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72 (개정판)
"희택! 다음 주부터 주간경영회의 자료에 해양플랜트 수주 매출 현황을 별도로 표시해서 회의자료에 넣을 수 있도록 해, 그리고 오늘까지 회의 양식 초안 작성해서 보고하고"
"예… 알겠습니다."
‘으이그! 저노무 차노 또 던지네!’
도다리가 또 업무를 던진다. 갈수록 사이드 업무들이 많아진다. 팀원에게 업무 던지기를 밥 먹듯이 한다. 물론 팀원이 팀장의 업무를 받아서 하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던진 업무가 완료되어 돌아가기도 전에 또 다른 업무가 계속 날아온다. 포수가 공을 돌려주지도 않았는데 또 던진다. 던질 줄만 알았지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는 기억도 하지 못한다.
“어! 희택 이 결재 건은 뭐야?”
“어제 요청하셨던 국내외 계열사 월별 수주/매출 변화 추이를 정리한 자료입니다.”
“아! 맞다. 그래 여기 놔두고 가봐”
결재서류가 올라오면 그때서야 기억이 돌아오나 듯 했다. 당시 LA 다저스의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필라델피아로 자리를 옮겨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으며 국위선양을 하고 있었고 그의 투구 속도처럼 날아오는 업무 때문에 밑에 직원들은 그에게 '차노'라는 그가 모르는 또 다른 별칭을 붙여주었다.
"보현 씨~ 경영회의 자료 양식을 좀 손봐야 할 거 같은데요"
"아~ 지금 좀 바쁜데요 좀 있다가 얘기하면 안 될까요?"
나는 기획실 IT파트 막내인 보현씨의 자리로 다가간다. 그 즈음 회사의 업무 전산화(ERP : Enterprise Resource Planning)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기획실의 10명의 멤버 중에 IT파트 인원은 박대리를 필두로 방대리, 우덕씨 그리고 보현씨 4명이 전부이다. 그들이 매출 4000억의 중견기업 IT를 전담하고 있었다. 얼마 전 기획과 IT업무를 병행하던 미화씨가 출산휴가로 공석이 되어 그들의 업무 부하가 더 커진 상황이다.
IT파트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박대리는 푸근한 인상과 체격과는 달리 상당히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기획파트인 나는 그의 업무적인 성향을 잘 모르지만 IT파트의 멤버들은 그를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IT업무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다. 사람은 공적으로 만나는 것과 사적으로 만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이유이다.
“나도 좀 급한 업무인데 좀 들어주면 안될까요 보현씨?”
“…”
그는 나의 말은 들은 체 만체하며 컴퓨터 화면만 주시한다. 당시 보현 씨가 나의 업무인 경영회의 및 해외 계열사 그리고 원가절감 프로젝트의 전산화를 담당하고 있어 많은 시간을 그와의 업무협의에 할애해야 했다. 문제는 IT업무를 전혀 모르는 나는 그의 손을 통해서만 나의 생각과 기획 안이 컴퓨터 화면에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손발은 묶긴 채 생각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진 않는다. 생각은 말과 행동 그리고 결재서류를 거쳐 서버에서 구현되어야만 일이 마무리된다.
"보현씨~ 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일과시간 끝나고 저녁에 얘기하면 안 될까요?"
"안돼요~ 오늘 오후까지 경영회의 변경 초안을 도팀장님에게 확인 받아야 해요"
"아~ 지금 박대리님이 시킨 생산공정 프로세스 오류 수정 때문에 다른 거 봐줄 시간이 없어요"
IT파트에서는 박대리가 ‘차노’인 모양이다.
전략기획실은 기획팀과 IT팀이 합쳐져 있다. 전혀 다른 팀을 한곳에 합쳐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두 팀을 쪼개 놓기는 인원 상으로 너무 부족해 보인다. 당시 전사 ERP 시스템 구축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던 사장은 적지 않은 비용을 ERP 컨설팅 비용으로 쏟아 붓고 있었다.
IT 컨설팅 비용은 부르는게 값이다. ERP 모듈 하나 개발하는데 적게는 몇 천 많게는 몇 억은 기본이다. 사실 고작 4명의 IT직원으로 전사 ERP 모듈개발은 역부족이다. 신규개발은 대부분 외주 업체를 컨설팅을 통해 진행되고 각 IT직원들이 각 개발 모듈 별로 PM(Project Manager)를 맡아 유지보수를 하는 방식으로 IT팀이 운용되고 있었다.
한 해에 몇 십억씩 지불되는 IT 시스템 개발 컨설팅회사는 사장의 후배가 경영하는 회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후배는 잊을 만하면 뚜껑이 열리는 빨간 스포츠형 벤츠를 타고 회사에 나타났다. 그럼 우리는 저 회사 또 돈 떨어졌나보네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는 올 때마다 사장에게 새로운 모듈 개발을 제안했고 며칠 뒤면 적게는 수천 많게는 몇 억씩 하는 프로그램 개발관련 결재가 올라오곤 했다.
박대리와 도대리(팀장대행)는 사이가 좋지 않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IT에 문외한이 도대리가 위에서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결재 권한을 가지고 있다 보니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처음에는 이런 문제로 IT관련 결재서류는 박대리가 사장에게 직접보고하고 결재받는 것이 맞지 않냐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사장은 향후에 도대리를 전략기획실장으로 확정한 것인지 그의 IT역량 강화를 위해 IT파트 업무까지 모두 결재를 하라는 별도의 지시가 내려지며 모든 의혹과 소문들을 일축시켜 버렸다.
