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63 (개정판)
"희택씨 주말은 잘 보냈어요?"
"예.. 그냥 뭐"
탕비실에서 현지씨와 쟁반에 놓인 여러개의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부어넣고 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은 전체 팀 회의가 있다. 8시 정각 업무 시작 시간에 맞춰 회의가 시작된다. 기획실장이 공석인 관계로 도대리(팀장대행) 회의를 진행하지만 가끔씩 사장이 들어와 농담 섞인 연설을 늘어놓고 갈 경우도 있다.
미화 씨가 출산휴가 중이라 요즘 현지씨와 내가 아침 팀 회의의 커피 메이커가 되었다. 회의 전에 미리 탕비실에서 팀원들을 위해 그녀와 함께 차를 준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감정은 없지만 공적으로 쌓인 원한(怨恨) 때문인지 그녀의 인사말이 거북스럽다. 이유 없이 대꾸하기가 싫어진다.
회사라는 곳에서의 인간관계는 업무가 최우선이다. 아무리 예수 같은 성인의 성품을 지녔더라도 업무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면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공적인 관계가 깨진 자와는 사적인 관계는 맺을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다.
"조선 기자재 협동조합에서 조선업계 인력을 대상으로 역량 강화 차원에서 외국어 강좌를 지원한다네요. 업무 때문에 저녁 반은 아무래도 힘들 테니까 관심 있는 분은 출근 전 아침 반을 신청하시길 부탁드려요. 참! 수업일수의 반 이상 못 채우면 회사로 교육비가 청구됩니다. 회사에서는 개인 급여에서 차감시킨다고 하니 참고하세요"
회사는 절대 손해 보는 짓을 안 하려는 것 같다. 뭐 나름 나에게 좋은 기회인 듯하다. 영어가 시급하다. 토익은 둘째 치고라도 기업 채용 과정에서 기본으로 보는 영어면접을 보려면 스피킹이 되어야 한다. 망설임 없이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적어 올렸다. 다시 스펙쌓기에 돌입해야 한다.
기대하던 첫 수업이다.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이른 출근에 잠이 떨깬 얼굴로 하품을 하며 강의실로 들어간다. 회사 근처의 조선기자재 협동조합 건물에는 이른 새벽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급영어회화를 신청했다. 영어면접을 위한 회화라면 초급보다는 중급이 좀 힘들더라도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과감히 신청했다. 초급반인 옆 교실은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뭐든지 시작은 북적되기 마련이다. 저 중에 태반은 시작만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반면 중급반은 한산한 모습이다. 나를 비롯한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강의실에 앉아있다. 중년의 나이 지긋한 남성분들부터 파릇한 신입 티가 벗겨지지 않는 20대 초중반의 청춘들까지 다양한 연령이 앉아있다.
"Hi everyone~ nice meet you guys! I'm Jessica!" (모두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타이트한 블랙진에 가슴이 넓게 파인 붉은색 라운드넥 티셔츠 위에 검은 가죽재킷을 걸친 모습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일반적인 교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진한 화장 때문인지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강한 인상을 준다. 얼굴에 항상 미소를 띠고 있어 강한 인상을 그나마 중화시켜주고 있다.
항상 그렇지만 외국어 회화 수업은 항상 자기소개로부터 시작된다.
"I'm Dawson! nice to meet you guys, I hope that I can make a good relationship with you guys in this class. Let's study hard together!" (난 도슨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 수업에서 너희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함께 열심히 공부합시다!)
다들 유창하진 않지만 자신만의 영어실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소개를 마친다. 확실히 초급반과는 다른 장문의 스피킹이 가능하다. 물론 문법이나 어휘의 사용이 정확하진 않지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낸다.
선생은 각 학생들의 소개가 끝날 때마다 그 학생이 말했던 문장 중에 틀리거나 적절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해주며 다른 학생들에게도 같이 설명해준다. 괜찮은 방식의 진행인 것 같다.
