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64 (개정판)
"올해는 정말 버티기가 만만치 않네 그려! 해가 갈수록 힘들어지는구만"
"그러게 나도 오늘은 차례 지내고 삼촌들한테 둘러싸여서 한 소리 들었네"
"그 놈의 결혼이 뭔지"
"참~ 우린 뭐 안 하고 싶어 안 하남"
"그래 없어서 못하지 캬캬캬"
한가위(추석)의 밤이 찾아오면 나를 포함한 꼬치친구 다섯은 불나방이 가로등으로 모여들 듯 약속이나 한 것처럼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시내로 모여든다. 번화가에 위치한 한우 고깃집에 자리를 잡았다. 싱글남의 명절 보너스는 오로지 자신의 몸보신을 위해 과감히 투자한다.
다들 부산 토박이라 명절에도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명절날 가족 친지들과의 같이 해야할 의무의 시간이 끝나면 어둠을 틈타 우리들만의 모임이 시작된다.
동구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모태신앙을 가진 신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들을 따라 교회를 따라다닌 탓에 나도 기독교가 친근하다. 웃긴 건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산에 가면 절에 간다. 불교도 기독교도 뭐 내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주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하는게 내 생각이었다. 이상하게도 둘 다 평안한 기분이 든다. 양다리는 여자한테만 걸치는게 아닌가 보다.
"나 헤어질까 봐~"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지영이랑 무슨 일 있어?”
"헐~ 안돼! 절대 그러지 마라~"
“나도 반댈세!”
배부른 녀석이 하나 있다. 귀덕는 사귄 지 일년이 다되어가는 여자 친구가 있다. 우리 중에 유일하게 임자 있는 녀석이다. 오늘 녀석의 술잔이 자주 비워지는 것이 심상치 않다. 옆에 앉은 재득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달랜다. 우리도 귀덕의 여자 친구와 여러 번 술자리를 가졌다.
작은 무역회사를 다니는 밝고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우리와 처음 만난 날 술자리를 주도하며 금방 친해질 정도로 남자들과의 친화력이 LTE급이었다.(참... 이때는 3G 시대였음) 그 중에서도 재득과 동구는 귀덕의 여자 친구랑 가장 의기투합하며 술잔을 기울여서였을까? 결사 반대를 외친다. 둘은 귀덕의 불안한 이별 조짐에 그나마 한 명이라도 있는 술자리의 홍일점을 잃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야~ 지영이가 어때서?"
"그래~ 애 착하지 소박하지 싹싹하지 그리고 술 잘 먹지 "
"야~ 그게 칭찬이냐?"
"그래서 오늘 지영이 안 부른 거야?"
"아~ 아쉽네 지영이가 있어야 이 칙칙한 분위기가 사라지는데... 쩝"
귀덕은 우리에게 보이는 그녀의 장점들이 불만이란다. 우리들 입장에선 이해가 가지 않지만 뭐 녀석은 우리와는 다른 행성에서 왔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런 녀석이랑 사귀는 지구인 지영이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는 거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둘은 집이 멀어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난다.
그녀가 김해에 살다 보니 주중에 만나기가 애매하다고 한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 근처에서 데이트를 한다고 한다. 매주 고정된 일정표 같은 데이트 시간과 코스는 둘의 감정도 고정시켜놓은 모양이다. 의무적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귀덕은 이미 마음이 떠난 것 같다.
"다른 여자가 자꾸 눈에 들어와"
"쨔쉭! 이제 실토를 하는 구만"
"누구누구?"
“오~ 역시 뭔가 있어”
“조용히 해봐봐. 그래 뭔데 뭔데?”
다들 귀덕의 새로운 썸 스토리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돌망한 눈으로 귀덕에게 집중한다. 녀석은 초반부터 연거푸 소주를 들이켜더니 술이 취한 모습이다. 귀덕은 그녀와 교제 중에도 그녀 몰래 소개팅을 했다. 그 때 만난 여자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고 한다.
회사 동료의 소개로 만났다는 외국 국적 항공사의 승무원이라고 한다. 녀석은 그 여자 외모에 첫눈에 반해버린 듯 보인다. 남자는 눈이 멀면 몸이 반응한다. 집이 창원이라는 여자의 집까지 부모님 차까지 빌려 타고 주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갔다고 한다. 녀석의 성격을 잘 아는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관심이 더욱 증폭된다.
