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 두 번째 -
"여자의 부정직이란 그리 심하게 비난할 일이 못 된다."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
여자의 부정직과 남자의 부정직은 무엇이 다른가? 왜 저자는 그런 생각을 소설 속에 담아내어야만 했을까? 여자의 부도덕은 개인적으로 시작해 개인적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의 부도덕은 개인적으로 시작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여자들, 데이지 뷰캐넌과 조던 베이커의 부정직은 한 남자를 파멸로 그리고 소수의 집단에 실망을 안겨 주긴 했지만 그것이 전체 사회와 문화에 전반적인 부도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자들의 부정직은 누군가에겐 치명적이지만 그건 마치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사슴처럼 그 희생당한 사슴 하나에겐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슴들의 목숨을 구하고 그 사자의 먹이가 되지 않았음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물질에 타락하고 사랑에 부정직한 한 여자의 모습은 개츠비를 파멸로 몰아갔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그에게 희망이고 삶의 열정을 불어넣는 여자였다. 하지만 개츠비가 저지른 부정직이 사회에 미친 파급효과는 아마도 데이지가 미친 것보다는 크리라. 부정직한 한 여자를 위해 부정직한 일을 자행한 한 남자가 더 큰 비난을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남자는 때론 한 여자 때문에 부정직해지고 그 부정직은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제는 여자의 부정직이 심하게 비난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남녀의 차별이 사라졌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이 소설을 쓰던 시기는 1920년대 미국이 그 배경이다. 그때의 여자와 지금 여자의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지금은 여자도 사회, 경제, 정치의 한 축이 되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192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의 권리는 눈에 띄게 신장되었고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그 역량을 나타내고 있다. 음양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다. 그만큼 사회적 책임도 커졌다. 여성도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많아짐을 의미한다. 여성의 부정직은 더 이상 비난을 피해 갈 수 없다.
V zero
작금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정치적 사건은 한 여성의 부정직이 얼마나 국가와 사회를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부정직이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을 앞에 드러내지 않고 남자를 이용해 뒤에 숨어서 모든 부정직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위선과 기만이다. 한 남자만 구워삶으면 세상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한 여성의 위대함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영향력은 종종 남성의 부와 권위와 지위를 통해 발휘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여성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다. 이건 마치 주연배우와 감독을 모두 하고 싶은 마음과도 같다. 욕심이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위대한 김여사>, 나중에 소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써보고 싶기도 하지만 시간이 없다. 이미 영화[신명]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저자가 <위대한 개츠비>에서 말하는 여성의 부도덕은 그저 한 남자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정도라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성의 부도덕이 야심을 품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1920년대의 부도덕한 여성은 그저 거짓말을 일삼고 남자의 순정을 짓밟고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여성은 남성처럼 사회와 조직에서 야심을 품고 성공과 권력을 꿈꾸는 자들이 많다. 그런 여성이 부도덕하다면 이제 그녀들도 비난과 지탄의 대상 혹은 영구 격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개츠비도 뭐 그리 위대하다고 볼 수 없죠. 그가 불법으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일이잖아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만한 부를 이뤄냈다는 것은 아무래도… 드러나지 않은 소설의 비하인드를 생각해 보면 위법한 개츠비가 될지도…”
누군가 얘기했다. 같은 소설을 읽어도 생각은 천차만별이다. 문학의 장점이다. 다양한 상상을 펼칠 수 있다. 작가(소설가)의 손에서 떠난 이야기는 이제 독자의 것이다. 다른 장르의 독서와는 달리 문학(철학도 그런 편)은 자유로운 열린 토론이 가능하다. 가끔 문학 토론을 할 때 문학에 마치 정해진 답(저자의 의도)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는 분들이 있다. 작가도 허락하지 않은 것을 자신이 입에 담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우리가 문학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문학을 읽고 내가 느낀 것을 나누려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문학을 통해 찾아내고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학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마치 국어 문학 시험의 답안처럼 말하려 한다. 그건 쳇 GPT에게 물어보면 된다. 굳이 모여서 나눌 필요는 없다. 마치 소설을 학문으로 접근하려는 듯하다.
