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73 (개정판)
"여자가 너무 고급이라 도저히 내가 감당이 안 된다"
"외모가 고급스러워서 고급만 찾나 보지 뭐, 너 원래 외모는 고급만 찾잖아 하하하 "
나는 술잔을 비우며 하소연하듯 말하는 귀덕에게 비꼬듯이 대답한다. 얼마 전 알게 됐다는 승무원 여자를 여러 번 만난 것 같다. 그 여자는 온몸이 명품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명품 족이라고 한다. 그녀는 외모의 아름다움을 명품으로 더욱 빛내려고 하는 건지 몸에 걸치고 나오는 것들만 몇 백만 원어치는 되어 보인다고 한다.
얼마 전 귀덕은 그녀의 생일날 중저가 브랜드의 백을 하나 사서 선물해 줬다고 한다. 나름 자기 선에서 큰 마음을 먹고 사준 것이다. 그녀랑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그녀에게 성의을 보이려고 사준 선물이었다. 그녀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한 번도 그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고가의 명품가방이 몇 개인지 그를 만날 때마다 바뀐다고 한다.
"야 그 여자 완전 된장녀 같은데… 넌 지영이한테는 그리 아끼더니 걔한테는 아주 퍼붓는구먼"
"아~ 지영이는 그런 거 안 좋아해~"
"그래? 명품 안 좋아하는 여자도 있냐? 그냥 너 생각해서 티 안내는 거겠지"
"…"
"그래서 참 지영이랑은 헤어진 거야?"
"뭐 그런 셈이지…"
"야~ 너도 참 너무 한다 그런 착한 애를..."
여자는 착하다고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남자는 인성을 갖춘 여자보다 섹스 어필하는 여성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여자 중엔 성인이 없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그런 남성의 기호를 잘 아는 여성들로 넘쳐난다. 환골탈태가 가능한 성형기술과 첨단화 되어가는 화장기법 그리고 남성의 시선을 사로잡는 패션 스킬로 자신의 외형적 가치를 올리고 있다. 그들은 외관에서 자신들의 가치가 완성된다고 믿는다. 외모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투자비용은 능력 있는 남자를 쟁취 함으로서 다시 회수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결혼식장에는 투자대비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며 웨딩마치를 올리는 선수들의 은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여성들이자신의 투자가 부족해서라며 더더욱 외모에 집착한다. 그래서 버는 것보다 더 많이 투자하는 마이너스 명품 족들도 적지 않다.
세상은 어차피 빚으로 넘쳐나고 그 빚이 경제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던가. 과거 한국경제의 급격한 외형성장은 흐름은 여자들의 급격한 외모성형의 열풍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일단 잘살고 보자는 생각은 여자들에겐 일단 예뻐지고 보자로 이해되는 모양이다. 그 흐름에 발맞춰 여자들의 외모 성형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성행하고 있었다. 한국의 성형기술은 날로 발전해 한국으로 성형관광을 오는 외국인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근데 지영이 술만 취하면 전화 온다"
"하하하 역시 지영이답다, 귀엽네"
"지랄! 귀엽긴 완전 짜증 나는구먼"
"네가 걔한테 그럼 되냐? 이 잔인한 놈아~"
"머리는 그걸 아는데… 몸이 반응하지 않는데 어쩌냐?"
지영이는 아직 녀석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귀덕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모른 체 자신이 그에게 소홀했다고 생각한 건지 "오빠~미안해 잘할게"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먹이며 전화했다고 한다.
귀덕은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그런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지만 반복되는 통화 속 취중진담인지 취중취담인지 모를 연락에 지쳐가고 있었고 이제는 그녀의 전화를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지영이는 요즘 여성답지 않은 꾸밈없는 털털함과 솔직함이 그녀의 매력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화려한 외모와 명품으로 무장하고 내숭과 가식을 탑재한 여성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도 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 속에서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은 일단 예뻐야 팔리는 법이다. 물론 품질도 중요하지만 일단 팔리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상품이야 반품이 되겠지만 사람은 반품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의 외적 가치(디자인)를 높이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현명한 생존법처럼 보였다. 당시 K5라는 기존에 없던 파격적인 디자인의 승용차가 출시되며 베스트 셀링카에 오르며 남자들의 세계인 자동차 시장에도 외관의 중요성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는 듯 보였다. 한국에서는 차든 여자든 일단 예쁘고 봐야 한다.
여자는 외모라는 경쟁력, 남자는 능력 곧 재력이라는 경쟁력이 이 시대의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다. 그것을 반영하듯 한국 드라마 속의 여자와 남자는 항상 그런 경쟁력을 갖춘 남녀의 막장 로맨스가 대세를 이루는 듯 보였다. 대중은 그런 드라마가 자신의 현실이 되어가길 바라는 것일까? 드라마 속 연예인들의 화장법과 코디법은 여자들에게 유행처럼 번졌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얻기 위해 열심히 오늘도 회사 출근 도장을 찍으며 계좌잔고를 늘리려 고군분투한다.
귀덕은 그런 외적 가치와 내적 가치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외적 가치를 지향하지만 내적 가치도 포기할 순 없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다.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 자식아!"
"뭐 난 그러고 싶었겠냐? 지영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너무 안돼 보이잖아"
"그래도 그렇지..."