"와~ 양다리네!"
"와~ 쓰레기네!"
"와~ 졸부럽네!"
"그래서 우짤 낀데?"
"아~ 나도 몰라~"
다들 그의 충격발표에 한 마디씩 투척한다. 녀석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또 술잔을 비운다. 그는 이미 지영이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놓아주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그것 때문에 녀석은 더 힘든 모양이다.
남자보다 여자가 남자를 더 사랑할 때 생기는 현상은 단호하게 끊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동물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월한 수컷은 여러 암컷을 거느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 수컷의 본능을 사회도덕적 규범이라는 것으로 규제하기에 이런 수컷의 행동은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음지 속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더 큰 스릴과 흥분을 가져다주고 중독되고 습관이 된다. 역사적으로 매춘과 성 상품화가 사라질 수 없는 것은 그런 수컷의 원초적인 본성을 자본주의에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귀덕은 여자 친구에게 잘해준 게 없어서 받기만 해서인지 냉철함의 대명사인 녀석도 이성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여자 친구의 그를 향한 사랑은 일방적이었다. 주도권을 뺏긴 연애는 남자에게 흥미를 잃게 만든 것일까? 연애 시기 남녀 사이의 긴장감은 서로의 신선도를 올려주고 그 신선도는 서로의 호감을 지속시킨다. 편안함은 곧 상대방에 대한 나태함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인간은 본디 사악한 존재이다. 그 즈음 난 맹자의 성선설보다는 순자의 성악설에 생각의 무게가 옮겨가고 있었다.
"우에에웩~!"
귀덕은 시내 한 복판에서 전봇대를 붙잡고 찌짐(전)을 부치고 있다. 녀석이 술에 취한 건 언제 적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가물하다. 녀석은 셀프 컨트롤 능력치가 만렙이라 자신의 운동신경을 마비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래도 이성 문제는 그런 녀석의 컨트롤능력까지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가보다. 재득은 코를 막고 귀덕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다.
"야~ 우리도 여자 만들러 가야지"
"간만에 나이트? 콜?"
"야~ 귀덕인 우짜고?"
"아~놔 오늘 저 녀석은 왜 하필 오늘같은 날 저러는 거야? 정말"
외로운 명절 밤을 이대로 보낼 순 없다. 회사에서 받은 명절 보너스는 이 밤을 위해 쓰라고 주는 것이다.
"가위바위보!"
"아쒸~!"
춘곤이 낙찰되었다. 녀석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삼세판을 외친다. 그걸 받아줄 우리가 아니다. 춘곤은 아직 학생이다. 뭐 졸업은 했지만 아직 공부 중이니 학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방사범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공시족이다. 벌써 3년째 접어들었다. 사회에 찌들어 변해가는 우리와는 달리 학생 때의 순수함을 고히 간직하고 있다. 그 순수함이 이제는 다수의 사회인들에 의해 철없음으로 바뀌어 보일 뿐이다. 녀석은 나이트클럽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귀덕을 택시 뒷좌석으로 쑤셔 넣는다.
"야! 딱 기다려~ 나 금방 올 테니까!"
남은 우리 셋은 손을 흔들어 보인다. 우리는 자리를 옮긴다. 서른은 이제 진정한 성인이다. 성인은 성인답게 놀아야한다. 우리는 고심 끝에 나이트로 향한다. 택시가 연산동의 유흥가 골목 앞에 멈춰 섰다.
부산에서 제일 물이 좋다는 곳이다. 입구에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검은 정장의 깍두기 형님인지 동생인지 모를 후기 인상파 남성들이 줄을 서있다. 여러 명의 젊은 여성들이 삼삼오오 팔짱을 끼고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장하고 있다. 고객 행위를 하는 건지 치안 담당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나이트의 목적은 낚시(부킹)다. 광활한 바다에서의 낚시가 매력적이고 낭만적이긴 하지만 확률이 낮다. 낚시꾼이 생선 밀집도가 조밀한 낚시터를 찾는 이유는 그 낚일 때의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손맛을 잊을 수가 없다.
여기도 물 반 고기반이다. 물론 낚시꾼도 많다. 하지만 돈 많은 낚시꾼은 누군가가 계속 물어다 준다. 우리는 방에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들어온 생선의 소유 여부는 개인 역량에 달렸다. 물어다만 주지 먹여주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화려한 밤의 낚시터를 향해 굳은 결의와 함께 입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