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66 (개정판)
조선업 불황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가는 상승 랠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국 조선업계는 선박 수주 가뭄의 대안으로 해양플랜트(시추선) 수주에 나섰고 상선 건조기술을 접목시켜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도 대형 조선사들의 선박 수주량의 감소로 향후 자사의 주력제품인 선박의 데크하우스(Deck house : 배위의 선원 거주 아파트)와 선박블록 그리고 선박크레인의 매출이 감소가 현실화 되고 있었다. 회사는 대대적으로 자체 조직개편을 통해 해양플랜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으로 한 싱가포르의 선주부터 해양플랜트에 필요한 어커머데이션 바지(Accommadation barge : 고정식 해양시추설비 옆에 붙어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배)를 수주했다. 기존에 데크하우스를 주력으로 생산하던 기술력을 인정받아 수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말이 바지선이지 자체 엔진 동력과 대형 해상크레인 등을 갖춘 불완전한 형태의 선박과 유사했다. 당시 자체적인 동력 계열과 선박설계의 기술력이 갖춰지지 않은 자사로서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결국 아웃 소싱으로 선박 설계를 진행하고 엔진이나 기술력이 없는 부분은 돈으로 해결했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 끝에 예정된 납기일이 두 달이나 넘기고서야 진수식(進水:Launching Ceremony)이 진행되었다.
"와~ 사이즈 장난 아니네"
"이야~ 이제 우리 회사가 이런 것도 만들어?"
전략기획실 멤버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직원들이 업무도 중단한 채 진수식에 참석할 정도로 대대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다. 회장 이하 모든 임원들이 선주와 함께 선상 내부를 시찰하고 부두 안벽에 준비된 행사장에서 화려하게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육상 도크(Dock)가 없어서 초대형 해상크레인을 3척이나 동원해서 바지선을 통째로 들어올리는 초유의 진수(進水)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진수식에는 나름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오케스트라 밴드까지 초청했다.
지역 신문사에서도 '조선 불황을 타개한 중견 조선기업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장황한 특집 기사까지 실을 정도로 대외 홍보에도 열을 올렸다. 그렇게 대대적인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성대하게 진수식이 마무리되었다.
"권 전무님! 이런 상황에 어커머데이션 바지를 또 수주하시겠다고요?"
"전 반댑니다! 이번 바지선도 예상 생산 원가에 두 배가 넘었어요. 안 그래도 회사 재정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빚내서 장사를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김전무님! 그럼 어쩌실 겁니까? 구조물 사업부에 야드가 저렇게 비어가는데 다들 방법 있으세요? 일단 일감은 만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처음부터 배부른 사업이 어딨어요?"
화려한 진수식 행사와는 달리 내부 실상은 정말 달랐다. 바지선 진수식 이후 고위급 임원들의 대책회의가 열렸다. 어커머데이션 바지선는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뭣도 모르고 뛰어든 해양플랜트 사업은 회사에 감당하기 힘든 손실을 가져왔고 회사의 자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지선 진수식은 일종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화려한 쇼에 불과했다. 그런 보여주기 식의 언론 플레이가 약발이 먹혔는지 회사의 주가가 잠시 반등하는가 싶더니 예리한 주식시장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집안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회사의 양대 산맥인 권 전무와 김 전무의 신경전이 극에 치닫는 분위기다. 나는 회의실 구석에 앉아 대책회의의 서기가 되어 그 상황을 기록하며 지켜보고 있다.
"이제 데크하우스만 가지고는 힘들어요. 메이저 조선사들도 이제 선박 블록을 내작(内作)하기 시작했어요. 그 말은 그들도 이제 야드의 케파(capacity)가 남는단 얘기죠"
“그 큰 적자를 경험하고 또 수주를 해서 그 뒷감당은 어쩌시려는 겁니까? 차라리 남는 야드에 우리 기계사업부가 개발 중인 해상크레인 테스트 배드(Test Bed: 새로운 기술·제품·서비스의 성능 및 효과를 시험할 수 있는 환경 혹은 시스템, 설비를 말한다)를 설치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새로 부지를 찾아보는 것보단… 어흠"
"나 참! 왜 나의 사업장에 크레인 테스트 배드를 설치합니까? 그리고 세상에 실패 비용 없이 성장하는 회사 어디 있어요!"
당시 넘버 투였던 구조물 사업부의 권전무의 입지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야심 차게 진행했던 바지선의 엄청난 적자 때문에 다른 임원들의 회의적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워낙 매출 비중이 큰 구조물 사업부이고 고용인원 또한 수백 명에 달하는 주력 사업부라 그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을 수 없다.
기계 사업부의 김전무는 그 즈음 회사의 사업 방침에 따라 해양플랜트용 대형 해상 크레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그 크레인의 테스트 배드를 구조물 사업부 야드에 박아 넣길 바랬다. 그렇게 알박기를 통해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야욕을 모를 권전무가 아니였다.
"음… 박상무는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구조물 사업부의 매출이 계속 빠지는 상황에서 대안은 그것밖에 없어 보이긴 합니다만…”
“뭐요? 그럼 그 큰 손해를 감수하며 수주를 진행하겠다는 거요?”
