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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 학생는 바뀐다

평범한 남자 EP 68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도슨~ Which one is better? (어떤게 나아요?)"

"음... 301구 추천합니다."

"이거요?"


토요일 오전 시내 중심의 서점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녀의 중국어 과외를 위한 교재 선정을 위해서다. 아무거나 초급 교재를 사서 오면 가르쳐 주겠다는 나의 말에 그래도 선생이 교재를 골라줘야 되지 않겠냐며 첫 수업은 교재 선정부터 시작되었다.


"음... Isn't it difficult for me?"(어렵지 않을까요 나에게?)

"저도 처음에 그걸로 시작했어요."

"Really? 그럼 오케이~ 이걸로 해요"


그녀는 나와 있을 때 영어와 한국말을 거의 50:50으로 섞어 쓴다. 그녀 말로는 그래도 70:30이었는데... 내가 영어 회화 실력을 늘리고 싶다고 하니까 나의 리스닝을 위해 영어 함유량을 20% 증가시켜 준거라고 한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뭐 그녀의 반반 치킨 같은 언어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영어를 섞어가며 이 책 저 책 구경하며 대화하는 우리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음... 제시카 티쳐! 영어는 둘만 있을 때 쓰면 안 될까요?"

"No! It's all for you, 도슨!"(모든게 도슨을 위한거예요!)


내가 자초한 일이다. 뭐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대중의 시선쯤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뭐 다행히 그녀가 노랑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여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게 나을 듯하다. 이미 중국어를 공부해본 나로선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 심지어 그녀와 나의 모든 문자 메시지는 영어로 이루어진다. 적지 않은 스트레스지만 ‘NO PAIN NO GAIN’(고통이 없으면 얻는게 없다)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체화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그것이 현지가 아니고 모국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언어를 배우는 환경은 그만큼 중요하다. 주어진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은 언어 학습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지금은 그녀가 나의 영어학습 환경을 바꿔주고 있다. 우리는 교재를 사고 시내의 한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蒿豪好号”(hāo háo hǎo hào 하오하오하오하오)

"도슨! 이게 뭐예요?

"자! 중국어의 4가지 성조 연습이에요 따라 해 봐요"

"하오하오 하오하오"

"발음이 심각하네요. 성조를 다 무시하네, 좀 배웠다면서요?"

"It's been too long"(너무 오래됐어요)"

"자~ 계속 따라 해 보세요"

"하오하오하오하오"


그녀가 중국어를 배웠다는 건 아마 그냥 교재 진도만 조금 나갔을 뿐일 것이다. 난 1시간 동안 그녀에게 발음만 바꿔 1성부터 4성까지 똑같은 발음의 성조만 연습시킨다. 그녀는 조금씩 지쳐가는지 표정이 썩어가고 있다.


"도슨! Don't you think it's quite enough today!(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안돼요~ 계속하세요!"

"아~ I’m so tired!" (너무 지쳐요)

"벌써 이러면 어떻게요 이 연습만 일주일 동안 할 건데..."

"Oh my god~ never!" (오 마이 갓 안돼~)

"성조를 잡고 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성조에 따라 뜻이 변하는 중국어는 많이 알기 전에 확실히 알고 가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다시 따라 한다. 한 시간이 더 흘렀다. 그녀는 지쳤는지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한다. 난 그녀에게 집에서 매일 최소 30분씩 성조 읽는 것을 연습하라고 충고한다. 그녀는 건성으로 귀찮은 듯 고개만 끄덕인다.


"Let's have a lunch!(점심 먹어요) 도슨! 오늘 첫 수업 기념이니 내가 쏠게요"

"아니 괜찮아요 그럴 필요까지야"

"근처에 괜찮은 수제 버거집 있어요 고고~"


그녀는 나의 대답은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듯 내 팔을 잡아 끌고 커피숍을 나간다. 토요일 오후 시내 중심은 인파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나아간다. 자꾸 뒤처지는 나를 보더니 답답했는지 내 손을 잡아 끌며 속도를 올린다. 그녀의 손에서 열이 나고 있다. 나의 손에서도 열이 올라온다. 열과 열이 만나 맞잡은 손은 더욱 뜨거워진다.


도착한 수제버거 집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기저기 외국인들도 꽤 많이 보인다. 그녀 말로는 버거가 완전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며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라고 한다. 다행히 자리를 잡았다. 내 다리가 땅에 닿지 않는다. 아메리칸의 평균 신장에 맞는 롱 체어(긴 의자)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공중에 떠있는 다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피가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다. 그녀는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주문을 한다. 뭐 물어봐도 몰랐겠지만 빨라서 좋다. 불필요함이 생략된 아메리칸 스타일이 어색하지만 때론 편안하다.


'무슨 걸신이 들렸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버거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그녀는 기아에 허덕인 아이 마냥 허겁지겁 버거를 입안으로 쑤셔 넣는다. 반복되는 중국어 발성 연습에 열량 소모가 꽤 컸나 보다. 맛이 나쁘지 않다. 패스트푸드 가게에 파는 그런 햄버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뭐 그만큼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녀는 말없이 그 큰 버거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는 온화한 표정 되찾았다.


"성격이 까칠해져요 When I'm hugry(배고프면) 하하"

"그런 것 같네요"

"도슨! 근데 영어는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거예요?"

"이직하려고요"

"Are you serious?"(정말이에요?)

"Yep!"(예!)

"Why? 도슨 회사도 규모도 있고 나쁘지 않은 거 같던데..."

"그냥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음… 그럼 이직 스펙 때문이군요"

"그런 셈이죠"

"그럼 이직하면 수업 때 못 보는 건가?"

"그렇겠네요 하하 그래도 과외는 계속해드릴게요 그 대신 유료로다가 하하하"

"Oops! No way~"(웁스 말도 안 돼!)


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나의 이직을 방해하기 위해 영어 사용을 자제하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난 그녀에게 두 손을 모아 용서를 구하는 척 없던 애교를 부린다. 그녀는 폭소를 터뜨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요즘 학교 실습 때문에 갈수록 힘들어요, I should go to school later(좀 있다 학교 가야 돼요)"

"정말 대단하세요, 공부와 일을 같이 병행하시다니…"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 연상녀이다. 어른들이 흔히 얘기하는 혼기 꽉 찬 노처녀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간호대학에 들어가 어린 학생들과 경쟁하며 자신만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무엇이 그녀에게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의 목표가 있는 여성의 눈빛은 뭔가 모르게 달라 보인다. 주변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해외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그녀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도슨~ Do you have something to do on Saturday night next week?"(다음 주 토요일 저녁 무슨 일 있어요?)

"왜요? Nothing to do!"

"정말 무료한 남자군요 토요일에 약속도 없고 하하"

"..."

"그럼 Let’s study English then!"(그럼 그 때 영어 공부해요!)

"예?"

"그냥 그 날 저녁에 시간 비워놔요!"


그녀는 실습 때문에 학교에 가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와 버거집을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걷는다.


“도슨이 내 선생님이 될지는 생각도 몰랐네요. You’re the most strict teacher I have ever met” (당신은 내가 만난 선생님 중 가장 엄격한 것 같아요)


그녀는 오늘 힘들었지만 즐거웠다며 나에게 악수를 건넨다. 그때 그녀의 버스가 온다.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오른다. 그녀는 여태껏 내가 잡은 여자들 손 중에 유일하게 뜨거운 손을 지녔다. 그녀가 가진 열정 때문일까?


그렇게 나의 첫 중국어 과외는 끝이 났다. 선생과 학생은 바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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