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44 (개정판)
"띵똥 띵똥"
아침부터 초인종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베갯속으로 머리를 파묻는다.
간밤에 린주임의 송별회 회식으로 또 과음을 해버렸다. '맨날 술이야 ♪ ♬' 바이브의 [술이야]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노래는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마신 술이라지만 난 뭘 잊기 위해 마시는 걸까? 술만 먹은 다음날이면 항상 숙취와의 전쟁이다.
린주임은 그날 나와 밀담이 있고 며칠 뒤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어제 그의 송별회 겸 회식을 했다. 나의 사전 조치로 장총경리는 연태 DB중공업 총경리와 연락을 취했고 그의 입사를 허락 받아놓은 상태다. 급여 조건이 이곳보다는 약간 낮은 이유로 그에게 다른 직원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권고 사직으로 처리하여 퇴직금과는 별도로 몇 개월치의 급여에 상당하는 위로금을 챙겨줬다.
린주임은 전날 송별회에서 나를 붙잡고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꽤나 난처한 곤욕을 치렀다. 녀석은 DB중공업 식구가 되었으니 나중에 또 보게 될 거라고 몇 번이나 귓속말로 달래주었지만 소용이 없다. 다른 직원들은 그저 그가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만 알고 있는 터라 나에게 보이는 격한 행동에 다들 이상해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인력 구조 조정은 계속 이어졌다.
"띵동 띵동"
"아~ 도대체 토요일 아침부터 누구야?"
벨소리가 또 다시 집안에 울려퍼진다. 실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오전 9시를 넘어가고 있다. 이 시간에 누가 올 사람이 없다.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초인종 소리에 몸을 일으켜서 좀비처럼 현관문으로 걸어간다. 한국의 집이었으면 애벌레처럼 기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중국이다. 장판이 아닌 차가운 타일 바닥 위를 기어갈 순 없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찾아신고 질질끌며 스케이트 타듯 나아간다.
"是睡呀?"(누구세요?)
"띵동 띵동"
대답 없이 초인종만 계속 울려댄다. 밖을 보는 현관 눈구멍을 통해 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전고리를 걸고 문을 살짝 열었다. 그녀다. 내 집을 제 집처럼 쓰는 엽기녀다.
춘옌과의 만남 이후 난 그녀를 '엽기녀'라 명명했다. 나만 알고 있는 거지만 그녀의 캐릭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 속 전지현과 닮아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관문 옆 벽에 기대어 쓰러져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색 티셔츠에 검정색 진을 입은 모습이 그전에 만났을 때와 의상만 바뀌었을 뿐 또 검은색이다. 저승사자도 트렌드에 맞춰 색깔은 어쩔 수 없지만 스타일 변신은 하는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의 화려하고 화사한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얕은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힘겹게 앉아있다.
"春艳!什么事儿了?"(춘옌! 무슨 일이야?)
나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검은 모자 아래로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힘겹게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벽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그녀의 한쪽 팔을 잡고 부축한다.
“没什么事,就让我在你家休息一会儿吧” (아무일도 없어, 나 네 집에서 좀 쉴께)
그녀는 전혀 괜찮지 않은 모습으로 내 팔을 뿌리치며 홀로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날 밤처럼 내 방으로 들어가더니 침대에 꼬꾸라진다.
그녀는 침대에 몸을 뉘이자 마자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 걸친 그녀의 다리를 침대 위로 올리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정신을 잃을 것인지 잠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나를 안심시켰다. 당황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아침 댓 바람부터 이게 뭔 날벼락인가? 그리고 내 침대는 어쩌다 그녀 전용이 되어버린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무슨 일인지 내막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들은 나의 여유로운 중국 파견 생활의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태초의 제우스가 만든 여인 판도라는 분명 천상 미인이었을 것이다. 침대 위에 쓰러져 있는 새끈거리며 잠든 그녀의 얼굴에서도 태초의 순결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판도라가 열어버린 상자는 세상의 모든 악을 불러오지 않았던가? 창세기에 에덴동산의 하와(이브)도 하나님의 말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죄로 우리는 이렇게 원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여자는 선하디 선한 아름다움 뒤에는 악이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홀려선 절대 안 돼~!'
"水...给我水"(물... 물 좀 줄래)
"哦~我知道了,你稍等!"(어~ 그래 알았어 잠깐만!)
난 한 치에 망설임도 없이 번개 같은 속도로 물을 담아 그녀에게 대령했다. 세상 남자는 다 똑같다. 선악을 구분하기 전에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다. 하나님은 수컷을 그렇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주신 본능을 거역하는 것이 더 큰 죄일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어쩌면 선악과를 먹고 자의식을 가지고 선악을 구분하는 순간부터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신이 주신 본능에만 충실하며 살아가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나는 누워있는 그녀의 몸을 일으켜 물컵을 손에 쥐어준다. 그녀의 몸은 자율신경계가 고장 난 건지 온몸을 나에게 온전히 기대어 물 컵만 들어 목을 축이더니 이내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对不起"(미안해)
"啊…没事,休息吧"(아... 아니 괜찮아 쉬어)
"你可不可以来抱我?我有点冷..."(여기 와서 나 좀 안아줄래? 좀 추워...)
