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 남자 Episode 70
"도슨~ 오늘 왜 말이 별로 없어요? 영어 스피킹 연습시켜주려고 데리고 왔는데..."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리스닝 연습 많이 했어요"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이 바닷가 수면에 비친 화려한 건물 조명 불빛을 받아 내 눈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번잡한 펍을 나와 맥주캔을 하나씩 들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있다. 그녀는 술을 꽤나 마신 모양이다. 펍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려 한잔 두 잔 주고받더니 얼굴이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가 지금 바닷바람에 조금씩 식어가고 있는 중이다. 토요일 밤 해변에는 적지 않은 인파들이 오고 간다. 눈 앞에는 몇몇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들이 밤바다를 바라보며 서로의 몸을 기대고 앉아있다.
"추워~"
"이거 입어요"
"도슨~ You're so sweet" (참 다정하네요)
나는 입고 있던 재킷으로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가을바다의 밤바람이 술기운을 깨운다.
"도슨은 걸프렌드 없어요?"
"예.. 없어요"
"Why? 참 매력 있는 남잔데..."
"여자들이 보는 눈이 없나 보죠 하하"
"도슨! You're too much! 하하" (너무 하는군요)
그녀는 나의 예상치 못한 답변 때문에 폭소를 터트리고는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댄다.
"사실 나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
"뭐 아까 눈치챘겠지만 American boyfriend(미국 남자 친구)"
"왜 헤어졌어요?"
"글쎄요? 왤까?"
그녀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보인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 한국으로 왔고 같은 영어학원 강사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보다 어린 이십 대 중반의 그는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계속되는 그의 대쉬에 그녀도 그를 받아줬다고 한다.
국경의 장벽과 적지 않은 나이 차이를 극복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문화 체험이었던 것일까? 1년간의 달콤했던 기억은 한 장의 편지만 남겨둔 채 사라졌다. 그게 억울해서였을까?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간호학 공부를 시작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공부인지 모른 채 그냥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동경인지 복수심인지 모를 불타는 무언가를 쏟아 부을 목표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간호대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서도 어린 동생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했다고 한다. 하루에 2~3시간씩 자며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고 한다.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어떻게 왔는지 그냥 웃음이 난다고 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사랑의 배신? 아니 사랑의 무시라고 해야 할까? 믿었던 사랑 혹은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분노가 엄청난 집중력을 가져온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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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택아~ 서울로 편입할 생각 없어?"
"왜? 그런 얘기를 지금 하는 건데?"
군 전역 후 돌아온 캠퍼스, 지방 사립대의 높은 등록금에 비해 내가 받는 혜택과 앞으로 받을 혜택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시 사회 부적응 복학생의 친절하진 않지만 유용한 가이드가 되어주던 친구가 있었다. 입대 전 나의 짝사랑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원사격과 기밀제공 등을 마다하지 않으며 굳건한 전우애 못지않은 우정을 지켜온 동기 녀석이다. 짝사랑의 아픔을 위로해 주며 나의 입대를 지켜봤던 녀석이다. 동성 못지않지 편안함에 같이 있을 때 서로는 성 정체성을 잊고 있었다.
♩ ♪ 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조금씩 우리를 갈라놓는데... ♬
그런 그녀가 조금씩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매번 노래방에서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부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 노래를 그녀와 둘이 있는 노래방에서 부를 때 그녀는 나의 변심을 눈치챘다고 한다. 그런 나의 달라진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녀는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그녀마저 놓칠 수 없어 더 멀어지기 전에 고백했다. 그녀의 집 앞 빨강과 노랑의 경계 어디쯤의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마주 보고 있었다.
"희택아~ 사실 난 넌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런데 니가 나를 향한 마음을 알고 나서 솔직히 많은 시간 고민했어"
"그래서?"
"난 니가 나보다는 좀 더 나은 환경이었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지금은 좀 아니잖아… 수도권 대학으로 편입할 생각 없어? 재수하거나…"
그녀는 나의 고백에 나를 다시 바라봤지만 그녀는 나를 본 것이 아니었고 나의 배경을 보았던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지방사립대 간판과 가진 것도 없고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나의 배경은 그녀가 고백을 받아줄 수 없는 정당한 사유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조심스럽게 꺼내는 시의적절 하지 않은 제안은 나를 좌절시켰다.
그녀도 결국 과거의 그녀(짝사랑)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척했던 것뿐이었다.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둔 그녀는 이미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이미 깨달은 듯 보였다. 남일에는 감성적이고 관대하지만 그게 내 일이라면 이성적이고 냉정해지기 마련이다.
다시 편입이나 수능을 다시 칠 만큼 나의 상황과 집안 형편이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일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했던가? 그런 갈대만 믿고 나의 인생에 도박을 걸고 싶지도 않았다.
그 날 이후 우리 둘은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난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인지 분노인지 모를 에너지를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에 쏟아부었다. 무시당한 순정은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되었다. 그녀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는 놈이라는 것을… 매일 도서관에 처박혀 전공, 교양과목 공부에 매진했고, 그 해 성적 우수장학금을 석권했다. 학과 사무실 게시판에 걸린 성적 장학금 명단 제일 위에 나의 이름을 올렸다. 그녀가 보란 듯이…
사랑의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사랑의 배신에서 오는 힘은 더욱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