“역시 그래도 박상무가 생각이 있구만 허허”
“하지만 추가적인 자금 수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박상무는 해외영업본부장에서 얼마 전 관리본부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기존 관리본부장이었던 최부장의 횡령사건이 탈루나면서 회사에서 경질되었다. 박상무는 해외영업과 자금관리까지 그야말로 회장의 신임과 돈줄을 모두 거머 쥐게 되었다.
그 위상이 마치 유비의 신임으로 전권을 인계 받은 제갈공명과도 같았다. 그의 말 한마디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말 그대로 위촉오 삼국시대의 힘의 균형이 팽팽한 유지되는 상황에서 오나라의 손권 격인 박상무가 그 균형을 깰 수 있는 솔로몬의 선택권을 가졌다.
그는 회사 부실을 감수하더라도 사이즈를 키우는 것이 회사를 존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회사의 고정비를 감당하려면 일단 매출을 보전해야만 한다. 그 또한 관리본부장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였다. 빚을 내려해도 비록 거품일지라도 회사의 성장이 보장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 역시 박상무가 뭘 좀 아네"
"..."
"그럼 해양플랜트 수주에 총력을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박상무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자금 수혈을 좀 진행해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자 그럼 마칩시다"
차분한 어조로 군중을 압도하는 회장의 한 마디로 회의는 종결되었다. 김전무는 회장의 최종 결정에 똥씹은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회장 옆에 앉아 있는 사장은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다 회장의 회의 종결에 급히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회장을 따라서 회의실을 나선다.
"야~ 이러다 우리들 정말 짐 싸야되는거 아냐? 이제 나도 딴 데 알아봐야 하나?"
"이러다가 정말 회사 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회사는 망해도 정씨 집안은 안 망해!"
"예?"
"회장 집안 말이야~ 이미 따로 다 챙겨놨지 오래전부터..."
"그게 무슨?"
"원가절감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그것도 못 알아챘어? “
“희택씨가 보기에 우리회사에서 쓰고 남는 철이 얼마나 될꺼 같아?”
“글쎄요…”
“몰라도 한 달에 수십 톤씩은 나올걸?”
“그렇게나 많이요?”
“근데 그거 왜 못 줄이는지 모르겠어?”
상한씨는 뭔가 뼈있는 질문을 던진다. 미끼에 물린 물고기처럼 그의 답안을 듣기 위해 끌려간다. 회사가 생산하는 선박블록과 선박 크레인류에 쓰이는 조선용 후판은 자동차나 다른 기계류에 쓰이는 철판보다 두껍고 무겁다. 쓰이는 양 또한 어마어마하다. 그런 철판들은 제철소에서 대량으로 구매된다. 사내의 철판 야적장에 쌓인 후판은 그 용도에 맞게 플라즈마(레이저) 절단기에서 컷팅되어 각 공정으로 투입된다.
문제는 이 똑같은 규격의 철판들을 어떻게 컷팅하는지가 중요하다. 쉽게 얘기하면 사각형 색종이를 버리는 부분을 최소화하여 최대한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오려내는 것이다. 그러면 버려지는 잔철 혹은 분철을 최소화할 수 있다. 재료 사용율을 극대화해야 재료비를 절약하고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다는 말이다.
처음 원가 절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각 부서별 절감 안을 접수 받았을 때 설계팀에서 제안되었던 철판 컷팅 설계 개선안이 있었지만 기각되었다. 당시에 밀려드는 수많은 안건들과 과도한 업무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상한씨는 뭔가 아는 듯한 표정이다. 그는 공시 업무로 재무팀과 자주연락하고 내부 재무자료를 자주 들여다 볼 기회가 많다 보니 회사의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듣는 정보가 많다. 그의 말로는 현장에서 남는 철판 잔재들이 매각하는 비용이 회장과 사장의 비자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철판 컷팅 설계를 최적화 시킨다는 말은 결국 그들의 비자금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들의 개인금고를 채워주는 캐시카우를 스스로 없앨 일이 만무하다. 어느 정도 회사의 중역쯤 되면 알만한 내용이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불문율이다. 해마다 뒤로 매각되는 철판 잔재들을 사들이는 고철 회사 또한 회장의 일가친척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 또 그런 방법이 있군요. 회사는 망해도 사장은 안 망한다더니”
“뭐 우리 같은 피죽이나 끊여먹는 서민들은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피죽이요? 하하하, 월급도 몇 년째 계속 동결이고 참 걱정이네요"
"희택 씨도 이제 딴 데 좀 알아보고 해요"
대책회의가 끝나고 회의에 들어갔던 나와 상한씨는 휴게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서로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휴게실 너머 회사 정문에는 대책회의가 끝난 고위급 임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고 있다. 이윽고 회장과 사장이 본사 건물에서 나오고 회장의 차를 뒤따라 임원들이 차례대로 차에 올라 회사를 빠져나간다. 회의 후 그들만의 회식을 진행하려나 보다. 그 안에서 또 뭔가 그들만의 밀담이 이뤄질 것이다. 회사 직원들의 운명이 그들의 손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스스로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 세상은 자신의 자유의지보다는 세상의 시스템을 움직이는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의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찬양하며 개인에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인간은 소수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