 하는 운동을 안 하게 되더라.”


나는 그래서 대결 구도와 팀 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즐긴다. 홀로 산에 오르고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한다. 나 스스로와의 경쟁이다. 나는 나를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타인을 이기려는 운동은 이기적이 되는 것 같아서 싫다. 승부욕은 언제나 분노의 파워를 끌어올린다. 난 내 안에 나약하고 나태해지려는 나에게 분노를 느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물바다였고, 어느 순간부터 물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김연수 [음악 소설집 - 수면 위로] 중에서 83p-


오랜 시간 수영을 했다. 호주에서 살던 시절 야외 수영장에서 자주 수영을 했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항상 수영장으로 달려간다. 비가 오는 날 야외 수영장?! 의아할 것이다. 예상했듯이 수영장에 사람이 거의 없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물속으로 뛰어들면 물 밖과 물속의 구분이 사라진다.

물 속에 빗 속에

‘비에 젖어 물에 젖어’. 다른 것이 있다면 시끄러운 물 밖과 달리 물속은 고요하다. 수면 위는 부딪치는 빗방울이 내는 소리로 요란하다. 잠수를 해서 물속에서 수면을 올려다보면 수면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수면을 흐리게 만들어 물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 안은 고요하다. 우리는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고 살 수가 없다. 내가 물속을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세상에 소리에 잠시 귀를 닫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직장인으로 살던 시절 매일 새벽 수영을 다닐 수 있었던 건 그 물속의 시간이 세상과 격리되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세상 속에서 숨 가쁘게 살다 보면 수많은 진실들을 마주하며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았다. 어지럽다. 그 많은 진실들 중에 가장 위력 있는 진실은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생활 같았다. 그것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면 나도 그들과 똑같이 누군가에게 나의 진실을 강요할 수 있는 돈과 힘을 가질 수 있다. 대물림이다. 사람은 배운 데로 가르친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더라. 우리가 믿는 진실이 보편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대부분 삶이 그것들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다. 어울려 살고 섞여 살려면 때론 내가 아는 진실을 지워야 하고 숨겨야 한다.

종이 나라

종이나라 사람처럼


하지만 무엇이 궁극의 진실인지 알 수 없다. 138억 년의 우주의 역사가 품은 진실을 어찌 30만 년도 인류가 다 알 수 있을까? 인간이 세상을 보는 눈은 대부분 2차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모두가 종이나라에서 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김연수 작가가 말하는 원통을 앞에 두고, 원만 보는 자와 직사각형만 보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비스듬히 보고 한 바퀴 돌아보고 좀 기다렸다 10년 뒤에 보는 법(판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 자는 종이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애도할 수밖에 없다. 그건 그들이 안타깝고 불쌍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는 하나의 진실을 보는 자이고 누군가를 슬퍼하는 자는 다른 진실을 아는 자이다.


당신은 분노하는가? 슬퍼하는가?


[음악 소설집_수면 위로] 김연수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삶과 글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