오늘은 재득의 하소연을 듣는 날인 것 같다. 느닷없는 그의 술자리 요청에 둘이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난 중재위원회 위원장이 체질인가 보다. 꼬치친구들은 다 같이 모이면 하지 않던 마음속 얘기는 왜 일대일 대면식만 가지면 봇물 쏟아지듯 나오는 것인지… 20년을 같이 한 친구도 서로 간에 말 못 할 일들이 많다.
사실 너무 가까울수록 불편해지기도 한 것이 친구관계이다. 친할수록 털어놓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인데, 가끔씩은 마음속 얘기를 털어서 날려 보내고 싶은데,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너무 친하면 오히려 비밀이 많아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즐겼다. 국내도 좋지만 해외를 선호했다. 되도록이면 멀리, 나를 모르는 세상 속에 놓이는 기분을 즐겼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허락되면 나가려고 했다. 나름 친화력이 좋은 나는 해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빨리 친해졌고, 나의 비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돌아오면 한 층 후련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그 때문에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나의 생활영역과 겹치지 않는 인연은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비밀을 그들에게 실어보내버리는 기분이랄까? 그런 서로의 솔직함 때문인지 해외에서 여행 중에 만난 사람과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겹치지 않는 사람에게는 솔직해지기 쉽다. 친구들은 나에게 털어놓지만 정작 나는 나의 비밀은 낯선이들에게 털어놓고 다녔다.
"지영이가 연락이 왔더라고, 집도 근처고 해서 몇 번 만났지"
지영이는 귀덕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녀석이 연락을 끊어버리자 재득에게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울면서 하소연하는 지영이의 술잔을 받아주며 그녀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는 둘은 그렇게 가끔 집 근처의 선술집에서 만나 서로의 술친구가 되어주었고 재득은 그녀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려고?"
"뭐 술 먹고 실수한 것 뿐야! 그리고 지영이는 녀석을 못 잊는 거 같더라"
"너만 입 다물면 돼"
"그럼 왜 내한테 얘기하는 건데… 그냥 혼자만 알면 되지"
"자꾸 옛날 걔가 생각나잖아…"
재득은 너무 오랜만에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에게도 잊지 못할 사랑이 있었다.
삼 형제의 집안에 막내로 자라온 그는 형들 뒷바라지를 위해 일찌감치 공고를 졸업하고 군복 대신 기름 떼 묻은 작업복을 입었고 3년간 방위산업체에서 기계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친구들 중에선 가장 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 집에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덕분에 녀석은 우리의 물주가 되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쯤엔 그는 이미 세상의 쓴 물 단물 다 마셔본 베테랑 사회인이 되어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를 배웠다. 과거 모태신앙으로 학창 시절 교회 청년부 회장까지 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던 그였지만 교회에 발을 깊이 담그면서 알게 된 교인들과 목사들의 비리와 가식적인 모습들을 보고 교회에 발길을 끊어버렸다.
철 모르던 시기에 모은 돈은 녀석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었고 술만 취하면 자주 들락거리던 집 근처 작은 양주 바에서 젊은 여사장과 눈이 맞았다. 20대 중반의 당찬 여성이었다. 어린 나이에 바를 운영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재득처럼 어린 나이에 사회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런 점이 통했던 것일까 녀석은 퇴근하면 매일 그곳으로 출근했고 단골고객으로 시작해서 동거하는 사이로 발전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친구들 사이에선 재득이 제일 먼저 상투를 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하루아침에 그녀가 사라졌다. 편지 한 통만 남겨둔 채…
[오빠 정말 미안해! 나 찾지 마! 부탁이야! 그리고 사랑해!]
녀석은 식음을 전폐하고 회사도 나가지 않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 폐인으로 변해갔다. 그녀를 찾으려 이리저리 수소문을 했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정신을 쏟아부을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고 집안에 틀어박혀 주식투자에 빠져들었다. 낮에는 주식 창을 들여다 보고 장이 끝나면 술에 절어 잠에 들곤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코스닥 작전주에 휘말려 수년간을 일해서 모아둔 돈을 몇 달만에 날려 버렸다.
하나님의 신실한 어린양으로 시작해서 업계에서 인정받는 성실한 기술자로 돈도 꽤나 모으고 천생연분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던 한 남자의 희망찬 인생이 고작 몇 달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그녀의 소식은 우리를 더욱 경악케 했다. 그녀는 유방암 말기에 암세포가 다른 장기까지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재득에게 차마 아픔을 줄 수 없어 말없이 그를 떠났고, 혼자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고모가 있는 시골에서 남은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한 녀석은 이미 장례가 끝나고 남겨진 그녀의 유골 앞에서 오열했다. 우린 처음으로 녀석의 눈물을 보았다. 우리 중에 제일 작았지만 가장 어른스럽게 성장했던 녀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힘든 환경과 고생 속에서 눈물 한 번 보인 적이 없던 녀석이었다.
사랑의 아픔은 처음으로 그에게 뜨거운 눈물을 선사했다.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던 그였다. 그런데 하필 친구의 전 여자 친구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버린 것일까?
정말 사랑은 언제 어떻게 찾아오고 떠나갈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놈이다.