난 물컵을 받아 들고 방을 나가려는 나를 불러 세운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 있다. 그 이불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찬물을 줘서 그런가? 더운 물을 줄걸 그랬나? 온갖 잡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물컵을 테이블에 놓고 조용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 몸이 닿지 않게 떨어진 채 머뭇거리고 있다.
"抱我~"(안아줘~)
그녀의 말이 용기가 되었을까? 한쪽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나의 가슴 안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맞닿으며 서로의 체온이 전도된다.
"아~"
"怎么了?"(왜 그래?)
"没事"(아무것도 아냐)
그녀의 떨림이 전해진다. 그 떨림을 잠재우려 그녀를 더울 밀착 해서 끌어안는다. 나의 손길이 너무 강했을까? 그녀는 나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얕은 신음을 내뱉는다. 그 때 검은 티셔츠 속 그녀의 몸에 알 수 없는 붉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这些都是什么呀?你到底发生什么事了?"(이 상처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你别问了就抱我嘛,我想睡会儿"(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안아줘, 나 좀 잘게)
"哦~~ 知道了"(어~~ 그래~ 알았어)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그녀의 떨림은 나의 체온 때문인지 잠에 빠져들어서 인지 차츰 멎어 들었다. 그렇게 그녀를 안은 채로 그녀가 깨지 않게 미동도 않은 채 멈춰있는 나의 몸은 조금씩 굳어간다. 미이라가 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처음 그녀와 맞닿은 살결의 느낌과 체온에 쿵쾅대던 심장도 이제 조금씩 멎어가고 있다.
"几点了?"(몇 시야~?)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정말 심장이 멈추고 미이라가 될 뻔했다.
"五点了"(5시)
"咦~ 时间过得真快,我饿了吃饭吧"(헉~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배고프다 밥 먹자)
춘옌은 일어나자마자 밥 타령이다. 그래도 일어나 줘서 너무 고맙다. 집에 마땅히 먹을 것이 없어 나가자는 말에 그녀는 나가기 싫다며 집에서 먹자고 한다. 찬장에 남아있는 라면을 발견했다. 계란과 다진 마늘 그리고 약간 말라비틀어진 대파를 썰어 넣고 아침마다 빵에 발라먹는 땅콩버터를 한 숟갈 풀어 넣었다.
"做好了出来吃吧"(다됐다 나와 먹어)
"知道了"(어~)
"哇~汤水真好喝,用什么做的呀?"(와 국물이 끝내주는데, 뭘로 만든 거야?)
"这是不能说得秘密呀"(말할 수 없는 비밀이야)
그녀는 내가 끓여준 라면 한 그릇에 창백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는 듯 보였다. 난 그렇게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보호자가 부양가족을 먹이는 느낌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你身体的伤口是什么呀?"(니 몸에 그 상처들 뭐니?)
"这也是不能说得秘密呀"(나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야)
"헐~"
"我会告诉你,所以你也告诉我吧"(말해줄게 너도 말해줘)
"我才不要了,这我更亏本"(싫어, 내가 더 손해야)
"小气”(치사하네)
"好喝~ 我们做爱吧!"(아 맛있다, 우리 섹스하자!)
그녀는 내가 끓여준 라면을 국물까지 다 마시고는 그릇을 식탁에 놓고는 또 한 번 나를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정녕 미이라가 될 운명인가? 그녀와 있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한다. 제명에 못 죽는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제 좀 감이 온다.
그녀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던지고는 내 앞으로 와서 나의 무릎 위에 앉아버린다. 그리고 나의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의 입술을 나의 입술 위에 포갠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행동들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안 당하면 또 어쩔 것인가?
그녀의 입술이 아라비안 나이트 동굴의 벽이 열리듯 천천히 열리고 있다. 들어가지 않으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없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동굴 입구를 배회하던 그것들은 서로 더 깊숙한 곳을 탐험하려 한다. 또 다시 심장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쉴 틈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나의 티셔츠를 끌어올린다. 그렇게 나체가 된 상반신은 더블버거 속 패티처럼 서로 포개어진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나의 얼굴을 그녀의 풍만한 가슴 골 안으로 파묻으며 깊은 신음을 내뱉는다.
나는 그녀의 탄력 있는 두 다리를 들어 올려 소파로 향한다. 그녀를 소파에 눕힌다. 그녀의 상체에 길고 가느다란 붉은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에 맞은 듯한 붉은 상처들이 그녀의 새하얀 살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끓어오르던 성욕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 이성(理性)이라는 녀석이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멈칫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손을 뻗는다.
"不要看别的,只看我的眼睛!"(다른 곳은 보지 마, 내 눈만 바라봐!)
그녀는 나를 끌어당겨 다시 품 안에 넣는다. 암탉이 알을 품듯이 가슴 깊숙이... 그녀의 살 냄새가 다시 욕정을 불러내고 이성을 밀어낸다. 그녀의 타이트한 청바지가 나의 완력에 뱀 허물처럼 벗겨져 나간다. 그녀의 시선을 놓지 않고 본능적으로 또 다른 동굴을 찾아 헤매인다. 그리고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를 감싸 안는 그 동굴 속의 포근함과 안락함에 빠져든다. 오늘 밤은 그녀의 동굴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
태초의 사피엔스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해 찾아든 동굴 속의 안락함은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한 번 중독되면 계속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