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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평범한 남자 EP 62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얘기 들었어? 오떡이 결혼한데"

"정말이야?"


꼬치친구들과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동구는 내가 없던 사이 적극적인 등산 동호회 활동으로 동호회 운영진이 되었다. 동구 녀석이 동호회 사람들을 통해 오떡이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한국을 떠나고 난 후 여기저기 맞선을 보고 다닌 모양이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연상의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얼마 전 친한 동호회 친구들과 모인 개인적인 술자리에서 청첩장을 돌렸다는 것이다. 나와 헤어진 반년이라는 시간은 그녀에겐 결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 즈음 '연애와 결혼이 따로'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결혼이라는 건 아직 머나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모아논 돈도 집도 차도 아무것도 없다. 며칠 전 한 보험사 직원이 끈질긴 설득 끝에 '장기주택마련 저축'이라는 보험인지 저축인지 모를 상품에 가입했다. 7년 만기의 복리상품이란다. 소득공제혜택까지 직장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상품이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 해서 귀찮게 하는 통에 가입했다.


7년 뒤면 삼십 대 후반이다. 그때면 과연 내 집이 생길까? 부모 밑에 얹혀있는 나에게 지금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나도 책임지기 힘든 세상에 너무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서른, 또래의 남자와 여자의 생각은 많이 달라 보인다. 남자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여자는 가정이라는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인가? 뭔지 모를 씁쓸함에 술잔을 비운다.


"야~ 오떡이 잡지 그랬어~"

"뭐할라꼬?"

"그만한 애가 어딨냐? 밝고 착하지 튼튼하지 술도 잘 먹지 하하"

"야 그게 칭찬이냐 욕이냐? 캬캬캬"

"..."

"야! 희택이 심각해 보인다 고마 해라"


친구 녀석들은 오늘 나를 횟감으로 결정한 모양이다. 도마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칼질이다. 난 뜬금없는 오떡이의 결혼 소식에 가슴 한 구석에 뭔지 모를 허전함을 소주로 채워 넣는다. 오늘은 소주가 달다. 오늘은 술이 좀 취하려나 보다.


난 다시 이전의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평일 야근과 주말 공부라는 지겨운 헬조선의 생활로 복귀했다.



"아~ 내년도 임금 동결이라는데..."

"진짜요?"

"물가는 오르는데 월급은 오를 생각을 않네"


회사는 2년째 직원들의 임금을 동결시켰다. 사측에서는 조선업 불황과 과거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한 경영악화로 직원들에게 원치 않는 고통분담을 떠넘겼다.


조선업 불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듯 보인다. 내가 입사했던 07년에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정점(頂點)을 찍고 난 후 2년 연속 바닥을 쳤고 올해(09년)는 사상 유래 없는 발주 가뭄 속에 선주들이 지갑을 닫아 버렸다. 게다가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도 조선 호황기를 틈타 신생 조선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중국은 저가 수주전으로 선주들을 유혹해 그나마 있는 선박 발주마저 깡그리 가져가는 실정이었다.


"지호씨 퇴근 안 해요?"

"아~ 네… 먼저 가세요 책 좀 보다 가려고요"


시간이 밤 10시가 다 되어간다. 밀려놓았던 계열사 경영분석자료 정리하느라 며칠째 야근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래 담당이었던 현지씨는 관련 업무를 나에게 떠넘기듯 다 넘겨버리고는 해가 지면 퇴근하는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칼 퇴근의 강심장을 가진 여직원이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다. 팀장 대행인 도대리도 노대리도 다른 직원들도 자리에 앉아 그녀의 퇴근을 바라본다. 처음엔 황당하던 상황도 반복되면 일상이 되어간다. 무언의 약속이 이미 오고 간듯 보인다.


'전 그냥 이 상태로 이 월급만 받을게요'

'그래 알았어 말썽만 피우지 말아 줘'


순간 머리 속에 도대리와 현지씨의 밀담이 그려진다.


"희택 씨는 퇴근 안 해요?"

"계열사 경영분석 자료가 지난 분기부터 하나도 정리가 안돼서요. 아놔 미치겠어요 정말 일을 하나도 안 해놨어요"

"하하하"

"그런데 무슨 책 보는 거예요?"


그의 책상에는 몇 권의 금융, 보험 관련 전문 서적이 놓여있고 그의 손에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들려있다. 그는 그 전부터 금융 관련 분야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최근에는 회사에 남아 관련 책들을 통독(通讀)하고 있다. 그도 나처럼 위기를 준비하는 것인가? 나도 시간만 있으면 남아서 영어공부를 하고 싶지만 넘치는 업무에 깔려 주중에는 공부할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도 없다. 그는 업무량이 적은 걸까? 아니면 그냥 제쳐두고 자신에게 더 중요한 스펙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일까? 뭐 가끔씩 덤벙거리며 자기 일을 까먹고 도대리한테 한소리 듣는 것만 빼고는 크게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다른 직원들과의 트러블도 없이 잘 지내는 모습이 부럽다.


"아 뭐 자기계발서예요. 요즘 조선 경기도 그렇고 회사 분위기가 말이 아닌거 같아요 그쵸?"

"그렇죠 뭐 그덕에 짝을 찾아 헤매어야 할 청춘이 맨날 회사에 남아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니 쩝...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사회 구성원 생산은 꿈도 꾸기 힘들 것 같 네요"

"하하하 희택씨, 외로우신 가봐요"

"며칠 뒤면 또 추석인데... 올해는 삼촌과 숙모들의 공격이 만만치 않을 듯해요, 지호씨는 아직 이십대니까 뭐 좀 낫겠네요"

"하하하 뭐 그런 걸 신경 쓰세요 시대가 바뀌었는데"


그는 나이답지 않게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며 위로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건네며 책 속으로 다시 얼굴을 묻는다. 다른 사람이 보면 내가 형인지 그가 형인지 알 수 없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양쪽 어깨 위에서 곰들이 앉아 시소를 타고 있는 것만 같다.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눈은 침침하다. 오늘만 살고 죽을게 아니라면 나의 몸이 회복할 시간을 줘야 한다. 박카스만 마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불 켜진 사무실에 그를 홀로 남겨두고 컴퓨터의 창문(Window)들을 닫는다.


"띵띵띵띵~ ♩ ♪ ♬"(윈도우 종료음)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는 없다. 그 말은 윈도우 시작음은 지옥문이 열리는 소리인 것이다. 인간은 아무 의미 없이 반복되는 소리에 감정을 이입해 간다. 한적한 심야의 공단 도로 곳곳의 사무실과 공장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오늘도 차가운 가을의 밤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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