그녀는 삼십 대 초반의 미혼 여성이다. 캐나다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 중이라고 한다. 영어 과외나 강의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고 한다. 졸업하면 나중에 영어권 국가로 가서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얘기한다.
"Do you have boyfriend?"(남자 친구 있어요?)
"No I don't have yet! Why you ask that kinds of private?"(노 아직 없어요, 왜 그런 개인적인걸 물어보죠?)
"Is that true? because I'm full of attention to you.haha"(사실이에요? 제가 선생님한테 관심이 많아서 하하하)
"Oh thank you, could you please keep that attention in your pocket? haha"(오~ 감사해요, 그 관심을 호주머니에 넣어주실래요? 하하)
내 옆에 앉아있는 중년 아저씨의 느닷없는 질문에도 그녀는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그녀를 향한 아재들의 노골적인 농담이나 관심이 익숙한지 그녀는 크게 동요 없이 웃음과 함께 재치있는 멘트로 받아친다. 그녀는 이 바닥에서 적지 않은 경력이 쌓인 노련한 여성처럼 보인다.
"희택 씨! 영어 쌤 가슴골 봤어? 우와~ 넘 섹시한 거 같지 않아? 색기도 많은 거 같고"
"그래요? 뭐 외국에서 좀 오래 살아서 그런가 보죠"
"반에 있는 아저씨들 다 선생 가슴골만 바라보는 거 같던데… 아침 잠이 확 깨네 하하하"
기획실에 같이 근무하는 동갑내기 보현씨다. 푸근한 덩치와 수더분한 성격을 가진 그는 IT 파트의 막내 사원이다. 전사 수주 매출, 경영회의 등의 전산 프로그램 개발을 담당하고 있어 나와 관련 업무로 자주 얘기하는 편이다. 그는 일찌감치 결혼을 해서 이미 애가 둘이나 딸린 아빠가 되었다.
입사와 동시에 결혼을 한 건 아마 부유한 그의 집안의 지원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꽤 큰 가죽원단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라고 한다. 동갑이지만 입사가 나보다 빠르다. 친근하지만 서로 존칭을 쓴다. 그도 유학파라 영어를 곧 잘하는 편이다. 그도 이직을 준비하는 건지 IT파트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희택 씨야~ 이번 주 토요일 뭐해요?"
"왜요? 뭐 특별한 건 없는데... 등산이나 갈까 생각 중이에요"
"등산? 헐...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요?"
"... 예? 하하"
쓸데없는 짓이라는 말에 내가 쓸모 없는 인간 같다는 말로 들린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다시 미소 모드로 빠르게 전환한다.
"나랑 아침에 조조 할인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요?"
"예?!"
급작스런 동성의 데이트 신청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회사 경영 악화로 토요일 특근을 강제로 없애버렸다. 특근비를 없애라는 사장의 특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행운인지 불행인지 토요일은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평일에 무급 야근이 더 늘었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사실 토요일은 대부분의 직원들이 눈치 보고 출근해서 오전에 시간만 때우다가 오후 2~3시쯤 퇴근해도 하루 일당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용돈이라도 번다는 생각으로 다들 나왔던 것이다.
"갑자기 웬 영화를 저랑?"
"아~ 토요일 날 집 나와서 갈 때가 없어서 하하하"
그는 토요일 특근이 사라지고도 계속 출근을 핑계로 집을 나온다. 집에서 애를 돌보며 마누라 잔소리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것이다. 좀 쉬고 싶은데 집에서는 도저히 쉴 수가 없다며 하소연이다. 커가는 아이에게 아빠의 육아 지원이 필요해 보이지만 그는 육아보다는 자신의 휴식이 더 절실해 보인다. 매일 야근과 장시간 착석 근무로 인해 쌓인 피로와 뱃살은 이제 갓 서른이 된 그를 저속한 농담을 던지는 차,부장 아재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만들어 버린 듯 하다.
난 휴일까지 회사 직원과 함께 영화를 볼 만큼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게 만약 동성이라면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