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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운명

평범한 남자 EP 60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띠리 리리 띠리 리리"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밤새 잠 못 이루다 새벽 늦게 잠이 들었다. 몸과 정신이 분리된 듯한 느낌이다.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방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다. 눈물로 젖은 베개 위에 잠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침대에서 나와 욕실로 향한다.


욕실 안 거울 속에 또 다른 '전희택'이 보인다. 간밤에 흘린 눈물 때문에 부어오른 눈이 여태껏 보아온 나의 모습이 아니다. 이제 중국에서의 전희택은 지워버려야 한다. 한국의 전희택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나의 몸에 깊이 배어든 중국의 냄새를 지워버리려 평소보다 더 깨끗이 곳곳을 씻어내려간다.


"你都洗完了?给你~"(다 씻었어? 자~)


그녀는 호텔 방에 비치된 믹스커피를 탄 머그잔을 나에게 건넨다. 우리는 부은 눈을 한채 창가에 서서 김이 올라오는 싸구려 믹스커피를 마신다. 간밤의 화려하고 아름답던 야경은 사라지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과 희뿌연 스모그에 덮인 번잡한 월요일 아침의 상해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녀와 나는 호텔의 작은 식당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한다. 오전 출근시간과 겹쳐 도로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내는 차들로 붐빈다. 그녀와 나는 꽉 막힌 도로 위를 갇힌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시작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일까? 상해의 러시아워 속에 멈춰있는 차들처럼 우리의 시간도 멈춰있는 듯하다. 30분이면 갈 거리를 거의 1시간이 넘어서 도착했다.


공항 안은 인파로 붐빈다. 중국 경제 중심지답게 출장이나 여행 등 다양한 모습의 국적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티켓팅을 하고 캐리어를 붙였다. 손에 여권과 항공권을 들고 백팩 하나만 둘러 맨채 출국 심사 입구에 서서 그녀랑 마주 보고 있다.


"你真的走了"(이제 진짜 가는구나)

"我们会再见面吗?”(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不,我们就不见了吧。我再也不看离开我的人了”(아니 보지 말자. 난 떠난 사람은 다시 안 봐)

“对不起”(미안해)

“开玩笑的啦,你别说对不起啦,谢谢你了 喜宅!”(농담이야 뭘 또 그렇게 심각해지니, 희택아 고마웠어)

“谢什么”(뭐가?)

“你帮我实现了遗愿清单之一,那现在我死而无憾了”(나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를 이루게 해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하하하)

“…”

“合久必分分久必合,那就是人生嘛”(만남이 오래되면 헤어짐 오고 헤어짐이 길어지면 또 만남이 오게 마련이야, 그게 인생 아니겠니)


그녀는 태연한 척 가볍게 던지는 말투 같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지나간 행인이 다시 돌아와 다시 봐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을 떠나는 행인은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기에 나를 잡지 않는다. 우린 첫 만남부터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서로 잠시 휴게소가 되어준 것뿐이다. 이제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


마지막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영화 속 장면처럼 포옹과 키스가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데 그녀가 손을 내민다.


"你一定会成功!不要折磨你自己"(넌 꼭 성공할 거야! 너무 스스로를 죄어들지 마)

"...嗯"(... 응)

"喜宅!你好好儿活着 "(희택아! 잘 살아!)


그녀의 손을 잡는다. 차갑다. 나의 온기가 그녀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빼고는 그 손을 가볍게 흔들며 미소 짓는다. 천천히 등을 돌려 출국 심사장으로 가려는 순간이었다.


"部长~~您别走~!"(부장님~~ 가면안돼요~!)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다시 등을 돌려 봤을 땐 춘옌 옆을 지나 달려온 장주임이 덮치듯이 나를 끌어안는다. 나의 허리를 감아 안고는 얼굴을 가슴에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张主任!? 你怎么在这儿?"(장주임!? 어떻게 여기에?)

"呜呜 部长!您怎么不跟我说一声就走啊?你怎么一直都没有跟我联系?"(흑흑 부장님~ 너무하세요. 말도 없이 이렇게 가버리시다니, 왜 여태껏 연락하지 않으셨어요?)

"张主任! 别这样,你放我走吧"(이러지 마 장주임! 보내줘 이건 아니야)

"部长~您也喜欢我嘛~"(부장님도 저 좋아하시잖아요~)

"没有"(아니야)

"又说谎!"(또 거짓말!)


뒤에선 지켜보던 춘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온다. 장주임의 팔을 잡아 끌어 나에게서 떼어놓는다. 그리곤 장주임을 두 팔로 감아 안고는 한 손을 밖으로 내저으며 빨리 가라고 외친다.


"你快走啊!"(어서 가!)

"放开!你放开我!"(놔~! 놔란 말이야!)


장주임은 오열하며 공항이 떠나갈 듯 고함친다. 난 무의식적으로 도망치듯 출국 심사장 안으로 뒷걸음치며 들어간다. 멀리서 가죽점퍼를 입은 사내와 한 무리의 공안(公安:중국 경찰)들이 뛰어온다. 그 사내는 장주임을 붙들고 있던 춘옌의 머리를 잡아채더니 바닥으로 패대기 치듯이 제압한다. 앞으로 꼬꾸라진 그녀를 무릎으로 짓누르고 두 팔을 뒤로 젖혀 수갑을 채운다. 가죽점퍼의 사내가 뭐라고 궁시렁 거리듯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반항도 없이 바닥에 엎드린 채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한쪽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떨군다. 주변엔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들고 춘옌에게서 풀려난 장주임은 출국 심사장 입구의 검표 직원에게 막혀 울부짖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출국 심사장 입구의 자동문이 닫히고, 그 모든 장면들이 매트릭스 영화 속 정지 화면처럼 눈 안에서 계속 자동 재생된다.


"先生!你把背包放下这里然后就进去吧"(저기요~ 가방 올려놓으시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공항 세관 직원이 넋을 놓고 있는 나를 향해 얘기한다. 난 검색대를 통과해 몸 검색을 마치고 가방을 찾아 여권 검사대 앞에 서서 뒤를 돌아 출국 검사장 입구를 바라 본다. 열린 자동문 사이로 춘옌이 양옆에 공안들에게 포박된 채 끌려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장주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내 쪽을 바라보며 힘없이 손을 흔든다. 몰려들었던 인파들은 서서히 흩어지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우린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춘옌의 말처럼 우린 서로가 헤어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다. 그녀의 예감과 나의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 아픈 헤어짐일 줄 알았다면 그녀도 나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서로에게 필요한 외로움만 채워주고 부담없이 헤어질 수 있는 필요충분 조건의 만남일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필요악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서로는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겨주었다. 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그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값을…


파견 임무가 보기 좋게 끝이 났지만 나의 마음은 성취감이 아닌 죄책감으로 무겁다. 무거운 짐진 마음을 싣고 비행기는 날아오른다. 춘옌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나의 중국 파견 생활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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