그런다고 없던 IT역량이 하루 아침에 생겨날리 만무하다. 박대리는 IT결재 건이 있을 때마다 도대리를 찾아가 적게는 몇 십분 많게는 몇 시간씩 그에게 결재보고가 아닌 IT강의를 늘어놓아야 했다. 나중에 박대리는 더 이상 도대리와 부딪치기 싫었는지 IT결재 건은 모두 IT파트 밑에 직원들을 시켜 도대리의 결재를 맡게 했다.
문제는 도대리가 무슨 지시를 하려 해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는 법이다. 도대리는 전적으로 박대리의 말에 의존해 모든 걸 결정할 수 밖에 없다. 사장도 그런 도대리의 IT 역량을 알기에 그냥 박대리에게 프로그램 개발과 유지보수를 전적으로 맡기고 있었다.
과거 둘 사이에 기획실장이 있었을 땐 이런 문제가 없었지만 공석이 되고 나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이제는 둘이 거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할 말은 자기 밑에 부하직원들을 통해서 전달하는 형국이다. 그래서인지 기획파트와 IT파트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경계선 같은 것이 존재했다. 이제 나에겐 방법이 없다.
"박대리님~ 와~ 어깨가 엄청 뭉치셨는데요!"
"야~ 됐다 됐어~ 이놈이 또 와 이라노?"
"에이~ 대리님 요즘 고생 많으신 거 아니까 제가 안마서비스 좀 해드리려고 그러죠 하하하"
"또 뭔데 뭔데? 니 속을 내가 모리나? 얘기해봐라!"
박 대리는 못 이긴 척 나의 얘기를 들어준다. 난 전략기획실에서 유일하게 IT파트와 기획파트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는 존재가 되곤 했다. 물론 이건 내가 살아 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야지만 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은 나만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때로는 우호 관계를 통해 효율적이고 빠르게 처리할 수도 있다.
"보현씨~ 내가 시킨 거는 내일하고 일단 희택씨꺼 좀 봐줘!"
"예 알겠습니다"
보현씨는 그제야 나의 기획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나의 기획안대로 시스템을 수정 변경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회의자료 상의 구조물 사업부의 수주, 매출을 해양플랜트 부분만 별도로 떼어내서 회의자료 상에 구현해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A4 종이 보고서 위에 몇 개의 칸을 더 삽입해서 합쳐져 있는 구조물 사업부의 매출을 조선분야와 해양플랜트 분야로 쪼개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는 안에 로직(logic)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오늘 안에 수정하기는 힘들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라 뭐라고 말도 할 수 없다. 그의 컴퓨터 화면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기호와 프로그램 언어로 도배되어 있다. 그는 내가 구사하는 중국어가 암호처럼 느껴지듯 코딩언어는 나에게 미지의 세계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는 존재는 외국인 뿐만은 아니다.
"보현 씨~ 제발 부탁 좀 할게요! 모레 경영회의 자료에 꼭 반영해야 해요"
"아~ 힘든데…"
"내가 담에 소주 한잔 쏠게요!"
"음… 진짜죠? 나 소고기 좋아하는 거 알죠?"
“오케이 소고기 콜!”
나는 또 그에게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이건 회사 업무를 하는데 왜 내가 그에게 술을 사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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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귀덕이와 시내의 소갈비 집에 마주 앉았다. 얼마 전에 친구들 중에서 가장 빨리 대리로 진급했다. 녀석은 요즘 회사에서 잘나가는지 돼지하고는 친하지가 않다. 오랜만에 그가 한잔하자는 제안에 성사된 술자리다. 좀처럼 자기 입으로 보자는 말을 않는 친구라 궁금증을 안고 나온 자리였다.
"델파이(Dephi)?"
"어 그렇다던데?"
"헐~ 아직도 그 프로그램 쓰는 회사가 있나? 요즘은 C++이나 Java가 대부분인데.."
그런데 그의 대한 궁금증보다 나의 궁금증이 더 큰 화제로 부상하고 있다. 그는 컴퓨터공학 전공으로 잘 나가는 금융업계의 IT 실무자이다. 요즘 IT와 엮인 나의 업무 얘기를 듣더니 조언인지 강의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역시 이럴 때 친구가 요긴하게 쓰인다.
"야~ 그런 간단한 일이 무슨 하루씩이나 걸려? 말도 안 되는 구만"
"뭐? 사실이야?"
"내가 보니까 널 갖고 노는 거 같구먼"
"그의 말로는 로직이 복잡하게 꼬여서 그런다고 하던데.."
"만약 그의 말대로 로직이 꼬였다면 그 사람의 프로그래밍 능력이 문제다"
귀덕은 자신도 현업 실무자들과 전산화 관련 업무를 추진할 때는 프로그램 개발에 되도록 많은 여유시간을 확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이란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최대한 시간을 많이 벌어놓고 보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IT분야를 잘 모른다면 특히 더 그렇다. IT업무라는 것이 급하게 주먹구구식으로 막 만들다 보면 나중에 프로그램의 확장성을 고려하지 않아 처음부터 다 뜯어고쳐야 하는 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아~ 이제는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도 배워야 하나?’
내가 모르는 세계가 너무 많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다른 누군가을 통해서만 접근하고 처리할 수 있다. 개인의 능력의 한계는 다른 이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 비용은 오로지 내 몫이다. 그래서 직장 내 우호적인 관계 유지는 필수이다. 그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