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61 (개정판)
"와~ 살아서 돌아왔네"
"오! 희택 씨~ 몸에서 중국 냄새 난다. 큭큭"
"거기서 계속 살 줄 알았는데 정말 돌아왔네 하하하"
“생각보다 정말 빨리 돌아왔는걸”
기획실 직원들의 환영사로 복귀 첫 출근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느슨했던 옷차림은 다시 꽉 조여 맨 넥타이에 하얀색 셔츠 그리고 딱딱한 구두로 바뀌었다. 모두들 반기는 분위기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리 크게 반갑지 않다. 입가에 연신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내가 없는 동안에 전략기획팀에 변화가 생긴 듯하다. IT파트 쪽은 그대로인데 기획 파트에는 도대리 팀장 대행 옆에 노대리가 앉아있다. 그 앞으로 상한씨와 지호씨가 나란히 앉아있고 그 앞에 키다리 현지씨가 앉아있고 그 옆자리가 비어있다. 내 자리인 듯하다.
미화 씨는 출산 휴가로 자리를 비웠다. 노대리가 해외영업부에서 전략기획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 배경에 귀추가 주목된다. 사내에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다. 노대리를 해외 계열사 관리 책임자로 데려왔다는 소문과 중국 계열사 주재원으로 파견을 보내기 전에 얼마간 계열사 관리 업무를 파악하려고 왔다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해 보인다. 사장의 알 수 없는 인사명령으로 기획실에는 두 명의 동급 레벨의 라이벌이 자리 잡는 상황이 벌어졌다. 도다리와 노가리의 만남이다.
도대리와 노대리는 입사동기는 아니지만 나이가 같다. 도대리는 공채로 들어온 박힌 돌이고 노대리는 경력으로 입사한 굴어온 돌이다. 하지만 년차도 같고 둘 다 각자의 파트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던 잔뼈 굵은 실무담당들이다. 노대리에게 기획 업무는 생소하지만 나의 소견으로 볼 때 그의 평소 업무 능력으로 볼 때 크게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같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순 없는 법이다. 둘의 사이가 좋을 수 없다. 더욱이 노대리는 나의 이전 부서 사수이다. 나에게 좋지 않은 상황임 분명해 보인다.
"희택! 현지씨가 맡아하던 계열사 경영분석 자료 정리해서 보고할 수 있도록 2분기, 3분기 같이 정리해서 이번 주 안으로 결재 올려. 그리고 이제부터 계열사 관련 업무는 노대리님한테 검토 받고 결재 올릴 수 있도록 알겠지?"
"아.. 예 알겠습니다."
오자마다 일 복이 터진다. 2분기는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 결재가 안됐단 말인가. 자리로 돌아온 나는 옆에 앉은 현지 씨에게 그 동안 정리한 계열사 경영분석 자료를 요청했다. 혹시나 했던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그녀가 메일로 보내준 자료는 2분기부터 하나도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한 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옆을 쳐다보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모니터 앞에 놓은 비스킷을 집어 먹으며 뭘 보는지 혼자 흥얼거리고 있다.
이제 아래 위로 난관이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것일까? 더구나 중국어는 더 이상 나의 비밀병기가 될 수 없다. 노대리, 현지씨 모두 중국어를 할 줄 안다. 나만의 비밀스런 공간마저 사라졌다. 양주에서의 생활이 벌써 그리워진다. 오늘부터 다시 야근이다.
"오늘은 희택 씨 복귀 기념으로 조촐하게 회식이 있을 예정이니 일과 안에 업무 종료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도대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부서원들에게 통보한다. 그럼 내일부터 야근이다.
"자~ 희택 씨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며! 건배~"
"수고했어! 사장님께서 양주에 투자금이 생각보다 빨리 회수돼서 흡족해하시더라"
"아~예 뭐 제가 한 게 있나요~"
도대리는 비워진 잔을 채워주며 어깨를 다독거린다. 기획실 팀원들은 모두가 그 동안 중국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달라며 아우성이다.
"희택 씨 잠깐 이리로"
노대리가 손짓하며 나를 옆으로 부른다. 자리를 옮겨가는 나를 도대리가 힐끔 쳐다본다. 나는 노대리가 있은 곳으로 술잔을 들고 이동한다. 그는 자신의 잔을 비우고는 티슈로 입에 대었던 자리를 한 번 닦고는 나에게 건넨다.
"자! 한잔해 그 동안 수고했어!"
"예 감사합니다."
"내가 기획업무는 잘 모르니 앞으로 계열사 업무 잘 좀 부탁해~"
"아~ 네..."
나는 그의 잔을 비우고는 물 컵에 입 자국을 살짝 담그고 나서 티슈로 닦아 그에게 건네며 잔을 채운다. 때로는 과도한 주도(酒道) 액션이 필요하다. 마음보다는 과도한 액션이 때론 선임자에게 충성심으로 비춰질 때가 많다. 술자리는 그런 자세와 행동을 테스트하는 자리로 이용되기도 한다.
"참! 얘기 들었어?"
"예? 무슨 얘기요?"
"그거 들었어? 양주 조선소 총경리를 죽인 그 접대부 여자가 잡혔다던데…"
"예?!"
"엊그제 태평양 그룹 본사에 합자 해산 회의록 때문에 연락했다가 들었는데 잡힌 그 여자 사형 판결 받았다던데… 역시 중국은 참 무서워 그치?”
“예!? 저…정말이예요?”
“왜 그렇게 놀래?”
순간 공항에서 춘옌의 마지막 모습이 다시 머릿 속에 떠오른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헤어짐은 또 다시 만남으로 이어진다(合久必分分久必合)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살아서는 이루기 힘들어 보인다. 그녀가 했던 그 말은 만남과 헤어짐은 계속 되지만 그건 같은 만남이 아닌 새로운 만남을 의미하는 것인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복음 15:13] –
성경 속에 말처럼 그녀는 자신이 죽을 걸 알고서도 나를 살리려 자신의 숙주를 죽이고 말았다.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저지른 살인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인가? 적어도 인간이 만든 세상은 그걸 용서하진 않아 보인다.
그녀는 이제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행인에게 미소를 파는 민들레의 삶을 멈추고 한 곳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별이 반짝이던 한적한 양주의 밤하늘은 사라지고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환한 유흥가의 거리 속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별빛 대신 그녀의 모습이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