문학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은 문학을 읽고 쓰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문학의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삶을 그린 것이고 개개인의 삶이 모두 다르듯이 그 문학을 접하는 개개인은 모두 각자의 상상에 빠질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자이지 구속하려는 자가 아니다. 문학은 더욱 그렇다.
희소한 개츠비
개츠비는 데이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불법을 저지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개츠비의 한 여자를 향햔 변치 않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의 제약과 유혹 모두 그의 사랑 앞에서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함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자들이 많다. 그건 아마도 그 시대에 모두가 사람을 성공의 수단과 욕망 충족과 정욕의 해소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만연하던 때 개츠비 같은 순수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나는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에 <희소한 개츠비>라는 다른 책이름을 지어 보았다. 위대하다는 것은 희소함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유행에만 휩쓸려 다닐 때 그것과는 무관하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은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과거 우리는 종종 그런 사람들을 위인이라 불렀다.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진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현재의 안락함과 자유함을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현실을 무시한다
같은 소설을 읽고 누군가는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은 개츠비의 부도덕에 집중했다.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맹목적인 사랑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개츠비의 부도덕은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당시 사회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맥락과 그 시대상을 봤을 때 개츠비는 밀주거래 혹은 불법적인 상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이다.
스콧 피츠 제럴드는 어쩌면 자신의 부도덕하고 타락한 삶을 개츠비를 통해 드러내려 했던 모양이다. 그도 소설가로 대성공을 이루고 매주 아내와 함께 파티를 열고 사치에 찌들어 살았다. 그는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 가난하던 습작 시절 한 여자를 향한 애절하던 그런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소설가는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소설 속에서 꿈꾸지만 그 꿈이 이뤄지면 더 이상 그것을 꿈꾸지 않는다. 그래서 가진 것이 많고 현실의 부족함이 없는 자는 상상을 쓰지 않는다. 어중간하게 가진 자들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더 많은 부와 현실의 결핍을 채우려 분주하게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부터 동떨어져 초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만이 그것을 리얼하게 상상하고 글로 옮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꿈을 현실로 바꿨다. 그는 소설가로 성공해 그 사랑하는 여자(젤다)를 얻게 된다. 그리고 둘이 함께 타락한다. 놀고 즐기는데 쓴 돈으로 빚에 허덕이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또 열심히 글을 써야 했다. 작가로서의 성공은 그와 동시에 그의 타락과 파멸의 시작이었다. 이후 불행이 밀어닥친다. 사랑하는 아내는 정신병자가 되어가고 돈에 중독되어 돈에 얽매이며 살게 된다. 소설 속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면서 불행이 시작된 것과 비슷하다. 희망이었던 데이지는 어느 순간 절망이 되었고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존재가 되었다.
고전과 대중 사이
스콧 피츠제럴드는 고전 작가이면서도 상업 작가였다. 보기 드물게 사치와 글쓰기를 병행한 희귀하고 희소한 작가이다. 산업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과 아주 잘 어울리는 작가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고전과 교과서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필독 작가가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 작가이다. 둘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둘 다 유명하지만 너무 다른 색깔을 지녔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의 호황기 타락한 남녀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여자의 부정직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그 여자로 인해 부정직한 삶을 선택한 한 남자의 사랑이 순정적이고 위대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모순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평할 수 있는 것은 개츠비 같은 남자를 이제 더 이상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개츠비 같은 여자가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대중은 이런 스토리는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가 오로지 한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순수하게 타락하는 스토리는 본 적이 없다. 그런 걸 보면 아직도 우리의 관념은 아직도 남자가 여자의 사랑을 구하려는 스토리에 너무도 오랜 시간 지배되어 온 모양이다. 그것만이 아름다운 감동을 준다. 그건 아마도 사랑이 남자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자녀로, 또 그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가 커서 다시 그 사랑이 그처럼 흘러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 아닐까?
데이지의 부정직은 그리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그 위대하고 순수한 사랑이 전해지고 흘러가지 못하고 끊어졌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것이 개츠비의 인생으로 봤을 때는 비극일 수밖에 없다. 비극만이 감동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비극을 보며 비극적이 되지 않으려 하기에 감동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